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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경기동부로 알면 큰일

남녀 다르게 싸줬던 책 포장
등록 2012-05-23 20:58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한때 나는 가위손이었다. 가위를 든 오른손은 촌스럽게 싹둑싹둑 가위질을 하지 않았다. 가위 날의 적절한 각도를 유지한 채 부드럽게 포장지를 밀치며 갈라나갔다. 김연아의 스파이럴 동작을 떠올리면 되겠다. 잘 빠진 두 다리의 부드러운 각도가 얼음판과 관객을 지배하듯, 나의 가위질은 포장지와 서점을 찾은 손님들의 시선을 지배했다. 왼손은 그저 거들 뿐? 아니다. 왼손은 가위손의 진행 방향에 따라 책날개와 모서리의 날카로움을 가위보다 먼저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면서 자동으로 테이프를 커팅해주는 기구까지 책임져야 한다. 김연아의 강력한 표현력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 표정과 긴 손에서 나온다. 표정은 몰라도 손의 움직임만은 연아와 비슷할런가. 갑자기 연아와 캔맥주를 마시고 싶다.

대학에 다닐 때 학교 앞 인문사회과학서점에서 일했다.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같은 대형 서점은 물론 동네 서점에서도 책 포장을 해주지 않은 지 몇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하던 서점의 책 포장 서비스는 끊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깨끗이 보고 싶어서. 일본은 그런 이유로 요즘도 문고본 등은 포장을 해준다. 여러 책에 돌려가며 사용할 수 있는 헝겊으로 된 책 커버도 나온다. 남에게 내가 읽는 책의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요즘도 불온서적 목록이 만들어지는 황당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심심할 때마다 서점이 공안기관의 압수수색을 당하던 때였다. 불심검문에서 가방 안에 든 ‘막스 베버’를 ‘맑스’로 경찰이 오해해 붙잡혀갔다는 고릿적 전설이 여전히 회자되던 때였다. 내가 일하던 즈음에도 서점이 털렸다. 그래서 사회과학서적을 표지 그대로 들고 다니며 읽기에 부담스러웠던 시절의 책 포장 전통이 면면히 내려왔던 게 아닐까. 조악하던 표지 디자인이 좋아지자 굳이 공들여 만든 예쁜 표지를 가리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 나는 남학생이 오면 종이 포장지로, 여학생이 오면 비닐 포장지로 포장을 해주었다. 차이는? 비닐 포장이 예쁘게 잘 나왔다. 그리 위험하지는 않지만 ‘나 이런 책 읽어요’ 잘난 척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류 책들이 비닐 포장의 대상이었다. 1분 정도면 한 권을 뚝딱 포장할 수 있었다. 속주 기타의 대마왕과 겨뤄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손놀림이었다.

이 글을 쓰기 전 주변에 굴러다니던 신문지를 이용해 책 포장을 해보았다. 속도는 조금 느려졌지만 손끝에서는 연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체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훈련이 공부라는 도올 김용옥의 뜻이 이런 거겠지. 프랑스 사회당 출신 대통령 얼굴이 박힌 신문지로 정체를 가린 책은 지난해 발간된 이었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경기동부’로 오해받으면 큰일이니까.

과거 대형 서점에서는 일일이 책 포장을 해주며 구매·절도 여부를 구별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전국서점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책 포장 서비스를 중단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1991년 신문 기사를 보면 “전국 5천여 서점에서 책 포장으로 쓰이는 경비가 연간 50억원”이라는 수치도 나온다. 그렇게 김홍도가 그린 서당 풍경 책 포장(사진)은 사라졌고, 그 서점도 몇 년 뒤 문을 닫았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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