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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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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서 있는 모든 것을 추모함

아현고가도로의 생애를 통해 본 현대성의 조건
누구도 탈주할 수 없는 건설과 파괴의 연쇄 고리
등록 2014-02-28 08:04 수정 2020-05-02 19:27

“청계천에 기둥 세 개만 남아 있으리라/ 남대문은 벽돌 조각으로 덮여 있으리라/ 남산 송신탑은 길게 가로누워 있으리라”(황지우, ‘오늘도 무사히’)

시인의 예언대로였다. 교각 3개만 남긴 채 청계고가는 사라졌다. 철거가 완료된 게 2003년이니, 시가 발표되고 꼭 20년이 지난 뒤였다. 교각 존치를 결정한 이가 황지우의 시에서 영감을 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관리 기관 홈페이지는 개발시대를 기념하는 역사적 상징물로 남겨둔 것이라 설명할 뿐이다.

효수된 영웅을 상기시키는 청계천 교각들

교각이 있는 곳은 청계8가 무학교와 고산자교 사이다. 3개의 기둥은 인위적 훼손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류 쪽으로 내려갈수록 파괴 규모가 크다. 깨진 단면으로 부식된 철근이 삐져나오고 육중한 몸체는 녹과 때로 얼룩졌다. ‘시간의 파괴성’이나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면 그 형식이 진부하다. 포즈의 기괴함과 쓸쓸함에서, 교각들은 어딘가 대로변에 효수된 패배한 영웅들을 닮아 있다.

존치 의도가 무엇이든, 이 오브제가 수행하는 기능만은 명확해 보인다. 한때 누군가의 업적을 상기시키던 이 기념물은 새로운 승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초라한 인용물로 전락했다. 4천년 전 파라오의 승리를 기념하던 오벨리스크가 제국주의 프랑스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발터 베냐민은 가까운 과거에 만들어진 승리의 기념물이 패배의 기념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고가도로의 대명사처럼 인식됐던 청계고가지만, 최초의 고가도로는 따로 있었다. 서울 아현동에서 서소문을 잇는 아현고가다. 청계고가보다 6개월 늦은 1968년 2월3일에 착공했지만 7개월15일 만에 공사를 마쳤다. 말 그대로 ‘속성’ 공사였다. 당시 신문기사는 길이 942m, 폭 16m의 이 공중 구조물을 짓는 데 철근 1200t과 시멘트 4만 부대가 투입됐다고 전한다.

이곳에 처음 고가도로가 계획된 것은 식민지 시대인 1930년대 말이었다. 1938년 2월18일치 는 ‘서소문정·아현정간 고가도로 신설’이라는 기사에서 “경성부 토목과에서는 이백만원의 예산으로 서소문정 입구에서 아현정에 빠지는 간선도로 일천오백 메돌(m) 공사를 착수할 계획을 세우고 작년부터 용지 매수에 착수하여 이미 그 매수를 마쳤다”고 기록한다. 당시로선 생소했을 이 공중 구조물을 설명하기 위해 기사는 “전차·포도·열차 등을 눈앞에 내려다볼 수 있는 초현대적 고가도로”라고 썼다. 그러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루 뒤에 나온 같은 신문의 칼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보슬비 한 줄기에도 진흙 바다로 변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격에 맞지 않는 고가도로로 갓 쓰고 자동차 탄 기형 도시를 만들 셈인가.”

경성부의 고가 신설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전시(戰時) 경제 전환에 따른 예산 부족 탓이었다. 식민권력의 기획은 30년 뒤 일본 육사를 나온 군인 출신 통치자에 의해 현실화됐다. 1966년 박정희는 소심한 행정가였던 윤치영 대신 육군 준장 출신의 부산시장 김현옥을 서울시장에 앉혔다. 박정희는 당시 도시계획 수립에만 열중할 뿐 주민 반발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윤치영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1966년 3월 박정희가 “현실성 없는 도시계획만 세워놓고 실적이 없다”며 윤치영을 질책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이즈음 박정희의 눈에 띈 인물이 김현옥이었다.

김현옥, 박정희의 오스만

육사를 졸업한 뒤 육군 수송학교장과 제1야전군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김현옥은 5·16 직후 부산시 A지구 행정관을 거쳐 1962년 12월 초대 부산직할시장에 임명됐다. 부산시장 재임 시절 김현옥은 역전 부두지구 구획정리사업을 비롯해 곳곳에 도로를 뚫고 확장하는 역사를 벌여 박정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66년 3월 초 부산을 방문한 박정희가 서울시장 윤치영을 부산으로 불러 김현옥이 이룩한 성과를 보고 배우라고 했을 정도다. 윤치영이 경질된 것은 이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3월28일이었다.

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행정의 우선순위를 건설에 두었다. 1966년 시 예산의 10%에 불과하던 건설 예산을 50%로 확대했고, 이듬해에는 그 비율을 75%까지 높였다. 이런 김현옥의 방침은 박정희를 만족시켰다. 1967년 재선을 노리는 박정희에게 수도 서울의 변화된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내건 ‘근대화’의 성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현옥의 눈이 고가도로에 꽂힌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지 위로 떠올라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고가도로야말로 20세기 인류가 꿈꿔온 미래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가 1910년대에 스케치한 미래도시의 모습은 고층 건물과 기차역, 발전소, 입체도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거대 기계에 가까웠다. 미래주의자들이 관심을 둔 것은 수송 체계의 역동성이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의 스케치에서는 다층의 교통로와 외부로 노출된 엘리베이터, 도로와 사무·생활 공간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가 강조됐다.

미래파가 상상했던 입체도시의 이념은 르코르뷔지에의 ‘300만 인구를 위한 현대도시 계획안’(1922년)과 파리 재건을 위한 ‘부아쟁 계획안’(1925년) 등을 거쳐 대공황 이후의 미국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일본의 대도시들에서 일부가 현실화됐다. 고층화와 입체화, 이동의 가속화를 핵심 원리로 삼은 이 도시들은 철근과 콘크리트라는 신재료와 한층 정밀해진 구조역학,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결합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도시의 주요 거점을 잇는 입체의 가로망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혈관들에 다름 아니었다.

시장 취임 첫해인 1966년 11월 김현옥은 한 달간 해외 도시 시찰에 나선다. 박정희의 권유였다. 당시 김현옥은 미국 뉴욕과 레스턴의 질서정연한 도시계획과 빌딩숲과 조화를 이룬 샌프란시스코의 사통팔달 도로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그가 일본 도쿄 방문 때 하네다 공항에서 시가지로 이어지는 고가도로에서 청계고가에 대한 착상을 얻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정지는 죽음… 그것이 보편 법칙”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 계획이 처음 발표된 것은 김현옥이 해외 시찰에서 돌아온 지 보름도 지나지 않은 그해 12월30일이었다. 아현고가는 성동구 용두동에서 청계천까지 이어진 청계고가가 시청 앞과 서소문을 거쳐 신촌으로 이어지는 서쪽 구간에 속해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김포공항이었다. 고가도로가 만들어짐으로써 공항에서 양화대교, 신촌로터리를 거쳐 아현 고개에 이른 차량이 아현동 로터리의 정체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도심을 지나 동쪽 끝의 워커힐까지 신속히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루트는 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국빈과 외국인들의 주 통행로이기도 했다.

1968년 가을 아현고가 구간이 1차로 완공되자 신문들은 상공에 헬기를 띄워 사진을 찍고 ‘내일을 딛는 거보(巨步)’ ‘서울의 지붕 위로 뻗은 탄탄대로’ 따위의 제목을 뽑아 지면에 내보냈다. 관광엽서와 외국인용 홍보 책자에는 고가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 궤적을 장시간 노출로 담아낸 야경 화보가 단골로 실렸다. 개발과 성장이 정치적 정당성의 중요한 원천이 되면서, 도시 경관 자체가 국민적 동의를 조직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 결과였다. 통치자들은 도심의 마천루와 넓은 광장, 사방으로 뚫린 도로망에 집착했다. 특히 고가도로는 입체성과 단순명료한 기계미학 덕분에 발전과 효율, 성장을 과시하는 매체가 되기에 적합했다. 청계고가와 아현고가는 단순히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아니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변방 국가의 눈부신 성장 기적을 과시하는 최적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체의 도로망은 그 자체로 정치적 기능을 갖는 물리적 구조물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의 말처럼 현대사회에서 “정지는 죽음이며, 그것은 전세계의 보편 법칙”()이 됐기 때문이다. ‘드로몰로지’(Dromology·질주학)라는 독창적 이론체계에 근거해 인류사의 진화를 설명하는 비릴리오는 현대의 특징을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지배하는 것’에서 찾는다. 도시 재개발의 원조로 지목되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역시 이런 정치적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실제 19세기 유럽의 대도시에서 국가권력의 행사에 가장 위협이 되는 요소는 비좁고 복잡한 미로형 가로망이었다. 미로들은 언제든 ‘난동자’들의 해방구로 전환될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영화 의 장례식 장면에서 드러나듯, 대부분의 봉기는 가구와 잡동사니를 끌어모아 바리케이드를 쌓는 일에서 시작됐다. 통치자들로선 바리케이드가 견고하게 구축되기 전에 저항을 분쇄시켜야 했다. 파리 대개조를 통해 마련된 방사형 광폭 도로망은 소요 발생시 무장 병력과 대포를 신속히 이동시킴으로써 봉기를 무력화했다.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비된 도로망은 머잖아 자본을 위한 이윤 기계로 전환됐다. 산업화와 함께 인구의 도시 집중이 가속화하자 도심 외곽의 노동자들을 작업장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교통수단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확장되고 입체화된 도로망은 노동력의 안정적 이동을 보장했고, 물류의 유통 속도를 가속화함으로써 자본의 축적과 순환을 촉진했다. 나아가 그것은 과잉 축적으로 발생한 잉여자본이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그 폭발력을 적절히 소진할 수 있는 체제의 안전판이기도 했다.

자본, 도시경관의 창조적 파괴자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갈 수 없었다. 현대성이 표방하는 새로운 세계는 지나간 낡은 것을 깨뜨리지 않고선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본의 축적과 순환을 촉진하고, 통치의 안정과 국민적 동의의 확보 수단으로 기능했던 이 입체 구조물 역시 5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자신을 만들어낸 체제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파괴될 운명을 맞았다. 과잉 축적의 위기가 항존하는 한 잉여자본을 해소할 대상은 주어진 물리적 공간의 경계 안에서 부단히 물색돼야 하는 탓이다. 도시라는 공간과 그 내부의 숱한 구조물이 건설과 파괴의 주기적 순환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2월9일 해체 작업에 돌입한 아현고가는 ‘최초’라는 위상학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자취 한 줌 남길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 목 잘린 영웅이 감내해야 할 능욕은 피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까. 오래잖아 같은 운명을 맞게 될, 모든 잠재적 패자들을 애도하며 시인은 썼다.

“모든 잠시 있는 것들을 나는/ 추모한다 유행가와 슬로건과 아취를/ 광화문과 시청과 미 대사관과 해태와/ 어제 개관한 교보 빌딩과/ ………………/ 이 묵음 부호 속에 들어갈 말 못할 더 많은 것들을”(황지우, 앞의 시)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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