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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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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에 행복을 찍고

[첫 회] 초창기 내비게이션처럼, 당신의 연애 상대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실망을 가져다주리니
등록 2015-05-21 14:49 수정 2020-05-03 04:28

연애는 초창기 내비게이션과 닮은 구석이 있다. 내비게이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어설픈 모습을 기억하는가? 물론 서로 다른 인생의 항로를 가는 사람들끼리 각자의 이해와 기대를 절충해가는 과정이 무릇 그처럼 좌충우돌에 결함투성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굳이 연애를 든 이유는 뭔가 좀더 격렬하고 압축적이며 보고 있노라면 절로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연인들도 있다. 이들에게도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 만약 인간관계가 축구경기라면 연애는 그중에서도 연장 전·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사(前史)는 있지만, 후사(後事)는 없다. 그럼 승부차기는 뭐라고 빗대어야 할지 애매하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핸들을 꺾어 내비게이션 얘기로 돌아가자. 초창기 모델을 써본 사람은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이 공사 중이거나 없어졌거나 해서 먼 길을 돌아갔어야 했던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을 것이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그때그때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하지 못한 탓이다. 내 선배 중 하나는 더 극적인 체험을 했다. 서울에서 인천공항을 목적지로 놓고 한참을 갔는데 막다른 길에 이르고 말았다. 황당해서 화면을 들여다보니 경로 표시 선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내비게이션 제작자가 바이런에 심취했던 것일까? 단말기를 물어뜯어서 짱돌로 묶어 심해 깊숙이 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선배는 차를 돌렸다 한다.

이보다는 무난하지만, 그래서 더 연애 일반에 시사하는 바가 큰 에피소드도 있다. 마쓰모토 히토시(일본의 인기 코미디언)는 어느 날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준 대로 가다보니 목적지가 고가도로 한가운데더란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근처 다른 곳에서 다시 원하는 지점을 찍고 가보았으나 똑같은 곳, 즉 공중 5m 자동차 전용도로 한복판이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마쓰모토가 가고 싶었던 곳은 고가 바로 밑의 동일 좌표 지점이었다. 그는 세상에 이런 바보 같은 기계가 어디 있느냐고 격분했지만 사실 내비게이션은 주어진 세팅 안에서 오류나 고장 없이 묵묵히 최적의 결과를 도출했다. 다만 그 결과가 사용자의 기대와 달랐을 뿐.

당신의 연애 상대도 마찬가지로 분명히 다양한 종류의 실망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녀)는 애인의 근황을 제때 업데이트하지 않는 바람에 당신이 1년 중 가장 바쁜 날 시답잖은 문자메시지를 보내곤 답이 없다고 삐칠 것이다. ‘인천공항? 바다를 건너가면 되잖아?’ 같은 반응으로 당신의 넋을 다운시킬 것이다. 지금껏 받아본 최악의 생일선물을 주고서 혼자 감동에 도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황하고 실망하며 좌절할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성질 같아선 확 꺼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두는 편이 좋다. 처음 녀석을 손에 쥐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100m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두꺼운 지도책을 펼쳐 ‘행복’이라는 목적지까지 인터체인지가 몇 개 남았는지 손으로 세어보던 시절이 끝났을 때, 내비게이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신통방통하고 벅찼었는지를 말이다.

뭐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지금 생각해보니 축구가 연애라면 승부차기는 결혼 준비쯤에 해당할 것 같다.

정바비 송라이터·에세이스트정바비씨는 밴드 ‘가을방학’ ‘줄리아 하트’로 활동 중이며, 에세이집 를 썼습니다. 최근 관심사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서울 사투리라고 합니다. ‘정바비의 음양의 음영’은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양상의 그림자를 포착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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