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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다시 만나고 싶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당부 <김대중 자서전>
등록 2010-12-31 16:45 수정 2020-05-03 04:26
[올해의 책 2010]
〈김대중 자서전〉김대중 지음/ 삼인 펴냄

〈김대중 자서전〉김대중 지음/ 삼인 펴냄

김종진 삼인출판사 편집팀장

“황혼이 찾아왔고 사위는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내 삶을 국민에게 고하고, 역사에 바치는 마지막 의식으로 알고 지난 세월을 경건하게 풀어보겠다. 막상 마지막이라니 후회 없는 삶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찼지만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다.”(머리글 ‘생의 끄트머리에서’ 중)

2010년 8월10일 출판기념회 소식은 방송 3사 저녁 뉴스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두 권을 합쳐 1400쪽이 넘는 ‘자서전’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야말로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화끈한 반응은 서점과 언론사는 물론 출판사의 예상 범위마저 넘어선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년. 그가 살아낸 인생을 정본 자서전으로 남기는 일이 의미가 있는 만큼, 출간 뒤 주목을 받을 것이며 또 이 책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분량이 많고 다른 책에 비해 가격이 비싸서 사람들 손에 들어가 읽히는 속도는 다른 책에 비해 느릴 거라 여겼다.

그의 자서전을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나와 다른 한 인간을 바라보는 수평적 관심인지, 아니면 국민으로서 전 대통령을 앙망하는 수직적 관심인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 까닭과 동기는 각양각색일지라도 김대중의 온 생애에 집중된 시선의 열기만큼은 뜨거웠다.

 

겁쟁이 소년·이상주의자·현실주의자…

김대중은 누구보다 대중에게 오랫동안 노출된 삶을 살았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목도하고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정치를 하기로 결심한 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 때부터 영면에 든 2009년까지 50년 넘는 세월 동안, 때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때론 어떤 사건의 핵심 인물로 그의 이름은 세인들 입에 숱하게 오르내렸을 터다. 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 김대중은 자신만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사람들은 그 깃발 아래 모여 박수를 치거나 먼발치에 서서 삿대질을 했다. 그 삶이 다채로웠던 만큼 바깥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각도 하나로 모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에는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1월6일에 태어났다”라는 첫 문장에서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김대중의 인생이 김대중의 언어로 적혀 있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남긴 자서전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로 삼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자서전 속 김대중은 밤에 혼자 화장실 가기를 무서워하는 겁쟁이 소년이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신념을 버리지 않는 투사이기도 하다. 아무도 꾸지 않는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이상만을 좇느라 현실을 저버리거나 현실에서 내쳐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하다. 옥살이하는 사형수에서 청와대에 입성한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토록 삶의 굴곡이 극단적인 인물도 흔하지 않다. 독자는 한평생 ‘민주주의’와 ‘평화’를 화두로 삼으며 살다 간 인물의 자서전을 읽으며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시 만난다.

자서전 1권에는 출생에서부터 정치에 입문하기까지, 독재 시절을 거치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상황, 귀국 뒤 대선 도전에 이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삶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서 민주화 시대가 열리기까지 우리나라 민중이 거쳐온 굴곡진 삶과 위정자들의 폐단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시기, 김대중의 몸과 마음은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항거하는 민중의 곁에 있었고, 그의 시선은 힘 가진 위정자 쪽을 향해 매섭게 벼려져 있었다.

대통령 재임기 5년은 젊은 김대중이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며 옥중과 망명 생활에서 기획한 한반도를 위한 이상들을 숨가쁘게 실천할 수 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자서전 2권은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퇴임 뒤 서거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이는 퇴임한 전직 대통령에게 직접 듣는 최초의 국정 보고이자 ‘성공한 민주주의 정치가’의 전모가 담긴 회고록이기도 하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각국을 다니면서 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 살림을 되살리려 애쓴 과정, 1980년대 옥중에서부터 구상한 정보기술(IT) 강국을 실현하기까지 기울인 노력,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햇볕정책’의 실천으로 남북 간 화해의 장인 6·15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일 등 여전히 회자되는 굵직한 일들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급박한 정경들이 서술돼 있다. 또 이처럼 잘 알려진 사실들을 비롯해 그 시기에 일어난 국내외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직접 국정을 운영한 당사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된다.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내 삶은 20세기를 지나 새 천년으로 이어졌지만 돌아보면 한 줄기 섬광 같은 것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것들, 사랑한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이름을 연호하던 군중들은 어디에 있고 나를 협박하고 욕하던 무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거짓과 증오가 닳아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본문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 중)

이제 김대중은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은 남아 존재한다. 대통령 집무실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대한민국이 남북한 평화를 밑거름 삼아 유라시아로 영향력을 뻗어나가기를 바랐던 김대중의 꿈은, 남북 간에 포탄이 오고 가며 ‘역사의 퇴행’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오르내리는 지금 신기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민중의 생존,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마음에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 시절은 지금보다 더 각박하고 서럽던 때였다. 김대중은 모진 세월을 살아내면서 한반도와 국민을 위한 꿈을 만들어나갔고, 죽기 직전까지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죽기 직전까지 진정한 성공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호도하는 위정자를 꾸짖었으며, 절망하는 국민에게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웅변했다.

그리고 이제 자서전에 담긴 그의 인생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의로운 꿈을 꿀 용기를 잃지 않게 독려하는 마지막 당부가 되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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