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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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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개운달착지근한 홍어탕의 맛


음식맛의 기본은 단맛·쓴맛·신맛·짠맛의 ‘사원미’지만
맛의 수준·농도·깊이에 따라 표현은 수만 가지라네
등록 2009-11-27 01:25 수정 2020-05-02 19:25
새콤개운달착지근한 홍어탕의 맛. 김학민

새콤개운달착지근한 홍어탕의 맛. 김학민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세 빛깔을 삼원색이라 한다. 그림물감에서는 빨강·노랑·파랑을, 빛에서는 빨강·녹색·파랑을 삼원색이라 하니, 그림물감으로 말하면 빨강·노랑·파랑의 수없는 조합이 기기묘묘한 색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빛깔의 삼원색처럼, 모든 맛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네 가지 맛을 사원미라 한다. 곧 모든 맛은 사원미인 단맛·쓴맛·신맛·짠맛이 하나둘, 두셋 또는 네 가지 모두 적당히 조합돼 나오는 것이다. 매운맛은 혀에서 느끼는 순수한 미각이 아니라 생리적 통각, 곧 미각신경을 강하게 자극함으로써 느끼는 기계적 현상이기에 사원미에 포함하지 않는다.

단맛은 인간이나 동물, 곤충이 가장 강하게 원초적 욕구와 집착을 가지는 맛으로, 감상적으로는 편안함·이익·사랑·쾌락·즐거움을 상징한다. 쓴맛은 심하면 불쾌감을 보여도 적당히 섞이면 입맛을 돋우고 다른 맛에 혼합돼 독특한 풍미를 주지만, 그 불쾌감 때문에 실패·좌절·패배·고통을 상징한다. 신맛은 약간의 향기를 수반하며, 첨가할 경우 본래의 맛과 어울려 식품의 맛을 좋게 하고 식욕을 증진시킨다. 신맛은 고난·괴로움·노동·좌절·어려움을 상징한다. 짠맛은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필수불가결의 기본 맛으로, 어려움·결핍·인색 등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음식은 이러한 사원미에 매운맛, 떫은맛, 구수한 맛, 아린 맛, 교질맛 등이 더해지고 보태져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원미를 표현하는 데도 참으로 복잡하다. 상당히 단맛이 날 때는 ‘달큼하다’ ‘들쩍지근하다’ ‘들척지근하다’라 하고, 약간 단맛이 날 때는 ‘달곰하다’ ‘달짝지근하다’라 한다. 또 조금 단맛이 들 때는 ‘들큼하다’ ‘달착지근하다’고 하고, 감칠맛이 돌 정도의 알맞은 단맛은 ‘달콤하다’ ‘달차근하다’고 한다. ‘쓰다’도 제법 쓴맛이 날 때는 ‘씁쓸하다’ ‘씁쓰레하다’이고, 약간 쓴맛이 날 때는 ‘쌉쌀하다’ ‘쌉싸래하다’이다. ‘시다’의 경우 신맛이 강할 때는 ‘시쿰하다’ ‘시굼하다’ ‘시큼하다’ ‘새큼하다’이고, 약간 신맛이 날 때는 ‘새콤하다’ ‘새곰하다’ ‘새금하다’ ‘시금하다’이고, 신맛이 변한 맛은 ‘시금털털하다’이다.

좀 짠맛이 날 때는 ‘짭짤하다’ ‘찝찔하다’ ‘짭조름하다’이고, 딱 알맞은 짠맛은 ‘간간하다’ ‘건건하다’이다. 매운맛도 자극적이게 매울 때는 ‘칼칼하다’ ‘컬컬하다’ ‘매콤하다’ ‘얼큰하다’ ‘얼얼하다’ ‘얼쩍지근하다’라 하고, 약간 매운맛을 느낄 때는 ‘알알하다’ ‘알큰하다’ ‘알근하다’ ‘매옴하다’ ‘매움하다’ ‘알짝지근하다’ ‘알찌근하다’, 가볍게 매울 때는 ‘매큼하다’이다. 또 많이 싱거울 때는 ‘밍밍하다’ ‘맹맹하다’ ‘밍근하다’ ‘맹근하다’요, 조금 싱거울 때는 ‘승겁다’ ‘심심하다’이며, 맛있는 싱거운 맛은 ‘삼삼하다’이다. 느끼한 맛이 없을 때는 ‘담담하다’ ‘깔끔하다’이고, 텁텁하지 않고 산뜻한 맛이 날 때는 ‘시원하다’ ‘개운하다’ ‘산뜻하다’이다.

맛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표현이 외국어에도 있는가 궁금해 수개 국어에 능통한 강남대 김필영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의 경우 ‘sweet’(달다), ‘bitter’(쓰다), ‘sour’(시다), ‘salty’(짜다), ‘hot’(맵다), ‘astringent’(떫다) 등과 같이 맛을 표현하는 딱 떨어지는 단어 이외의 복잡한 맛은 대개 형용사를 사용해 관형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언어의 귀재 김 교수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는 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영어의 달인 ‘아륀지’ 총장님께 ‘달차근하다’ ‘쌉싸래하다’ ‘시금털털하다’ ‘짭조름하다’ ‘칼칼하다’ ‘밍밍하다’가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

지난 9월 하순, 후배 사진작가와 함께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신비의 사찰 운주사를 들러보고 오는 길에 화순시장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성식당(061-374-4365)을 찾았다. 어머니 김복순(58)씨에 이어 아들 공흥배(37)씨가 같은 자리에서 30년째 홍어탕을 끓이고 있다. 1만5천원짜리 홍어탕 ‘중’을 시키려니 다 못 먹는다며 1만원짜리 ‘소’를 하란다. 다른 음식을 더 못 시키게 하는 것을 사정사정해 1만원짜리 삼합 한 접시를 더 주문했는데, 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새콤하면서 달착지근하고, 알짝지근하면서 개운한 홍어탕의 국물맛! 그리고 국물을 어느 정도 비우고 나서 끓여먹는 날근한 홍어애의 말캉한 맛! 막걸리는?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라.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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