살다보면 종종 내게는 너무 익숙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낯선 경험이거나 심지어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는 사실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놀랍습니다). 그 놀라움의 강도는 상대가 나와 맺는 친밀함의 강도가 높을수록 커지기 마련이며, 대개 큰 차이일수록 사소한 일상의 순간에서 갑자기 마주치곤 하지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주말 저녁, 소파에 편한 자세로 반쯤 기대어 긴장감 없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문득 생리대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간 숱하게 본 광고들처럼 생리혈이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흡수돼 늘 보송보송하며(정말?) 민감한 피부에 직접 닿는 부위는 천연 순면으로 만들어 자극이 거의 없다(글쎄?)는 문구는 문자 그대로 복사한 듯 동일했지만, 이를 시각화하는 방법이 기존과는 다르더군요. 옆에서 같이 화면을 보던 남편이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빨간색을 쓰다니 색다르네.”
순간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럼 생리혈이 붉은색이 아니면 무슨 색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 피는 붉은색입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우리는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솟아나면 놀라고 조금 무서울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상처에서 붉은색이 아닌 희거나 누렇거나 푸른 피가 나온다면 그게 더 무서울 거예요. 그러니 어린 시절 보았던 TV 외화 시리즈 <v>에 나왔던 파충류 외계인의 초록색 피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일 테죠.
그럼에도 지금껏 생리대 광고는 모두 짠 듯이 생리혈을 파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익숙하게 생리혈을 본 여성들이야 그걸 광고 기법으로 여기고 넘어갔지만, 월경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들의 뇌리에는 생리혈의 일차적 이미지로 파란색이 익숙하게 자리잡았던 겁니다. 물론 생리혈이 늘 빨갛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몸 상태에 따라 달라지기에 옅은 분홍색에서 짙은 갈색까지 다양하지만 어디까지나 붉은색을 중심으로 한 변화일 뿐, 어떻게 봐도 파랗지는 않습니다. 여성은 사람이지, 투구게가 아니거든요.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을 읽어본 적 없는 이들도, 비록 양반의 핏줄이지만 얼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탄식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됐을 정도로 강력한 의미를 담은 밈(Meme·문화 복제)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죠.
피로 얼룩진 여성들의 홍길동
그러나 온갖 금기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금기로 여겨질 21세기를 살면서도 여전히 깨지지 않는 금기 중 하나가 ‘월경’이란 단어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날’(무슨 날?) ‘매직’(이런 짜증 나는 마법이 또 있을까?) 등으로 은유적으로 불리다가- 난임 카페에선 종종 ‘홍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나마 얻은 명칭이 ‘생리’입니다. 원래 생리(生理)란 한자 그대로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인데, 이를 “성숙한 여성의 자궁에서 주기적으로 출혈하는 생리 현상”이란 뜻으로 축소해 씁니다.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린 오랫동안 그것을 부르기 꺼렸을까요. 생식 관련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으로 쓰는 단어도 아닌데 말이죠.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해서일까요,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선 생리에 대한 무지와 터부(금기)가 남아 있습니다. 2019년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영화상을 받은 레이카 제타브치 감독의 (Period, End of Sentence)에 나오는 나이 든 인도 여성은 “월경을 왜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 말에 “그건 신만이 아신다”고 답합니다. 아이를 서넛은 낳았을 연배의 여성조차 이러니 남성들은 물어 무엇 하겠습니까. 실제로 화면 속 그들은 월경을 “여자들만 걸리는 질병”으로 알고 있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국내에서도 생리대 크기가 여성의 신체 크기와 비례하거나 생리혈 배출을 소변이나 정액처럼 어느 정도 참고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남성들의 사례가 심심찮게 올라오면서 인터넷 게시판이 들썩이곤 하지요.
월경은 다음을 대비한 자궁내막의 리모델링
월경은 왜 일어나고 주기적으로 반복될까요? 일단 성적인 성숙기를 지나면 호르몬 자극으로 난소에서는 수십 개의 미성숙 난자가 동시에 반응해 자라다가, 단 1개의 난자만이 자신을 감싸던 주머니인 난포를 뚫고 난소 밖으로 배출됩니다. 이것이 배란입니다. 난소가 임신을 위해 선별된 난자를 배출하는 사이, 자궁은 난자가 수정될 때를 대비해 나름의 준비를 합니다. 대표적으로, 자궁내막이 두껍고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는 것이죠. 자궁의 안쪽 벽인 자궁내막은 월경 직후에는 4~5㎜에 불과하지만, 배란기 호르몬 자극을 받으면 점점 부풀어올라 평소 두께의 2~3배인 8~12㎜로 두꺼워집니다.
자궁내막이 두꺼워지는 것은 임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졌습니다. 난임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자궁내막 두께가 7㎜ 이하인 여성들의 임신율이 유의미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 임신의 시작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달라붙은 착상부터를 뜻합니다. 그런데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장소는 자궁이 아니라, 자궁과 난소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관인 나팔관 내부입니다. 나팔관 길이는 12㎝ 전후지만, 겨우 0.5㎜에 불과한데다 팔다리는커녕 정자에게 달린 꼬리도 없는 수정란이 꿀렁이며 내려오기에는 매우 긴 거리죠. 따라서 수정란이 자궁 내부까지 내려와 내막에 달라붙기까지 약 6일에서 10일의 기간(평균 7일)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수정란은 착상하기 전까지 원래 난자를 둘러싸고 있던 두꺼운 난막 내부에서만 세포분열을 하기 때문에 이때까지 전체 크기는 그대로입니다. 자궁내막에 다가와서야 수정란 내부에만 있던 배아는 난막을 뚫고 나와서(이를 새가 알에서 깨어 나오는 것과 같다 하여 ‘부화’라고 하지요) 자궁 내부에 달라붙어 비로소 엄마에게서 영양분과 산소를 받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자궁내막과 수정란 사이에 통신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호르몬 자극에 따라 배란이 되었다는 것만 아는 자궁내막은 일단 수정란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원래 과소 대응보다는 과대 반응이 혹시 있을지 모를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자궁내막은 수정란이 만들어졌든 그렇지 않았든 배란이 일어났다는 신호만 오면 부풀어올라 착상을 대비합니다. 하지만 배란이 되고 일정 기간이 지나도(10~16일, 평균 14일)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달라붙는 게 감지되지 않으면 여성호르몬 농도가 떨어지고 자궁내막은 이를 신호로 와르르 무너져내리며 자궁 경부를 거쳐 질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옵니다. 바로 월경이지요. 그건 수정란 형성 여부와는 상관없습니다. 수정란이 아무리 많이 만들어지더라도 착상하지 못하면, 여성의 몸은 월경을 겪고 다음 주기를 준비합니다. 실제 수정란의 성공적인 착상 확률은 오히려 3분의 1에 불과하다지요. 그러니 임신 시작은 수정이 아니라 착상부터인 거죠.
이 과정에서 월경이란 자궁이 다음에 내려올 수정란이 착상하기 수월하도록 자궁 내부를 청소하고 재건하는 일종의 리모델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월경이 시작하는 첫날부터 다음 월경이 시작하기 전날까지를 1회 월경주기로 잡습니다. 교과서에는 이를 평균해서 월경기 1주, 배란준비기 1주, 황체기(배란 이후 월경 시작 전까지) 2주로 하여, 여성의 월경주기를 4주로 그려내지요. 실제 조사 결과 여성의 평균 월경주기는 29.8일인데, 공교롭게도 이 날짜는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삭망월의 주기(29.5일)와 비슷해서 여성과 달을 연결짓는 전통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계나 달력이 흔치 않았던 근대 이전에는 주기적으로 변하는 달의 모양을 근거 삼아 월경주기를 셈했을 테고요.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같지 않은
사춘기를 지난 여성들은 대부분 월경을 하며, 평균 11.8살에 초경을 해 50.1살에 완경(完經)을 하기까지 장장 40년 정도 주기적으로 이를 반복합니다. 그렇기에 월경은 대부분의 성인 여성이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이라면 대부분 월경을 하지만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입 니다.
평균적으로 여성의 월경주기는 29.8일, 월경기는 5일, 월경량은 35㎖ 전후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여성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월경주기는 21~40일, 월경기는 2~7일, 월경량은 10~80㎖로 다양합니다. 월경주기가 21일보다 짧거나 40일보다 길거나, 월경기가 2주 이상 지속하거나, 월경량이 100㎖ 이상인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더욱 황당한 건, 이렇게 기준치에서 벗어나는 월경의 양상이 자궁이나 난소 이상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별다른 기능적 이상이 없는데도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납니다. 누구나 겪지만 모두 똑같지 않은 경험이기에, 누구나 겪어도 아무도 자신의 상태가 ‘생리적으로 괜찮은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별 이상이 없음에도 자신의 월경 양상이 기준치에서 벗어난다고 걱정하고, 때로는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원래 월경이란 다 그런 거지’ 하면서 흘려버리다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기도 합니다. 전자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후자는 자칫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월경에 대해 정확한 단어로, 자세하게 자신의 경험을, 좀더 세심하고 밀도 있게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여성의 경험과 상황이 정확한 데이터가 되어야 괜한 불안도, 안타까운 실수도, 웃지 못할 해프닝도 줄어들 테니 말이죠.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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