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이상술 창비 문학팀
우리에게 ‘강남’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꿈의 대명사다. 주상복합아파트, 8학군, 명품 거리, 대한민국 1%, ‘강남불패’의 부동산 신화로 대변되는 부의 상징이다. 강남 주민이든 아니든 누구나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강남’은 우리 모두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체다. 그 강력한 꿈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은 그 꿈의 기원을 탐사하는 역작이다.
작가 황석영은 이전부터 여러 자리에서 필생의 작업 가운데 하나로 ‘강남형성사’를 꼽은 바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서울 강남의 역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겠다는 그 약속이 드디어 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야기는 1995년 6월 사상자 1500여 명을 낸 강남의 백화점 붕괴 사건에서 시작한다.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해온 개발시대의 욕망과 그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 사건에서 은 현재의 우리 삶을 규정하는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대사의 갈피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는 다섯 인물을 통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골에서 여상을 졸업한 뒤 고급 요정과 살롱을 거쳐 재벌의 후처가 되면서 신분상승을 이루는 박선녀, 해방 전 일제의 밀정에서 미 정보국 요원을 거쳐 기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며 영악한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백화점 회장 김진, 1970년대 강남 개발 붐을 타고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번 뒤 해외로 도피하는 부동산업자 심남수, 개발독재 시대 밤의 암흑가를 주름잡은 조직폭력배 홍양태, 그리고 광주 대단지 사건을 한가운데서 겪은 도시 빈민층의 자녀로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임정아. 이들은 우리 현대사의 어떤 대목들을 여실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전형적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한 번쯤 접했을 법한 인물들이어서 더욱 실감 있다.
“우리는 말이지… 천벌을 받아 마땅하군. (…) 그렇지만 현실이 너무 강력해서 하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거야.”
일제의 밀정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색출하는 데 앞장서다 해방 뒤에는 다시 미군 특무기관에서 일하며 좌익 소탕에 나서는 이희철은 자신의 과거와 역사를 이렇게 냉소한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겪고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에도 권력과 부의 향방을 가늠하는 본능적 감각을 발휘해 목숨을 보전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욕망에 휩쓸려 파멸을 맞는다. 저 한마디에 그의 인생사 전체와 함께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오욕과 아이러니가 압축돼 있다.
“글쎄 맨손으로 일어나기는 좋았는데 말이지… 아무래두 여긴 정신이 없어서… 혼을 빼놓고 살아야 할 것 같아. 앞으로 수십 년은 그렇게 흘러갈 거야.”
부동산업자 심남수가 잘나가는 사업을 접고 일본으로 떠나면서 남기는 저 탄식은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성장만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온 압축적인 근대화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그러구 집두요. 저는 임시직인데요. 우리 부모님은 시골서 올라와서 여태껏 일만 죽도록 하구두 산동네를 못 벗어났지요. (…)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
도시 빈민의 딸인 임정아가 무너진 백화점에 함께 갇힌 박선녀에게 던지는 저 말은 헛된 꿈보다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택한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역사 속에 각인시키는 한편, 그들의 시선을 통해 삶에 대한 뭉클한 감동과 희망을 던져준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과 절묘하게 맞물리도록 직조해내는 솜씨는 ‘과연 황석영’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굴곡을 그리는 필치는 날렵하면서도 힘이 넘쳐 속도감 있게 읽히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한 인간의 다층적 면모를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런 인물들이 역사의 어느 순간 서로 만나고 헤어지면서 어느새 거대한 원경으로서의 역사와 미시적 개인의 욕망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드러나는 것이다. 덕분에 열 권짜리 대하소설로 풀어내도 모자랄 한국 현대사의 복잡다단한 국면들이 몇몇 인물의 삶으로 압축되는 놀라운 형식상의 성취가 가능해졌다.
이 숨가쁜 ‘강남형성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삶의 밑바탕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이 그리는 다섯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으로 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도 끝내 덧없다. ‘강남’이라는 남한 자본주의의 한 상징, 또는 황금을 향한 욕망 자체가 너무도 견고하고 뿌리 깊은 동시에,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듯, 한편으론 너무나 덧없기 때문이다. 그로써 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금의 현실을 추동해온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하며, 동시에 그 꿈과 욕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단단한 물질성을 지니고 이어져왔는지 절감하게 한다.
황석영이 ‘작가의 말’에서 밝힌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강남몽(夢)’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무엇보다 문제적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 자체가 한바탕 꿈인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 꿈에서 깨어났는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은 아닌가? 또는, 꿈에서 깨어나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은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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