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오늘의 작문 숙제’ 제목이라고 했다.
“근데 진짜로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
‘오늘은 뭘 먹을 수 있을까’가 인생의 가장 큰 궁금증이자 고민인 12살짜리 녀석이 커서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과연 ‘평범한’ 생각인 걸까? 도대체 이 녀석은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이 어떤 건지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커서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다. 그 무렵, 우리 세대 소녀들이 한번쯤 푹 빠져 있었던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서 결심한 것이다. 전혜린은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평범해지지 말자.”
어머니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했다그러나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루기 힘든 꿈임을.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었으나 끝내 그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도.
특히 중국에서 1960~70년대 문화대혁명(문혁)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강제로 몰수당한 채 모두가 예외 없이 ‘황당하고 미친’ 시대를 견뎌내야 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죽어야만 했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사람들도 남겨진 상흔에 고통받으며 그 뒤로도 오랫동안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
문혁 시절, 모든 아이가 ‘커서 되고 싶은 사람’이 ‘마오 주석을 보위하는 계급 혁명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마오 주석의 혁명사상을 보위하는’ 홍위병이 되어 자신의 부모와 스승을 ‘계급의 적’으로 고발하거나 군중 속으로 끌어내 뺨을 때리고, 오물을 끼얹고, 머리를 깎았다.
문혁 중반기인 1970년, 장훙빙은 당시 16살이었다. 원래 이름은 장톄무였지만 1966년 문혁이 일어난 뒤 ‘마오 주석의 홍위병’으로 살겠다는 각오로 장훙빙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했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가족과 식사하던 중 장훙빙의 어머니는 “지도자는 개인숭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 주석은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는 등의 문혁 비판 발언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장훙빙과 그의 아버지는 곧바로 관계 당국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했고, “현행 반혁명 분자인 어머니를 타도하고 즉각 총살해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정말로 그의 어머니는 총살형을 당했다.
문혁이 끝나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장훙빙은 어른이 되었고 변호사라는 직업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문혁이 남긴 마음속 상흔은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했다. 2011년, 59살이 된 장훙빙은 고향 마을 지방정부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자기 어머니의 묘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소송이었다. 문화재로 지정해서 후세대에게 문혁의 비극을 기억하고 비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끝내 패소했다.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장훙빙은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통곡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렇게라도 해서 어머니에게 참회하고 싶었다.”
2013년 중국 언론에 보도된, 문혁 당시 어머니를 고발한 홍위병 장훙빙에 관한 이야기다.
문혁을 모르면 우리 세대 이해할 수 없어“몇 살이냐고? 1926년에 태어났으니까 올해 94살이야. 자식들도 다 늙어서 은퇴하고 각자 자기 손주들을 돌보는 중늙은이이지. 같이 늙으니까 누가 아비고 자식인지 모르겠어, 허허!
여기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내가 삼대째 이어 지키고 있어. 무수한 우여곡절이 있었지. 1956년 이후로는 문을 완전히 닫아야 했어. 온갖 정치운동의 광풍이 불면서 책방은 신화서점만 빼고 다 문을 닫았어. 지금 생각하면 참 이해가 안 되는 황당무계한 시대였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
94살인데 왜 이렇게 건강하냐고? 마음을 잘 다스려서 그래. 웬만해서는 절대로 화를 안 내. 문화대혁명이라고 들어봤어? 그걸 모르면 우리 세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문혁을 겪고 나서는 아무리 화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마음에 새겨두지 않아. 그 고통스러운 문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세상에 참지 못할 고통이 어디 있겠어?
류사오치라고 중국 국가주석까지 지냈던 위대한 사람도 문혁 때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 줄 알아? 그래도 난 살아남았으니 그 사람에 비하면 덜 불행한 셈이지. 무수한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래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살아남았으니 이렇게 좋은 세상도 구경하지.
자서전을 써보라고? 허허,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는 쌔고 쌨어. 무슨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안 돼. 그리고 그런 소리는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야!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져서 마오 주석 시절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 많은 운동이란 운동을 다 거치면서 내린 결론은, 죽을 때까지 입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언제 어느 때 또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거든.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94살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쑤저우에서 만난 올해 94살의 왕청보 할아버지는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문혁보다 더 참기 힘든 고통은 없다”고 했다. 왕 할아버지는 쑤저우 핑장루 역사문화거리 근처에 있는 뉴자샹이라는 한적한 골목길에서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산방’(文學山房)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서점의 역사는 무려 100년이 넘었다.
중국 청나라 광서제 때인 1899년, 왕청보 할어버지의 조부가 쑤저우의 한 골목길에 이 고서점 문을 열었고, 그 뒤를 왕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이었다. 창업자인 조부와 아버지의 노력으로 서점은 1930년대 중화민국 시기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중국 전역의 장서가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고서점으로 통했다. 왕청보 할아버지는 조부와 아버지를 따라서, 17살 무렵인 1942년 문학산방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리고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고서적 수집과 복원 작업 등 고서적 분야 지식을 배워 일찌감치 문학산방의 3대 계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면서 서점의 운명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1956년 전국적으로 공사합영 정책이 시행되면서 문학산방은 더 이상 왕씨 가문의 개인 서점이 아니었다. 왕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는 국영 신화서점의 고서적 분야를 관리하는 직원으로 일하다 75살에 퇴직했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퇴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 할아버지가 고서적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전문가이자 복원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1966년 문혁이 일어난 뒤, 왕청보 할아버지는 쑤베이 지역으로 하방(당원이나 공무원의 관료화를 막기 위해 이들을 일정 기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서 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것)돼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다가 문혁이 끝날 무렵 다시 쑤저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서 보니, 중화민국 시기 대총통이던 쉬스창이 직접 써준 ‘문학산방’ 간판은 홍위병에게 훼손돼 서점 창고 마룻바닥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문혁 시절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시절에는 나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랬어. 나는 비참한 축에도 들지 못하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는데! 문혁을 겪어보지 못한 당신 같은 외국인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야. 어떤 위대한 소설가라도 그런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해서 쓸 수는 없다고. 나는 운이 좋아 94살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떻게 또다시 그런 인생을 견뎌내겠어.”
왕 할아버지의 퇴직 뒤 문학산방은 다시 문을 열었다. 2000년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조상 대대로 이어지던 문학산방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왕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서점을 얼굴 눈썹에 비유했다. 얼굴에서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눈썹이 없거나 적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그 아름다움이 덜한 법이라며, 고서점 문학산방도 쑤저우에서는 바로 이 사소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두 눈썹 같은 존재라고.
‘평범하고 평화로운 세대’가 되길어린 아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너 정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냥 회사원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면 안 돼? 내가 무슨 시진핑 주석 같은 사람이라도 될 줄 알아? 나는 커서 회사원이 될 거야. 월급 받아서 귀여운 개와 고양이를 사서 같이 행복하게 살 거야. 엄마는 못 기르게 하니까!”
아들아, 엄마도 간절히 소망한다. 제발 너희는 홍위병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세대’가 되기를. 귀여운 개와 고양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돈 잘 버는 훌륭한 회사원이 되거라, 아들아!
글·사진 쑤저우(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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