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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역사 수난자들의 환대받지 못한 삶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
등록 2016-08-16 10:45 수정 2020-05-02 19:28

사는 곳과 속한 곳이 다른 사람을 ‘이방인’이라 부른다. 사는 곳은 있는데, 속한 곳이 딱히 없는 사람은 어떤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경계인’ 또는 ‘주변인’이다. 흔히 ‘재일동포’라 부르는 재일조선인이 그렇다. 일본 법무성이 펴낸 자료를 보면, 2013년 말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인 외국인(등록 외국인)은 모두 206만여 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적·조선적을 보유한 등록 외국인은 51만9천여 명에 이른다. 일본인과 자이니치 2세 사학자가 함께 쓴 (삼천리 펴냄)는 그들의 삶과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 드문 책이다.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 이래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정 기간 거주하게 된 사람.” 지은이들은 재일조선인을 이렇게 규정한다. 일본 내각통계국이 발행한 을 보면,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897년이다. 규슈의 탄광이 목적지였다.

1910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본격적으로 늘어난 재일조선인은 이른바 ‘3K노동’, 곧 ‘기쓰이(고되고)-기타나이(더럽고)-기켄(위험한)’ 일을 주로 했다. ‘피지배자’란 멸시와 ‘저항자’란 두려움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양가감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중일전쟁이 터지고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지자,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이 시작됐다. 1940년 100만 명이던 재일조선인이 1945년 8월 210만 명까지 늘어난 이유다. 해방 직후엔 몇 달 새 줄잡아 140만 명이 귀국길에 올랐다. 징용 등으로 끌려와 일본 거주 기간이 짧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미 점령군은 1946년 3월에야 조선인 귀환정책(계획송환)을 내놨다. 남조선 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귀환자가 지니고 갈 수 있는 돈(지참금)은 1천엔으로 제한됐다. 지은이들은 “오랜 세월 일본에 살면서 적지만 자산을 축적했던 이들에게 지참금 제한은 ‘족쇄’였다”고 썼다. 계획송환을 통한 귀환자는 약 8만3천 명에 그쳤다. 나머지 55만여 명은 일본에 남았다.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식민지 시절에도 주어졌던 참정권이 1945년 12월 정지됐다. 1947년 5월에는 ‘외국인 등록령’이 제정돼, 재일조선인을 강제퇴거까지 할 수 있는 외국인 관리 대상에 포함시켰다. 외국인이 된 재일조선인들은 공공기관에 취직할 수 없게 됐다. 사회복지 혜택에서도 배제됐다. 외국인등록증을 항상 지니고, 지문날인을 강요받았다.

1964년 일본과 국교 정상화 협상에 나선 한국 정부는 “어차피 일본인으로 동화될 운명”이라며, 노골적으로 재일조선인을 버렸다. 사는 곳은 일본이지만, 속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재일조선인에게 강요된 정체성이다. 일본 전문가인 옮긴이는 이렇게 위로한다.

“일본과 남북 어디에서도 환대받지도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고난 속에서 살아온 역사의 수난자! 그들은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의 주권국가 체제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돌파하며 새로운 동아시아 시대를 열어갈 주역이 될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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