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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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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 ‘~하며 떡실신’

등록 2009-04-16 20:25 수정 2020-05-03 04:25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 덕분에 로켓처럼 치솟은 한국인들의 자존심이 땅으로 복귀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대놓고 곳곳에서 외국인들을 실신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종격투기나 프로레슬링의 링에서 그렇다면 괜찮지만,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곤란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대는 인터넷. 어느 카메라 동호회에서 시작된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가 광속으로 퍼지며 사람들을 때려눕히고 있다.
미국에서 일본인 유학생이 젓가락질을 가르치고 있을 때, ‘오른손에 수저 둘 다 집고 국물과 스시를 번갈아가며 먹는 나를 보고 다들 떡실신’. 한국에 친구들이 왔을 때, ‘자장면 시켰더니 20분도 안 돼 배달되고, 다 먹은 그릇 문 밖에 내놓으니까 여기가 아틀란티스라며 게거품 물고 실신’. 외국에서 유학 시절을 보냈다는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이라며 올려놓은 글에 네티즌들은 포복절도하고 있다. 비록 당사자의 진짜 경험담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올린 글을 조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이 강렬한 유머는 파생 시리즈들을 탄생시키며 검색어 순위 톱을 다투고 있다.
‘떡실신’이라는 말은 보통 격투기 같은 데서 완전히 혼절할 정도로 두드려맞아 떡처럼 링에 나자빠진 상태를 뜻할 때 쓰이곤 했다. ‘놀라 나자빠졌다’를 경쾌하고 매력 있는 어감으로 표현한 것이랄까. 그런데 이것이 ‘~하며 떡실신’이라는, 단순함 속에 확실한 반전을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구조로 진화하면서 수많은 변종을 만들어내는 히트 유머가 됐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떡’이라는 한국적 코드. 이 시리즈는 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파생된 ‘별것 아닌 일들이 한국인들을 우쭐하게 만드는 상황’들을 이어가며 웃음과 함께 통쾌함을 선사하고 있다. 여러 블로그나 동호회에 퍼져간 글에는 원래의 시리즈 못지않은 기발한 경험담들이 덧붙여진다. 해외 출장 때마다 종이접기 4종 세트로 개구리와 학을 접어주면 외국 애들 떡실신. 지폐 100장 잡고 한 번에 세기로 떡실신. 미군과 합동훈련 때 담배 묘기로 ‘도넛이랑 거북선이랑 물레방아 콤보로 날려주니 왓 더 헬! 오 마이 갓 룩 앳 댓!’ 떡실신. 어떤 네티즌은 에서 막걸리가 맛있다고 마셔대던 외국인 리포터가 잠들어버린 장면을 캡처해서 올리며 떡실신을 이미지화한다.
세계는 닮은 듯 다르다. 한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놀라 자빠지는 일이 된다. 초창기의 가 보여주었던 신선한 재미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나왔다. 그 미녀들이 맥 빠진 섹시 토크만 일삼으니 시청자가 스스로 소재를 찾아나선 셈이다.
그중의 백미는 ‘(정보기술(IT) 업계) 개발자 떡실신 시리즈’. 미국에 출장 온 한국 개발자들, 일단 창고에 짐을 풀라고 애기하자 ‘영어를 못 알아듣고 그곳이 프로젝트룸인 줄 알고 컴퓨터 세팅에 심지어 랜선을 설치한다고 천장까지 타서 세팅하자 미국 업체 떡실신’. 정말로 한국 개발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아는 사람만 뒤집어질 수 있는 유머. 그러나 웃고 나서는 눈물을 찔끔거릴 수밖에 없는 자조의 유머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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