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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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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갔어도 기념비는 남았다

두 개의 고속버스터미널이 그려내던 잔혹 풍경화… 옛 호남선 터미널 옆 선술집서 독주 들이켜던 사내들은 어디로 갔나
등록 2013-11-07 08:47 수정 2020-05-02 19:27
서울 신반포로에서 바라본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 뒤쪽으로 옛 호남선 터미널을 헐어낸 자리에 들어선 센트럴시티가 보인다. 1981년 완공 당시 이 건물은 한 변방국가의 압축성장을 과시하는 거대한 기념비였다. 정용일

서울 신반포로에서 바라본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 뒤쪽으로 옛 호남선 터미널을 헐어낸 자리에 들어선 센트럴시티가 보인다. 1981년 완공 당시 이 건물은 한 변방국가의 압축성장을 과시하는 거대한 기념비였다. 정용일

푸른 비닐 차양 아래는 길게 나래비 선 하차객들로 북적거렸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감 탓인지, 다시 시작될 고단한 일상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양복과 양장을 갖춰 입은 필사적 노력도 안면에 팬 골 깊은 타향살이의 그늘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끔 초등학교 교사처럼 차려입은 중년신사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그들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정작 절실한 건 ‘현세의 집 한 칸’이지 ‘피안의 에덴동산’이 아님을 창신·봉천·가리봉 따위로 요약되는 그들의 행선지가 증언하고 있었다. 묵직한 보따리가 걸린 검고 투박한 두 손은 거친 노동이 새겨놓은 ‘계급의 낙인’이었다.

동서 차별의 정치적 풍경화

터미널의 서쪽 골목길엔 군산이나 해남, 영암 같은 지방도시 이름들로 옥호를 내건 선술집이 즐비했다. 술집 안은 차표를 끊고 서둘러 독한 술을 들이켜는 사내들로 떠들썩했으나, 억누른 변의를 해소하듯 술기운을 빌려 거칠게 내뱉는 남도 방언 사이사이엔 저릿하고 무거운 시대의 회한이 녹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옛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평슬래브 건물이었다. 1978년 3월에 지어진 이 무미건조한 건조물의 탄생에는 서울시의 졸속 행정이 한몫을 담당했다. 애초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의 5만 평 부지 가운데 3만 평은 고속터미널로, 2만 평은 시외버스터미널로 사용한다는 게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한곳에 집결시키자 극심한 교통혼잡이 빚어졌고, 서울시는 서둘러 시외버스터미널을 서초동(지금의 남부터미널)으로 옮기는 비상조치를 단행한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사용하던 2만 평 부지를 인수한 것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신흥재벌 율산을 창업한 신선호였다. 1970년대 중반 중동에 시멘트를 수출하며 급성장한 율산은 이 자리에 350억원을 들여 20층 규모의 터미널 복합 건물을 세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1978년 급속하게 악화된 자금난으로 대합실과 정비고만 갖춰 졸속으로 지어올린 게 옛 호남선 터미널이었다.

1981년 뉴욕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을 모방한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되자 누추한 호남선 터미널은 동서 차별을 상징하는 정치적 풍경화로 자리잡았다. 280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돼 3년 만에 완공된 경부선 터미널은 일단 규모에서 호남선 터미널을 압도했다. 지하 1층, 지상 10층의 이 건물은 상층부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사다리꼴 형태로, 5층까지 버스가 올라가는 입체 구조물이었다. 여기에 백화점과 도매상가, 사무동까지 갖춰 하루 수용 인구만 25만 명에 달했다.

첨단의 시설도 자랑거리였다. 60개의 승차대와 28개의 하차대를 갖춰 42개 노선 750여 대의 버스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고, 26대의 에스컬레이터와 23대의 엘리베이터는 내부 이동의 편의와 신속성을 보장했다. 옥상에 조성된 주차장까지는 3대의 차량 리프트가 운행됐다. 차량의 진·출입과 대기 정보를 실시간 처리하는 전산 체계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과 연동한 차량통제 시스템은 공항의 첨단 관제 시스템이 부럽잖았다.

실질적 건축주였던 국가권력이 이 건물에 요구한 것은 기능적 편리함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 건 정치적 기념비였다. 이 점은 설계자 이강식이 완공 직후 과 한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기념비적인 인상을 주면서도 승객들이 평온감을 느끼고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능적인 면까지 고루 갖추어야만 해서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1981년 10월21일치) 속성상 수평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터미널 건물에 기념비성까지 담아내려 했으니 그 고민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건축가의 선택은 터미널 건물에 복합상가 기능을 더해 층수를 높이고, 테라스와 공중 진입로를 놓아 5층까지 승차시설을 끌어올림으로써 몸체의 질량감과 수직의 상승감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기념비, 경부선 터미널

이런 기념비성은 안보와 발전을 명분 삼아 종신독재 체제를 완성한 박정희 정권이 당대의 모든 공공 건축물에 요구한 제1의 덕목이었다. 게다가 건물이 착공한 1978년은 정부가 ‘1980년대 올림픽 유치’라는 잠정 목표를 세우고 물밑 작업을 서두르던 시기였다. 유신을 통해 취약했던 정당성의 기반마저 스스로 무너뜨린 박정희로선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잠재우고 국제사회의 우려를 희석시킬 대규모 스펙터클과 이를 뒷받침할 기념비적 도시 경관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것이다. 1979년 10월8일 정부가 올림픽 유치 방침을 공식화하며 내건 명분도 “경제 발전과 국력을 온 세계에 나타내는 마당이 되며… 국민의 일체감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속터미널이 완공됨으로써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본격화된 고속버스 시대는 가파른 절정으로 치달았다. 1970년 1422만여 명이던 고속버스 이용객(서울 기·종점 기준)은 경부선 터미널이 완공된 1981년 처음으로 4천만 명을 돌파한다. 정부가 터미널의 외형에까지 과도한 의미를 심으려 했던 데는, 그것이 고속도로 건설이란 정권 차원의 대역사에 정치적 구두점을 찍는 조형물이란 점도 적잖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속도로는 기실 박정희 정권이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는 국책사업이자, 국토 이용에 질적 변화를 가져온 거대 토목사업의 시초였다. 집권세력이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무리한 역사를 일으킬 때마다 단골 사례로 인용(“경부고속도로도 초창기엔 야당과 언론의 거센 반대가 있었다”)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지닌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생명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고속도로 개통은 1905년에 뚫린 경부철도만큼이나 한국인의 시공간 경험에 균열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꿈의 속도’로 여겨지던 시속 100km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속도가 됐다. 꿈을 실현하는 데는 단돈 130원(1969년 서울~인천 고속버스 요금)이면 족했다. 병영사회의 규율에 짓눌려온 불우한 청년들은 명품 스포츠카 대신 명견 그레이하운드 로고가 새겨진 2층버스에 올라 ‘하이웨이 스타’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 시절 전국의 고속도로는 최고시속 120km의 미국산 ‘그레이하운드’와 140km의 일본산 ‘후소’, 독일산 ‘벤츠’가 각축하는 레이싱 트랙이었다.

고속도로의 효과는 사람들이 겪는 시공간 경험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는데, 압축적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극동의 변방국가에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시공간 압축’을 지리적으로 구현한 것이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는 연결된 지역에 60% 정도의 거리 단축 효과를 가져다줬다(김호정·정일호, ‘고속도로망 구축의 심리적 국토공간 거리단축 효과’). 역으로 이는 도로망에서 배제된 지역에 그만큼의 거리를 이격시킨 것이기도 했다.

시공간 압축이 빚어낸 불균등 발전

하비에 따르면, 도로·철도 같은 교통망은 인적·물적 자원의 이동에 동반되는 ‘거리의 마찰’을 감소시킨다. 운송비를 절감시켜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일 뿐 아니라, 투입된 자본의 회전 기간을 단축시켜 사회적 평균 이상의 이윤 확보를 가능케 하는데, 결과적으로 초과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지리적 집중을 공고화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그 의도가 어찌됐든 경부축을 중심으로 국토 공간을 구획함으로써 포섭된 지역(서울·경기·충남·경북·경남·부산)과 배제된 지역(강원·충북·전북·전남)의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던 당시 비판론의 핵심도 사업의 우선순위, 추진 방식과 관련된 것이었다(김대중을 위시한 당시 야당 지도자들이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극렬 반대했다는 주장은 악의적 선동에 가깝다). 이런 사실은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시키지 않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이 경부고속도로 자체는 대통령 그분의 이름과 더불어 남을 거대한 사업으로 우리나라 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형언할 수 없는, 또 군사 면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민족적 사업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의 발언(1967년 12월9일 국회 건설위원회 회의록)에서도 확인된다. 김대중은 하루 전인 12월8일에는 “경부고속도로와 또 중간에서 호남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병행해서 집행함으로써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정부가 약속한 균형된 국토 건설이 명실상부하도록 계획을 추진할 용의는 없는가”라고 질의하기도 했다.

화려했던 옛 시절은 가고

건립 주체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3년의 시차로 들어선 두 고속버스터미널의 극단적 콘트라스트는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시공간 압축과 불균등 발전이 그려낸 ‘두 폭 제단화’(Diptych)였다. 그 시절 낡고 더러운 호남선 터미널을 벗어나기 무섭게 맞닥뜨리는 경부선 터미널의 압도적 위엄은 1980년 ‘피의 기억’을 간직한 호남선 승객들의 가슴에 ‘이등 시민’의 열패감을 심어놓는 잔혹한 배제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터미널의 화려했던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념비성이 필요와 기능을 압도한 과시적 건축물의 숙명이었다. ‘입체성’의 표지였던 5층과 3층 승차장은 1988년과 1992년 차례로 폐쇄됐다. 버스가 올라가는 경사로와 승차장의 지지 구조체에 심각한 균열이 발견됐기 때문인데, 움직이는 버스 하중을 계산하지 않은 졸속 시공의 결과였다. 승차장 용도를 다한 3층과 5층에는 화훼상가와 웨딩홀이 들어섰지만, 그 위층부터는 죽은 공간이 돼버렸다. 5층 승차장이 폐쇄된 1988년에만 6~8층의 점포 1764개 가운데 500개 넘는 곳이 문을 닫았다. 한때 희극인 남철·남성남이 나와 ‘동양 최대의 의류 도매상가’라 선전하던 이곳은 지금까지도 셔터를 내린 곳이 영업 중인 점포보다 많다. 주차장이 있던 10층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2000년대 초 서울시가 녹지확충 사업의 일환으로 옥상정원을 조성했지만 하루 방문자 수는 손으로 헤아릴 정도다.

그사이 옛 호남선 터미널은 첨단 하이테크 복합 건축물로 재탄생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강남 지가 덕에 재기에 성공한 율산 가문이 2000년 낡은 2층 건물을 헐어낸 자리에 터미널과 백화점, 컨벤션센터, 호텔 등을 갖춘 ‘센트럴시티’를 지어올린 것이다. 쇼핑몰과 식당가를 통해 지하철 3·7·9호선과 연결된 터미널 대합실은 국제공항 못잖은 쾌적함을 자랑한다. 이로써 호남선 승객들의 의식에 각인됐던 배제의 격절감은 늦게나마 보상받은 셈일까. 그러나 강남의 옛 호남선 터미널을 찾던 승객들 상당수는 그사이 부천과 성남, 안산 같은 변방의 외곽도시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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