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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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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따뜻함은 어디서 올까

인류 진화사는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 인간은 뜨거워질 준비를 갖추고 태어나네
등록 2021-11-15 11:47 수정 2021-11-16 02:27
추워지면 온기가 그리워진다. 인간은 따뜻한 온기와 심리적 안정을 무의식적으로 연결한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2021년 11월10일 서울 종로구 북악산 산책로. 연합뉴스

추워지면 온기가 그리워진다. 인간은 따뜻한 온기와 심리적 안정을 무의식적으로 연결한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2021년 11월10일 서울 종로구 북악산 산책로. 연합뉴스

당신은 한 대학의 심리학과 건물에 들어섭니다. 심리실험 참가자 모집 공고를 보았거든요. 공고된 장소를 찾아가니, 조교는 정신없어 보입니다. 한 손으로는 각종 파일과 이런저런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든 채 당신을 맞이합니다. 조교는 당신을 복도로 데려가 실험실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들고 있던 서류 더미 속에서 기입해야 할 신청서를 찾아야 하니 잠시 뜨거운 잔을 들고 있겠냐고 합니다. 당신은 그 정도 친절이야 어렵지 않게 베풀 수 있는 예의 바른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서류가 많아 제대로 된 서류를 찾아 확인하는 데는 2분쯤 걸립니다. 이후는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추운 날 당신이 포장마차를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

심리실험은 간단했습니다. 특정 개인의 얼굴만을 보고 그의 성격을 추정해보는 것이니, 아마 첫인상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파악하는 실험인 듯합니다. 이렇게 뻔한 실험이라니요. 하지만 당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는 숨겨진 변수가 하나 있다는 것을요.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은 ‘온기와의 접촉’이 심리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지였습니다. 당신은 몰랐지만, 이 실험에 참여한 이 중 절반은 당신처럼 뜨거운 커피가 든 머그잔을 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얼음이 든 차가운 커피잔을 받아서 잠시 들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경험이 실제 판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뜻한 컵을 든 사람들은 차가운 컵을 든 사람들에 비해, 미지의 인물을 훨씬 더 ‘따뜻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2008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한 이 실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됐습니다. 커피 특유의 향이 문제가 아니었나 하여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뜨거운 차 vs 아이스티)로 바꾸기도 했고, 실내 온도를 따뜻하거나 서늘하게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반대의 실험도 했습니다. 상냥하게 혹은 고압적으로 테스트하거나, 사회적으로 환대받는 영상과 소외되는 영상을 보여준 뒤 뜨거운 음료와 차가운 음료 가운데 선택하라고 하면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테스트했거나 소외되는 영상을 본 참가자가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뜨거운 음료를 선택했습니다. 또한 이들에게 그들이 테스트했던 방의 온도를 물으면, 전자(상냥하게 테스트했거나 환대받는 영상을 본 참가자)는 후자(고압적인 분위기에서 테스트했거나 소외되는 영상을 본 참가자)보다 실내 온도가 더 높았다고 대답했지요. 이는 모두 물리적 온도와 심리적 온기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됐음을 방증하는 실험입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유난히 피곤하던 날의 퇴근길, 날마저 저물어 선뜻한 바람에 뼈마디가 시린 것 같아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하던 날, 걷고 싶어서 걷는 게 아니라 그저 집에 가야 한다는 귀소본능에 따라 좀비처럼 다리를 번갈아 움직일 뿐인 그런 날이면 유난히 노포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기운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만둣집의 즐비한 찜기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 호떡집의 넓적한 기름판에서 자글자글 튀는 기름 소리, 순댓국집의 커다란 솥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하고도 구수한 내음까지. 이런 날은 그냥 집에 갈 수 없어 가장 가까운 포장마차에 들어갑니다.

서비스로 준 종이컵에 담긴 어묵 국물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자,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몸이 조금 풀립니다. 떡볶이와 라면, 정크푸드라 부르는 것들이지만 따뜻함만큼은 보장된 음식입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매콤한 음식을 먹고 몸에 열기가 좀 돌자 지금껏 잿빛으로만 보이던 풍경이 색깔을 되찾고, 얼어붙었던 몸이 녹자 마음 역시 녹진해지며 하루를 다시 살아낼 힘이 조금은 생겨납니다.

아기의 몸은 언제든 열을 발산하도록 준비된 갈색지방을 품고 태어난다. 뜨거워질 준비를 하고 태어나는 셈이다. 어머니 품에 안긴 신생아의 모습. REUTERS

아기의 몸은 언제든 열을 발산하도록 준비된 갈색지방을 품고 태어난다. 뜨거워질 준비를 하고 태어나는 셈이다. 어머니 품에 안긴 신생아의 모습. REUTERS

36.5℃ 열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따뜻한 인간의 탄생>(머스트리드북)을 쓴 한스 이저맨 박사는 ‘사회적 체온 조절의 심리학’을 주장합니다. 그는 인류 진화사는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며, 우리 유전자는 물리적 온기와 심리적 따스함을 굳이 구분하지 않기에 서로 따뜻한 접촉을 통해 체온을 나누는 것은 심리적 안정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생물학적 의문 하나, 체온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사람은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경우, 36.5±1℃ 체온을 유지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더운 한여름의 기온을 일평생 유지하는, 꽤 화력이 오래가는 난로인 셈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몸은 체온 변화에 매우 취약해서, 체온이 38℃를 넘거나 34℃ 이하로 내려가면 고열과 저체온증으로 인해 신체에 이상이 발생하고, 이를 장기간 방치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체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정작 그 열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아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많은 학생이 심장에서 열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피가 나오는 곳이 심장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냉혈한(冷血漢)과 열혈한(熱血漢), 온혈(溫血)동물과 냉혈(冷血)동물,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 피가 끓어오르거나 차갑게 식는다 등 심장 혹은 피가 온도와 연관된 단어가 유난히 많습니다. 하지만 심장의 어디에서 열이 만들어지는지를 물으면 대부분 답이 막힙니다.

우리 몸의 체온은 심장이 아니라,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자체에 있습니다. 세포 내 에너지 생산 공장인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대사로 포도당을 분해해 세포 내 에너지원인 아데노신삼인산(ATP)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열이 생산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인간처럼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일정한 체온,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외부 온도(지구 평균 기온은 15℃ 내외입니다)보다 높은 체온을 일상적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항온동물의 미토콘드리아에는 UCP(Uncoupling Protein)라는 단백질이 존재합니다. UCP는 말 그대로 ‘짝을 이루지 못하는’(Uncoupling) 단백질이라는 뜻입니다.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단백질 대부분은 ATP를 생성하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회로에 연결됐는데, UCP는 그 회로와 분리돼 있습니다. UCP는 양분을 태워 ATP가 아닌 열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방조직에 많이 있습니다.

지방은 애초에 우리 몸의 남은 열량을 저장해두는 에너지 창고입니다. 연료가 없으면 불을 붙일 수 없듯이, 탈 것이 있어야 열도 나는 법입니다. 대개의 지방은 삼겹살 비계처럼 흰색을 띠지만(white fat), UCP가 많은 지방조직은 색이 짙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지방을 갈색지방(brown fat)이라고 합니다.

갈색지방, 아기 때 많다가 점점 없어져

갈색지방은 언제든 지방을 태워 열을 발산하도록 준비된 체온 조절용 예비 난로입니다. 그래서 항온동물은 갓 태어난 어린 개체일수록 갈색지방이 많습니다. 몸집이 작을수록 체구당 표면적의 비율이 커서 열발산이 크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인 셈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신생아는 체중의 약 5%를 차지할 정도로 갈색지방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성장하면서 점차 이것이 사라집니다. 예전에는 성인에게 갈색지방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인에게도 일부 갈색지방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특히 추위에 많이 노출될수록, 흰색지방이 점점 짙어져서 옅은 갈색이 된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갈색지방은 몸에 쌓이는 대신 타서 열이 되므로, 다이어트계에선 갈색지방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편이죠.

갈색지방을 잔뜩 품은 아기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뜨거워질 준비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혼자 힘만으로 열기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기의 몸은 작고 체온 조절 능력이 미숙하기에, 잠깐의 노출만으로도 몸이 쉽게 차가워집니다. 이때 보호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고 따스한 손길로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아기의 작은 몸은 쉬이 따뜻해집니다.

외부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면, 그만큼 내부의 에너지원을 덜 써도 됩니다. 자원 비축과 보장된 시간은 이 에너지를 다른 데 돌려쓸 수 있는 여유와 갓 맞닥뜨린 세상에 대한 믿음을 심어줍니다. 아직 세상에 미숙한 어린 뇌는 따뜻한 온기와 심리적 안정을 동시에 경험하고 이를 무의식 속에서 연결합니다. 물리적 따뜻함과 심리적 따뜻함이 동일시돼 저장되는 거죠. 그러니 우리 뇌는 따뜻한 머그잔을 통해서도 타인에 대한 긍정적 마음을 어렵지 않게 출력하는 것입니다.

열기를 만드는 몸, 온기를 나누는 마음

1950년대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원숭이 애착 실험을 통해, 갓 태어난 어린 개체에게 따스한 온기와 접촉은 생존을 좌지우지할 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렸습니다.(이 실험은 <사랑의 발견>(해리 할로 지음, 임지원 옮김, 사이언스북스)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열기를 만들 수 있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고, 온기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 창밖으로 올해의 첫눈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점점 추워지는 계절입니다. 온기를 나누는 일이 더 절실해지는 시간이지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그런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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