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광개토왕비

19세기 제국주의 일본이 속았다…

광개토왕비에 숨은 5세기 고구려인의 진짜 속내
등록 2017-08-01 12:21 수정 2020-05-02 19:28
중국 지안(지린성)에 있는 광개토왕비. 연합뉴스

중국 지안(지린성)에 있는 광개토왕비. 연합뉴스

대한민국에서 정규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광개토왕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높이 6.4m, 무게 10t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비는 5세기 초반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역사의 상징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비롯해 부여, 왜를 포괄하는 당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대한 실마리를 담아낸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구려사를 대표하는 유물로 인식되는 광개토왕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고구려 멸망 뒤 1200여 년이 지난 1880년대, 즉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던 시기, 그것도 일본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됐다는 것이 바로 역사 왜곡 사례로 광개토왕비가 거론되는 ‘비극’의 출발점이다.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비극의 시작

중국 지안(지린성) 지역의 고구려 국내성 유적지. 광개토왕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장군총, 왼쪽 아래 태왕릉 둘 중 하나에 광개토왕이 묻힌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고분과 유물)>, 동북아역사재단, 14~15쪽(지도)

중국 지안(지린성) 지역의 고구려 국내성 유적지. 광개토왕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위에 보이는 장군총, 왼쪽 아래 태왕릉 둘 중 하나에 광개토왕이 묻힌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고분과 유물)>, 동북아역사재단, 14~15쪽(지도)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압록강 중류 지안(국내성, 현재 중국 지린성) 지역에 있던 광개토왕비의 존재는 사실상 잊혔다. 중국 왕조들은 변방인 압록강 중류 유역의 돌무덤 떼나 성(城) 유적에 특별히 관심 갖지 않았다. 국경 너머 이 지역을 간혹 왕래하던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고구려 유적을 과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의 유적으로만 여겼다. 광개토왕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의 서술에서도 그 인식이 보인다.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 건너 140리에 큰 들판이 있고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다. 민간에서 말하길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 한다. 성 북쪽 7리에 비(碑)가 있는데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石陵)이 둘 있다.”

‘대금황제성’은 고구려의 왕성 유적인 국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성 북쪽 7리의 비’가 광개토왕비, ‘돌로 만든 고분’은 현재 장군총과 또 다른 왕릉으로 비정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현지인(“민간에서 말하길”)들의 구술을 토대로 국내성을 비롯한 광개토왕비를 막연히 금나라 유적으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비의 존재가 정식으로 청나라 조정에 보고된 것은 1880년 무렵으로, 이 지역을 개간하던 농부에 의해서였다. 청나라 사람들 역시 광개토왕비의 서체에만 관심 가졌을 뿐, 그 내용은 연구하지 않았다. 비문 전체를 판독해 고구려 시기에 세워진 능비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것은 아쉽게도 근대 제국주의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1883년 당시 일본군 중위인 사코우 가게노부(酒勾景信)는 지안 지역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던 중 광개토왕비를 발견하고 그 탁본을 최초로 일본에 반입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에서 수년간 분석한 결과, 광개토왕비의 전체 판독문과 더불어 기초적 연구보고서 이 나왔다. 당시 비문 내용을 두고 일본 학계는 크게 술렁였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사코우 가게노부가 일본에 소개한 최초의 광개토왕비 탁본 중 ‘신묘년조’ 부분. ‘왜이신묘년래도해’ 여덟 자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했다. 반면 정인보는 중간에 주어로 고구려를 넣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넜다’는 해석을 내놨다.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광개토왕비원석탁본집성>, 동경대학출판부, 1988(탁본)

사코우 가게노부가 일본에 소개한 최초의 광개토왕비 탁본 중 ‘신묘년조’ 부분. ‘왜이신묘년래도해’ 여덟 자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했다. 반면 정인보는 중간에 주어로 고구려를 넣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넜다’는 해석을 내놨다.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광개토왕비원석탁본집성>, 동경대학출판부, 1988(탁본)

일본 쪽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실로 놀라운 기록이었다. 광개토왕비에 적힌 1775자 가운데 20자, 신묘년 관련 기술이란 뜻에서 ‘신묘년조’로 일컫는 이를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왜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해 신하 된 백성(신민)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두고 북방의 강자이던 고구려와 대립할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파악했다. 광개토왕비가 4세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즉 ‘임나일본부설’(제1172호 ‘임나일본부설 추종 학자 일본에도 없다’ )의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학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1930년대에 정인보를 필두로 일본의 연구를 반박하는 연구가 이뤄졌다. 정인보는 신묘년조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정인보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해석과 달리,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서 왜를 격파했다는 게 정인보의 해석이었다. ‘고구려 주어설’은 등에 보이는 4세기 당시 왜의 보잘것없는 실상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한문 해석의 관점에서 일본 학계의 해석이 좀더 인정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신묘년조 논쟁은 1970년대 들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일본에서 여러 장의 광개토왕비 탁본을 비교·연구하던 재일동포 학자 이진희는 탁본마다 같은 글자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그 원인이 비면에 발라진 석회 때문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1972년 10월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릉비를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들고나왔다. 이진희의 주장에 따르면, 탁본을 최초로 일본에 반입한 사코우 가게노부는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이었으며, 그는 광개토왕비의 이용 가치가 큰 것을 알고 탁본을 직접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 쪽에 ‘유리하도록’ 신묘년조 기사 등 25글자를 변조했다. 이후 참모본부가 사코우 탁본의 글자 변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라 다시 글자를 조작했으며, 결국 현재 일본에 남은 탁본들은 변조된 것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제시된 광개토왕비 해석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일본이 광개토왕비에 열광한 이유

이진희의 주장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광개토왕비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한 일본 역사 학계는 비문이 변조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하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했다. 이와 관련해 1981년 중국 학자 왕젠췬(王健群)은 지안에 머물며 장기간 현지 조사를 진행한 결과, 능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전문 탁본업자였음을 밝혀냈다. 이들이 탁본 작업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울퉁불퉁한 비면 일부에 석회를 발랐을 뿐, 글자 조작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제작한 탁본들이 차례로 확인돼 일본이 입수한 탁본들과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 결과 일본 쪽이 신묘년조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장수왕에게 필요했던 정치적 서사

재일동포 사학자 이성시의 <만들어진 고대>.

재일동포 사학자 이성시의 <만들어진 고대>.

그렇다면 이후 4세기 후반 당시 왜가 백제·가야·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광개토왕비의 기록, 즉 신묘년조의 상황은 학계의 정설로 인정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학계는 신묘년조 뒤에 숨은 고구려의 자국 중심 인식에 주목했다. 신묘년조가 고구려인의 주관적인 국제질서 인식을 반영한 ‘정치적 선전’ 성격이 있고, 전쟁 서술 과정이 반드시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신묘년조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자. 논란이 되는 신묘년조의 바로 앞 구절에는 이상한 기록이 적혀 있다.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것이다. 신라는 둘째 치고 백제가 고구려에 복속해 조공을 바쳐왔다는 언급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의 백제는 신묘년(391)에서 불과 20여 년 전인 370년대에도 고구려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지 않았던가!

학자들은 신묘년조 외에 비문 곳곳에 왜가 상당히 과대평가된 것으로 보이는 구문에 주목했다. 재일동포 사학자 이성시는 일본의 초기 신묘년조 해석을 그대로 인정하되, 고구려인들이 비문을 쓸 당시 이미 내용 자체를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실제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이 부친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한 훈적비로, 처럼 중립을 표방하는 사관(史官)으로 집필된 정사(正史) 기록이 아니다.

신묘년조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광개토왕비를 세울 당시 장수왕에게 필요했던 ‘정치적 서사’가 드러난다. 신묘년조 앞에서 “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기사는 고구려 중심의 상하관계를 제시했다. 그리고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외부 세력인 왜는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음으로써 고구려 중심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설정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훈 기록에서 광개토왕은 놀라운 활약 끝에 원래의 질서를 회복한다.

광개토왕의 업적이 극대화하는 서사 속에 왜가 약소한 상대로 그려져선 안 된다. 신문도 방송도 없던 당시, 고구려 조정은 기본적인 전쟁 사건들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 국제질서상(像)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문 내에 극적(劇的)으로 재구성해냈던 것이다. 일종의 ‘용병’으로 당시 백제군에 종속돼 활동했던 왜군이 비문 속에 ‘강력한’ 세력으로 과장된 사연은, 이토록 ‘정치적’이었다.

‘유리한’ 역사는 없다‘

4세기 왜가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19세기 말 일본 관변학자들의 광개토왕비 연구는 사실상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진출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순수한 고대사 연구로 보기 어렵다. 이성시는 (삼인)에서 신묘년조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논쟁이 순수하게 역사적 사실의 탐구였다기보다 ‘근대’ 일본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근대’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온 과정이었음을 지적했다. 현재 광개토왕비 연구는 근대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적 가치관을 역사에 투영해왔던 과거를 반성하는 가운데, 실제 비문을 쓴 고대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였고 이면에 감춰진 객관적 진실이 무엇인지 추적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이 연구를 통해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왜가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된 주장이었음은 양국 연구자들 사이에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사회 일각에서는 “어차피 고대사는 사료가 적고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이비 역사가들이다.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현재의 가치관이나 당장의 정치·외교적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분야가 아니다. 역사학계의 연구 현황을 엉터리로 왜곡하고 현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욕망’일 뿐, 결코 ‘진보적’ 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안정준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