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주쿠역에서 특급 기차를 타고 2시간가량 달려 고부치자와역에 내리면 날 반겨주는 일본인 노부부가 계신다. 야마나시현 야쓰가타케 고원에 위치한 호쿠토시까지 찾아간 것은 청계천 빈민들의 친구,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인 그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에 수시로 방문해 빈민운동을 하는 고 제정구 의원 등을 돕고 외국 선교단체에서 기금을 모아 어린이들 급식비를 조달했다. 당시 취미로 찍던 사진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소중한 역사 기록물이 되었는데, 그는 모든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셨다. 그 사진집을 보고 일본어도 한마디 모르는 내가 산골까지 찾아온 것을 신기해하셨다. 첫 방문 때, 노무라 할아버지 댁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한국 남양만에서 받아온 코스모스 꽃씨가 해마다 이렇게 꽃을 피워요”라는 설명을 듣고 그 꽃들을 다시 보았다. 마당에는 넓적한 돌이 하나 있는데 그건 여우의 식탁이었다. 산속에 야생 여우 가족이 사는데 숲이 자꾸 전원주택으로 개발되는 바람에 여우들의 먹잇감이 줄어들어 할 수 없이 먹이를 주게 되었다. 닭고기 잡뼈 등을 푸줏간에서 싸게 사다 밤마다 한 덩어리씩 돌 위에 두고 마당에 작은 불을 켠다. 푸줏간 아저씨가 서비스로 주신 비곗덩어리도 조금 보탠다. 불빛 신호를 보고 여우가 살짝 나타나 그걸 물고 가서 새끼들을 먹인다. 우리는 거실의 커튼 뒤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인근에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꽤 있었고 미술관도 여러 곳 있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그림책 관련 미술관이 네 군데나 있어서 놀라웠다. 그림책을 사랑하고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그 힘이 일본 그림책 작가들을 키운 것이다. 부러웠다.
지난겨울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몹시 추울 때라 집 뒤 숲이 온통 눈밭이었다. 밤이면 두꺼운 이불을 두 개 덮고도 입김이 하얗게 나와서 스웨터를 덧입고 잤다. 요리코 할머니가 해주신 맛난 밥을 먹고 기운을 내어 숲에 산책을 가면 신발이 푹푹 빠졌고, 사슴들의 발자국이 눈에 찍혀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새 미술관이 생겼다 해서 가보았다. 히라야마 이쿠오 실크로드 미술관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40년간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작업했던 화가 부부가 수집한 현지 예술품들과 그 화가 부부의 작품을 위한 미술관이었다. 밤과 낮의 사막 풍경 그림이 마주 보며 벽화처럼 가득 걸린 큰 전시실에서는 내가 사막에 서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미술관에 우리 고구려 문화재, 강서대묘 벽화가 완벽히 모사되어 있는 게 아닌가. 벽화뿐 아니라 벽화가 그려진 묘의 모습까지 도쿄예술대학에서 재현했다. 아, 이 일본 산골에 와서 고구려 벽화를 볼 줄이야.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그 작은 시골 마을을 떠올린다. 여우의 저녁식사를 생각하며 실크로드를 상상한다. 떠나야만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임정진 동화작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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