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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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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인가 서점인가

쇼핑몰 안 멋진 신세계, 베이징 ‘랑데부 서점’
등록 2019-12-02 02:16 수정 2020-05-02 19:29
랑데부 서점 안에는 카페와 프랑스 식당, 와인바, 영국식 찻집, 수제 치즈 가게가 있다.

랑데부 서점 안에는 카페와 프랑스 식당, 와인바, 영국식 찻집, 수제 치즈 가게가 있다.

랑데부 서점 안에는 카페와 프랑스 식당, 와인바, 영국식 찻집, 수제 치즈 가게가 있다.

랑데부 서점 안에는 카페와 프랑스 식당, 와인바, 영국식 찻집, 수제 치즈 가게가 있다.

나는 ‘걷는 사람’이다. 어느 유명 배우의 에세이 제목을 도용한 듯해 미안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나는, 그가 걷기 전부터 훨씬 더 오랫동안 걸었다. 그러니 나도 ‘걷는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

어릴 때 학교에 가려면 걸어서 십리길을 가야 하는 시골에서 산 덕분에, 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두 발로 세상을 걷는 일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나이가 되도록’ 운전면허증이 없다. 온 세상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철도와 지하철이 있고 집 앞으로 버스가 밤낮으로 다니는데다,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인 공용 자전거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돈 들여 그런 애물단지를 사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내 두 다리가 자동차 바퀴보다 더 튼튼하고 실용적이라고 믿는 이유도 있다. 걸으면, 세상은 차창 밖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오래도록 각인되는 기억과 느낌이 되고 새로운 만남이 된다. 어느 유명한 학자가 ‘걷기는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고도 하지 않았나.

베이징에서도 근 17년째 매일 걷고 있다. 지난 17년간 걸으면서 목격한 베이징 거리의 가장 큰 변화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것들이다. 베이징으로 이주한 2002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본 풍경은 ‘소음과 먼지’로 가득한 공사 현장이다. 지금도 창문만 열면 집 주변으로 아파트와 학교, 쇼핑몰 공사가 쉴 새 없이 계속된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발’한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중국 특색의 개발주의’로 고쳐야 마땅하다.

‘배달의 민족’ 중국

‘낡은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예외 없이 아파트와 쇼핑몰이 들어섰다. 집 뒤로 큰 재래시장이 있던 자리는 주변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단지와 최신 쇼핑몰로 변했다. 거의 매일 아침 장바구니를 끌고 나가 오전 내내 재래시장 골목을 돌다가 허기지면 시장통 안 단골 쓰촨 음식점에서 ‘단단멘’(산초기름으로 만든 쓰촨식 매운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먹던 기억도 이제는 고물상에나 가야 할 낡은 추억이 되었다. 이른 아침, 시장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장바구니를 끌고 다정하게 산책하러 가던 아래층 노부부도 이제는 시장 대신 쇼핑몰과 대형마트에 간다.

나도 예전처럼 매일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갈 일이 없어졌다. 그때는 장 보기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야 했지만 지금은 맘만 먹으면 종일 나가지 않아도 된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이제 쇼핑과 장보기도 휴대전화로 한다. 스마트폰으로 알리바바 마윈이 만든 온·오프라인 대형마트 앱에 접속해서 장을 보면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30분 내로 총알 배송이 된다. 아직도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달의 민족’인 줄 알면 큰 착각이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누볐던 베이징 거리에 지금은 각 배달업체 총알맨들의 오토바이가 사방으로 질주한다. 예전에는 베이징 곳곳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던 삼륜차나 인력거 등으로 일하던 농민공(농촌에서 도시로 돈을 벌러 온 농민노동자)들이 지금은 대부분 오토바이 총알맨으로 변신했다.

우리 집에도 거의 날마다 총알맨이 문을 두드린다. 직접 장을 보고 싶을 때는, 집 앞에 있는 쇼핑몰에 가서 직원들의 친절한 인사를 넙죽넙죽 받으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쇼핑해’ 온다. 나오는 길에 이제는 거의 중국 인민 카페가 된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바로 코앞에 있는 집까지 느릿느릿 달팽이 걸음으로 걸어서 온다. 요리도 하기 싫은 날에는 마윈의 마트로 가 재료를 사서 가공비만 내고 입맛대로 조리해달라고 주문하는 즉석요리를 먹는다. 그것도 귀찮으면 스마트폰으로 손가락만 움직여서 음식을 배달시킨다. 이렇게만 살면 절대 걸을 일이 없고, 이웃집 노부부를 마주칠 기회도 없다.

‘시장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 장소는 쇼핑몰에 있는 카페나 식당가로 바뀌고, 재래시장 가던 길은 사라졌다. 베이징에서 사라진 것은 시장과 길뿐만이 아니다. 날마다 마주치던 이웃들과 길거리 사람들도 스마트폰 세상으로 사라지고, 번쩍이는 호화 쇼핑몰 안에서 어깨만 스치는 타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걸을 수밖에 없어서 걸었지만, 지금은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걷고 뛰어야 한다. 그것도 거리가 아니라 쇼핑몰 안 피트니스센터에서 말이다. 한마디로 17년 여 동안 베이징은 거대한 온·오프라인 쇼핑몰로 변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걷고 뛰며

그래도 나는 아직 미련하게 베이징을 두 발로 걷고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가끔 천안문(톈안먼)과 자금성(쯔진청)이 있는 베이징 중심부까지 무작정 걸어간다. 걸을 때마다 보고 느끼는 거지만, 베이징 거리는 주기적으로 정치 선전 구호가 바뀐다. 최근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어록으로 도배됐지만, 보통은 정치 이념이나 국가 정책을 구호로 홍보한다. 구호가 있는 베이징 거리의 모습은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풍경 중 하나다.

며칠 전에는 집에서 베이징 중앙 상업지구인 CBD(Central Business District)까지 걸어갔다. 창안제와 젠궈먼, 궈마오 등 베이징의 핵심 지역을 지나가는데, 빽빽한 빌딩숲과 고급 쇼핑몰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의 끝자락에 있는 화마오쇼핑센터와 베이징 SKP쇼핑몰은 내가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다. 두 쇼핑몰이 있는 자리도 예전에는 큰 재래시장이 있었다. 일부러 3시간여 걸어서 그곳을 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첫째는 먹기 위해서다. 배가 잔뜩 고파야 많이 먹기 때문에 아침부터 굶고 3시간여를 힘들게 걸어가서 걸신들린 듯이 먹는다.

화마오쇼핑센터 지하에는 유명한 맛집들이 몰려 있다. 중국 전역의 특색 있는 식당 프랜차이즈가 모두 모였다. 홍콩과 마카오, 대만의 유명 식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식당도 있다. 물론 다른 쇼핑몰에도 맛집이 많이 있지만, 나는 유독 그곳 음식을 사랑한다. 거기 가는 날에는 점심과 저녁을 다 그곳에서 ‘때려먹고’ 온다.

화마오쇼핑센터 지하 맛집에서 점심을 배 터지게 먹은 뒤, 바로 옆 SKP쇼핑몰 4층으로 직진한다. 거기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전혀 뜻밖의 서점이 그곳에 있다. 베이징의 다른 고급 쇼핑몰에도 서점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SKP쇼핑몰 4층 서점은 일반 서점과 다르다. 이름도 ‘약속 또는 만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랑데부’(Rendez-Vous)다.

랑데부 서점은 베이징이라는 거대한 쇼핑몰 안의 뜻밖의 명물이다.

랑데부 서점은 베이징이라는 거대한 쇼핑몰 안의 뜻밖의 명물이다.

폭식과 폭독을 맘껏

2017년 문을 연 이 서점은 SKP쇼핑몰에서 기획하고 경영하는 서점이다. 원래 이 서점이 있던 자리는 고급 시계를 팔던 곳이었고, 전체 쇼핑몰 내에서도 가장 위치가 좋은 황금 구역이라고 한다. 이런 금싸라기 위치에 굳이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서점을, 그것도 ‘직영’으로 차린 이유가 무엇일까? SKP쇼핑몰 부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명품 브랜드 업체가 입점을 희망했다. 그들을 입점시키면 많은 수입이 보장된다. 하지만 경영진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이 SKP에 갖는 인상은 고급 브랜드를 취급하는 쇼핑몰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고급이란 개념은 명품 가방이나 신발을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신생활 역시 고급 브랜드 요구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독특하고 품격 있는 서점은 바로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가장 좋은 선택이다. 서점이 막 문을 열었을 때 많은 사람이 비관적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요즘 책을 보는 사람은 없고, 있다 해도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읽는다고 했다. 하지만 서점이 문을 열고 몇 개월이 지난 뒤 이런 우려는 빗나갔다. 창가에 앉아서 책 한 권을 들고 커피나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읽어보라. 당신이 얻는 것은 책 속에 있는 문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독서 분위기다. 우리 서점 내 모든 것은 더 나은 독서 환경을 위해 서비스된다. 바로 이것이 오프라인 서점이 지닌 장점으로 인터넷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분위기다.”(2018년 4월18일치 석간신문 인터뷰 기사)

랑데부 서점에서는 책만 팔지 않는다. 요즘 중국 서점가의 대세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카페와 프랑스 식당, 와인바, 영국식 찻집, 수제치즈 가게가 있고 중간중간에 고급 문화상품을 파는 공간이 있다. 식사도 하고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매주 한 번 유명 건축 디자이너와 작가, 문화 창작자를 초대해 이야기도 듣는다. 입구 오른쪽에 서점 부설 작은 갤러리도 있다.

서점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서점인지 명품 브랜드관인지, 고급 프랑스 식당인지 잠시 헷갈린다. 하지만 메인은 서점이다. 식당과 와인바, 카페, 치즈 가게, 문화상품 판매 등은 모두 서점을 위해 존재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다. 책은 장식용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서점 안에 진열된 책들을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을 고르는 안목이 일반 서점보다 몇 배는 더 고급스럽고 전문적이다. 중국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외국 독립잡지와 예술 서적,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주를 이루는데 한권 한권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쇼핑몰 분위기에 맞게 적당히 장식용 지식책들로 채워진 서점이 아니다.

나는 랑데부 서점에 들어서면 마치 나만의 ‘보물섬’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숨겨진 맛집을 발견한 즐거움처럼, 세상의 모든 좋은 책을 발견하는 행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곳에서 나는 폭식과 ‘폭독’을 맘껏 즐기며 걷기로 지친 몸과 마음의 여독을 푹 풀다 온다.

거리와 시장은 쇼핑몰로

쇼핑몰 세상으로 변한 게 어디 베이징뿐이겠는가. 세계의 옛 거리와 시장이 많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고 그 자리에 휘황찬란한 소비의 전당인 쇼핑몰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영국의 도시디자인 학자인 케럴린 스틸은 도시의 이 변화를 “인간의 삶 옆에 놓여야 할 것들이 도시 밖으로 내몰려 우리는 빈 껍데기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거대한 쇼핑몰 세계에 살고 있고, 거리나 시장과 같은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는 ‘공공장소’는 죽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곳은 나의 ‘혀와 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천국이기 때문이다. 쇼핑몰 안에도 이렇게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멋진 신세계’가 있을 수 있다니! 내가 걸어서 발견한, 베이징의 뜻밖의 명물이다.

글·사진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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