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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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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단무지

불이간척지 이주민과 함께 건너온 단무지… 싫었던 쿰쿰한 냄새가 어느새 특별한 맛이 되었네
등록 2016-04-09 07:39 수정 2020-05-02 19:28
어머니가 맛이나 보라며 주신 단무지 속에는 익숙한 맛이지만 우리가 잊어버린 역사가 들어 있다. 전호용

어머니가 맛이나 보라며 주신 단무지 속에는 익숙한 맛이지만 우리가 잊어버린 역사가 들어 있다. 전호용

1920년.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운영하는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는 옥구군 일대 간석지 2479만3388m²의 둘레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자면 군산시 소룡동에 위치한 월명산 끝자락에서부터 옥서면 옥봉리 내성산을 돌아 옥서면 선연리 하제(난산)를 연결하고, 하제에서부터 영병산 끝자락에 위치한 어은리까지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땅을 ‘불이간척지’라 한다.

간척지 조성 사업을 위해 3천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대부분 일본인에게 땅을 빼앗긴 조선인 농민과 소작농이었다.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인부들에게 간척사업이 끝난 후 간척농지에 대한 영구 소작권 보장과 소작료 3년 면제, 간척공사 임금 지급을 약속했지만, 완공 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일본 현지인들이 대거 이주해와 간척지를 불하받고 ‘불이농촌’을 형성했다. 간척지 공사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은 이주민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자 원봉연 참조)

‘다쿠앙’이 군산에 오기까지

얼마 전 어미는 맛이나 보라며 단무지 몇 개를 내주었다. 지난겨울 김장하고 남은 못난 무를 버리기 아까워 단무지로 담갔는데 그럭저럭 맛이 들어 먹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단무지가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열었더니 쿰쿰한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그 단무지가 분명했다.

1938년. 불이간척지 조성 사업이 성공하자 불이간척지의 끝점인 어은리 영병산에서부터 회현면 월연리에 위치한 월하산까지 또다시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다. 이 사업에도 수천 명의 조선인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대가는 군역 면제였다. 불이간척지를 조성할 때처럼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골적인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전쟁터에 나가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돌을 지어 나르라는 것이었다.

이 사업에 많은 수의 친가와 외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작은할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간척사업에 동원돼 제방을 쌓고 군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1943년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끌려가 버마(미얀마)까지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작은할아버지는 본인이 쌓은 간척지 끄트머리에 터를 잡고 살아가다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 간척지는 염전으로 활용되었는데 해방 이후에도 제방을 쌓아올린 본인에게는 땅뙈기 한 뼘 돌아온 것 없었다. 그저 젊어서는 염전에서 염부로 품을 팔아 먹고살았고 나이 들어서는 염부들 상대로 막걸리 팔아 먹고살았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단무지는 초절임무다. 식초, 설탕, 소금을 넣고 끓인 뜨거운 물을 무에 부어 절인 것인데 피클을 만드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어미가 내준 단무지는 초절임무와는 다른 것이다. ‘다쿠앙’ 혹은 ‘벳타라즈케’라 불리는 일본식 장아찌의 일종이다.

쌀겨(미강)에 술지게미(주박)와 소금, 설탕(또는 사카린), 치자(또는 색소)를 넣고 버무린 것을 꾸덕꾸덕하게 말린 무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아 단단히 다지고 무거운 돌을 올려 두세 달 숙성시키면 무에서 나온 물과 함께 발효가 되면서 만들어진다. 누룩이나 술지게미가 없다 하더라도 쌀겨만으로 단무지를 만들 수 있는데, 술지게미나 누룩은 쌀겨의 발효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만 촉진제가 없다 하더라도 쌀겨는 무에서 나온 수분을 이용해 스스로 발효가 되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술지게미나 누룩을 넣지 않아도 쿰쿰한 술맛이 느껴지는 단무지를 만들 수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간척지와 간척지 주변에 촌락을 형성하고 살아갔다. 원주민들의 음식 중 입에 맞는 것은 조리법을 배워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고향에서 가져온 씨앗을 뿌려 장무(가늘고 기다란 무로, 단무지를 만들기에 적당하다)를 길러내고 그것으로 벳타라즈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조선에서 흔했던 개구리참외를 이용해 벳타라즈케를 만들기도 했고 그것을 조선인들과 나눠먹기도 했을 것이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몰라도

어릴 적 살던 집 뒤 광에는 단무지가 가득 담긴 커다란 대야가 1년 내내 놓여 있었는데, 대야에서 올라오는 쿰쿰한 냄새가 너무 지독해 단무지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말하자면 쌀겨와 무가 뒤섞여 썩어가는 두엄자리 냄새가 풀풀 올라오는 대야에서 꺼낸 단무지를 밥상 위에 올렸으니 어린 것 눈에 썩은 것으로 보였을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는 사시사철 단무지를 꺼내들어 밥상 위에 올리고 도시락 밑반찬으로 넣어 학교에 보냈다. 어미에게 이런 방식으로 단무지를 담그는 방법은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물었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저 “외할머니 허는 것을 보고 따라헌 것”이지 누군가 정식으로 가르쳐주고 말고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아마도 외할머니는 처음 누구에게 배웠는지 기억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사람이기에 그 기원을 알 길은 없게 되었다.

사실 벳타라즈케나 나라즈케는 군산에서 여전히 흔한 음식이지만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군산시 관광상품이 되어 시장에선 흔히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음식이 되고 만 것이다.

어은리 영병산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땅이 바다였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 너른 불이간척지 너머 또 다른 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새만금이다. 100여 년 전 쌓아올린 바다와 간척지의 경계는 희미해져간다. 들인지 바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허허벌판 위에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개미처럼 분주하기만 하다.

단무지에 묻어 있는 쌀겨를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 찬물에 담가 하루 동안 우려냈다. 짠맛이 빠지고 쿰쿰한 냄새도 적당히 가신 단무지의 풍미가 근사하다. 몇 개는 썰어 고춧가루와 들기름을 둘러 무쳐먹고 몇 개는 양념하지 않고 그대로 먹었다. 어릴 땐 그리도 싫었던 이 맛과 향이 이제 와 왜 이리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미가 죽고 나면 이 맛이 그리워 내가 사는 집 뒤 광에도 쌀겨와 무가 삭는 냄새가 1년 내내 피어오를 것만 같다.

불이흥업 망령은 그러거나 말거나

동구 밖에 서면 간척지에 만들어진 염전이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이제는 시야를 가리는 높은 펜스가 그 넓디넓은 염전을 모두 둘러쳐 보이지 않는다. 그 안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덤프트럭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부연 회갈색 먼지만 풀풀 일으켜 쌓는다. 1938년 만들어진 간척지는 1998년까지 염전이었다가 2018년이 되면 자동차경기장으로 변한다. 한때 F1그랑프리 경기장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그 회사는 망해 없어지더니 이번에 또 누가 불이흥업주식회사의 망령을 되살려낸 모양이다.

제방을 쌓은 사람들은 죽은 지 오래고, 염전에서 염부로 살았던 사람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염부의 자식들은 초로에 접어든 늙은이이거나 결코 이 땅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는 도시인이 되었다. 마을에 몇 남지 않은 늙은이들은 회관에 모여 두런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쫄깃한 단무지 한 조각이 입안에서 와드득 씹힌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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