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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만나야 할 경이로운 시간



등단 40년, 소설가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록 2010-12-31 16:06 수정 2020-05-03 04:26
[올해의 책 2010]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펴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펴냄

원미연 현대문학 단행본팀장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박완서 신작 산문집 는 세상으로부터 작가의 몫으로 떠넘겨받게 된 시대에 대한 소슬한 관조와 사사롭게 만나는 자연과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유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4년 동안 쓴 글을 모은 이 산문집은 세대를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를 파노라마 같은 온갖 색조로, 그윽하게 뿌리내린 사유의 세계는 작품의 원형이 된 자신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솔직 담대한 사실주의 그림 같은 리얼리티를 담고 있어 더더욱 울림이 크다. 이번 산문집이 노작가만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에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새삼 발견하게 된 기쁨과 경탄, 그로 인한 감사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소유가 아니어도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음과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대목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강한 메시지로 전달한다. 책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작가에겐 못 가본 곳, 곧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충일함이 가득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만나야 할, 다 하지 못한 새롭고 경이로운 시간이 작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품어준 이에 대한 그리움, 세상 비판

이 산문집에서 작가는 꿈틀대는 생명력의 경이로움을 담아 “내 몸이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라며 죽음과 가까워진 생에 대한 담백한 성찰 또한 거침없이 고백하고 있다. 죽음을 초월한 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 말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체험한 뒤 고통에의 의지로 죽음을 인정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생명’이란 존재에 이르는 삶을 체험하게 된 고백이다. 아울러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듬고 다독여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품이 되어준 김수환 추기경, 작가가 자신 안에 칩거해 세상을 등지고 있을 때 세상 속으로 이끌어준 박경리 선생, 더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전락해버린 불행감에 도취돼 있을 때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 박수근 화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다 주고 가지 못한 사랑을 애달파한다.

한편,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경제 제일주의가 만들어낸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무너져내린 남대문, 천안함 침몰 사건 앞에서 오히려 작가 자신의 “뻔뻔스러운 정의감”과 “비겁한 평화주의”에 대한 반성은, 단순한 한 개인을 넘어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증인으로서 작가만의 상처를 되새겨본 반성이자 말할 수 없는 연민과 회한을 담고 있다.

또한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2008년 한 해 동안 신문에 연재했던 서평 ‘책 너머 본 세상’을 함께 실었다. 자신은 이 글을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책을 골라 읽다가 오솔길로 새어버린 이야기들”이라고 했지만, 책 한권 한권마다 제각기 다른 삶의 자국을 새겨놓은 글이어서 ‘박완서가 책과 소통하는 세계’의 색다른 재미와 깊이를 한껏 느낄 수 있다.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답게, “기력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글을 쓸 것”이라는 박완서는 여전히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빨리 쓰지는 않지만 좋은 문장을 남기고 싶어서 더 공들여 쓴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작품 생각을 하면 뿌듯하고 기쁘다”는 그의 말에는 대지와 같은 생명력이 담뿍 담겨 있다.

“빨리 쓰지는 않지만 더 공들여 쓴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 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중에서)

작가는 등단 40주년이라는 것에 어떤 구속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로, 작가가 아직 가지 못한 길, 어딘가에 있을 더 아름다운 길을 찾아나설 자유를 향한 의지와 내적 충동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산문집이 작가의 현재를 읽는 즐거움은 물론 미래를 읽는 설렘까지 가져다주는 이유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울러 ‘살아 있는 거목’이라는 진부한 찬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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