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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대신 오늘의 밥과 술

더치페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 계산적 인간관계보단 내 곁의 사람에게 시간과 마음을
등록 2016-06-03 01:48 수정 2020-05-02 19:28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시간과 마음을 쏟아야 할 때가 있다. 어느 날 그런 결혼식에 가서 술과 밥만 실컷 먹고 돌아왔다. 연합뉴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시간과 마음을 쏟아야 할 때가 있다. 어느 날 그런 결혼식에 가서 술과 밥만 실컷 먹고 돌아왔다. 연합뉴스

밥을 팔다보면 각자가 먹은 밥값을 나눠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끼니란 누구에게나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상일 것이므로 끼니에 대한 값을 내는 방식으로 감정노동하지 말고 각자의 밥값은 나눠 내자는 합의에 따른 행위일 것이다. 밥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밥값을 어떻게 지급하든 상관없지만 계산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합리(合理)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면 합리(合利)적이라는 생각이다.

“김치 한 접시 500원!”

몇 년 전 얼결에 원어민 강사들의 연말 모임에 참석하게 된 날이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왔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모임 장소는 닭갈빗집이었다. 닭갈빗집 입구에는 모임을 주선한 호스트가 서 있었고 참가자들은 호스트에게 회비 2만원씩을 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닭갈빗집에 모인 사람은 20여 명이었다.

철판 위에 지글거리는 닭갈비를 앞에 두고 소주, 맥주, 폭탄주를 돌려가며 뭐라뭐라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30여 분 만에 조용해졌고 각자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속닥거리는 분위기로 전환됐다. 철판 위에 닭갈비는 30여 분 만에 모두 사라졌는데 누구도 닭갈비를 추가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다. 술은 남았고 안주는 없으니 아주머니를 불러 “김취 쫌 더 주쉐요”라는 말만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러던 차에 뒤늦게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미리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곤 역시나 호스트에게 회비 2만원을 내고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자리한 두 사람의 테이블에만 닭갈비가 지글거렸다. 닭갈비가 없는 테이블 여기저기선 김치 더 달라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 모임에 나를 데리고 간 친구에게 “이 집단적 찌질함은 뭐하는 시추에이션”이냐 물었더니 그들의 문화라고 대답했다. 얼핏 보면 모임에 참여한 어떤 사람에게도 부담 주고 싶지 않다는 긍정적이고 합리(合理)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 누구도 모두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합리(合利)적인 이기심의 끄트머리 즈음이었다. 김치를 퍼나르던 아주머니의 인상이 점점 찌푸려지더니 결국 “김치 한 접시에 500원! 파이브 헌드라드 원!!”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김치는 풀 뜯어다 흙 발라 담근 줄 아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한 횟수가 30여 회 남짓 될까. 그중 나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가 절반, 어쩔 수 없이 참석해 눈도장만 찍고 돌아온 경우가 절반 정도 되는 듯하다. 서른 살이 넘어서는 눈도장을 찍자고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는 없었으니 한 달에 들어가는 축의금이 얼마니 어쩌니 하는 말들은 이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축의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의 결혼식이라면 본인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 텐데 어쩌자고 와글와글 복작거리는 결혼식장에 찾아가 주머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탈탈 털리고 돌아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결혼식이라면 찾아가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눈도장을 찍어야만 하는 경우라면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주말에 할 일 없이 집에서 뒹굴고 있는데 선배에게서 점심이나 먹자는 연락이 와 따라간 곳은 결혼식장이었다. 선배의 부인은 학교 선생인데 교장의 자녀 결혼식에 축의금을 보내지 않으면 암묵적 페널티를 받게 된다며 선배에게 봉투를 들려주고 대신 다녀오라 일렀던 모양이다. 봉투 안에는 2만원이 들어 있었다.

도미 뱃살부터 시작했다

오늘날 축의금 2만원은 중대한 도전 행위이다. 형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축의금 2만원을 넣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축의금을 전하지 않았을 때 닥쳐올 페널티에 대한 페널티이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교장 자녀의 결혼식은 축하할 마음이 2만원어치밖에 없다는 자해극 정도로 해석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해서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형수의 결단에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2만원이 든 축의금 봉투를 카운터에 들이밀자 식권 한 장을 줬다. 곧바로 식권 한 장을 더 달라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식권 한 장을 더 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교장이 누군지 모르고 그 자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식장에 고개를 들이밀 필요도 없었다. 곧장 연회장으로 올라갔다. 시간은 오전 11시30분. 아직 하객이 찾아올 시간이 아니어선지 연회장은 한가로웠다.

우리는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뷔페 음식이 있는 진열대로 향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산해진미가 차고 넘쳤다. 미터급 도미찜이 온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오향장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아주 느긋하게 오늘의 파티를 즐기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도미 뱃살에 채소를 곁들인 것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경사스러운 날 술이 빠질 리 없다. 일단 맥주 3병으로 목을 축이고 본격적으로 자해대역극을 펼치기 시작했다.

결혼하기 좋은 5월이었으므로 그날 결혼식장엔 하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누구의 가족이고 누구의 친지고 누구의 친구이며 누구의 어버이인지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빨리 밥 먹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태반인 듯했다.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다 먹은 그릇과 술병을 치우는 직원뿐이었다.

우리는 모든 하객이 빠져나가고 직원들이 진열되어 있던 음식을 치울 무렵 거나하게 취해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태양은 서쪽 묘지 아래로 붉게 가라앉았다. 한낮 찌는 더위는 시원한 연회장에서 먹고 마시고 사람 구경하느라 느낄 수 없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 무슨 노랜지 기억나지 않지만 따위의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본다.

오늘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에게

앞으로도 소중한 몇 사람의 결혼식 외에는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결혼식에 전해줄 돈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다. 대신 그 돈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맛있는 밥과 술을 사 먹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는 보험을 들지 않는다. 보험을 갖고 있지 않은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 행복하기도 부족한데 앞으로 닥칠 불행을 대비할 만큼 여유롭진 못하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을 위하기보다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 동료, 연인,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것이 합리(合理)이자 합리(合利)일 것이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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