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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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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하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

등록 2001-03-06 15:00 수정 2020-05-02 19:21

80년대 문화운동판을 달궜던 문화게릴라들, 그들은 21세기에 무엇으로 사는가

80년대, 세상은 너무나 불합리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거대한 변혁을 꿈꿨던 이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에 귀를 기울였고, 그 정도까지 과감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누구나 마음속에는 ‘변화’와 ‘참세상’을 꿈꿨던 시기가 80년대였다. 80년대 말, 몇몇 사람들은 변혁의 대상으로서 문화계를 주목했다. 자유롭고 신나는 힘이 넘쳐야 할 문화계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관행들과 공고한 기득권의 권위가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문화계를 바꿔보자고 젊은이들은 문화판을 새로운 현장으로 삼아 뛰어들었다.

문화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80년대의 젊은이들은 이제 마흔 즈음의 중년으로 변했다. 애초 만만찮았던 ‘동지들’의 숫자는 해를 넘길수록 줄어들었다. 일부는 주류 문화판으로 뛰어들어 거물이 되기도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문화판을 떠났다. 이미 사람들의 가슴은 식어버렸고, 세상은 늘 그렇듯이 언제 요동쳤냐는 듯 그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화판 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들은 건재하다. 90년대를 거치면서 그들이 주장했던 가치와 진리가 지금 세상에선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돼버린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그들의 활동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세월은 흘렀어도 자신들이 내걸었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고, 그래서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80년대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가치를 아직 부여잡고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게릴라들은 과연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 가운데 세 사람을 만나봤다.

게릴라 하나- 독립다큐멘터리계의 거장 김동원

독립영화와 독립다큐멘터리계의 좌장격인 김동원(46·독립영화협의회 의장) 감독. 여전히 남아 있는 문화게릴라의 대표격인 인물인 김 감독은 영화판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의 이름을 아는 일반인은 드물다. ‘유명하면서도 유명하지 않은’ 존재인 셈이다. 애초 ‘운동’과는 무관했던 김 감독은 영화연출을 배우던 80년대 중반 우연히 비디오를 찍으러 간 서울 상계동에서 철거촌의 처절한 상황을 알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철거민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철거대책위원회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사회문제를 영상에 담는 독립다큐멘터리 작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가 91년 만든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푸른영상’은 올해로 꼭 10년째를 맞는다. 푸른영상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본산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전심의에 맞서 싸워왔다. 때로는 경찰의 압수수색에 사무실이 쑥대밭이 되기도 했고, 운영비가 없어 일년에 서너번 월급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90년대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김동원 감독이 있었다.

김 감독은 최근 전시회 겸 독립다큐멘터리 상영회를 마쳤다. 상계동 철거민들의 생활을 찍은 부터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송환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까지 김 감독이 그동안 만들어온 주요작을 모두 상영하는 전시회였다. 주최쪽에서도 놀랐을 정도로 제법 많은 관객이 몰렸다. 관객은 대부분 중년과 초로의 아주머니들, 그리고 학생들과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었다. “정작 영화쪽 사람들은 별로 안 오고 철거촌 주민들하고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많이 오셨더라”고 김 감독은 웃는다.

그의 생활은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던 그 시절에서 변한 게 없다. 푸른영상 사람들은 무조건 월급을 30만원 받는다. 결혼하면 10만원 더, 아이를 낳을 때마다 10만원씩 더 주는 식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운영이 어려워 절반으로 줄였다. 그래서 아이가 셋인 김 감독의 월급은 35만원이다. 부인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월 90만원만 고정적으로 벌어오라”는 것이다. 다행히 영화학과 강의를 맡아 월 25만원을 보태고, 워크숍 특강 등의 가욋일을 하면서 간신히 90만원을 맞춰 집에 들고간다.

처음 푸른영상을 만든 멤버들은 이젠 남아 있지 않다. 변영주 감독만이 같은 길을 따로 걷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류 영화판으로 가거나 아예 영상일을 그만뒀다. 김 감독은 그런 와중에서도 당산나무처럼 독립영화판을 지켜왔다. “동료들이 떠나가고 변질될 때는 참 섭섭하기도 했어요.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를 했으면 저도 그랬을지 모르죠.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나 갈등은 없었어요.”

그의 카메라는 늘 사회의 쟁점을 향해 있다. 상계동 철거민들의 삶을 그린 (1988), (1990), (1995), 87년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 시위대 최후의 6일을 재현한 (1997), 행당동 저소득층의 공동체 이야기 (1999), 그리고 요즘 작업중인 장기수들의 기록 까지. 그러면서 빈민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96년에 을 찍으러 갔을 때도 주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싸웠다.

그가 보는 요즘 세상은 처음 상계동에 뛰어들었을 때와 다를 게 없다. 아니, 더 나빠졌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람들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냉소한다. 그리고 당시는 철거폭력이나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폭력이 주된 문제였지만, 이제는 자본권력이 더 심한 독재를 한다. 군사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김 감독은 찍을 게 너무 많다고 한다. 온 나라에 다큐멘터리를 찍을 소재가 넘쳐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변해선 안 되는 것들이 자꾸 변하는 것이 김 감독의 고민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나 공동체적인 삶이 자꾸만 진부한 이야기가 돼버리는 것 같아서다. 80년대에 그가 지켜나가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엷어지고 있음을 그도 느낀다. 그래서 더 그 가치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이 현실임은 분명하고, 해나갈 일이 많기에 푸른영상과 김동원 감독은 지난 10년을 결산하면서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게릴라 둘- ‘가수협동조합’ 꿈꾸는 김영준

그나마 영화판에 뛰어든 문화운동가들이 많은 편이었다면, 대중음악판에 뛰어든 다음기획의 김영준(39) 사장은 드문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외국어대 82학번인 김 사장은 대학 시절부터 노래패 활동에 푹 빠져 있었고, 졸업한 뒤 자연스럽게 노래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 민족문화운동연합(민문련)에서 그가 맡았던 것은 비합법테이프, 즉 운동가요를 몰래 파는 일이었다. 짜임출판사를 인수한 뒤에도 그는 전노협 노래책을 찍어서 팔았다. 독도 관련 이벤트를 한번 기획했다가 출판사를 들어먹은 뒤에는 민족음악협회 출범과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정태춘·박은옥씨의 매니저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95년 독립해서 차린 것이 다음기획이었다. 권진원씨와 이정열씨가 거쳐간 이 기획사는 지금 윤도현밴드와 강산에, 그리고 정태춘·박은옥씨와 전속을 맺고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다.

바닥이 좁고 고정관념과 불합리한 관행이 가득한 대중음악계에서 김씨의 존재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물질’처럼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다. 대중음악 가수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방송문화에 대해서 서슴없이 비판을 해대는 매니저를 그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대중음악계에서는 더 외로운 처지로 버텨왔다.

처음부터 다음기획은 방송에 목을 매는 기존 기획사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팬들을 직접 만나는 콘서트를 계속해 방송에서 주목해 찾아오게 하는 식이었다. 이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10만장, 20만장 음반을 파는 가수를 배출했지만, 그 과정을 버티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이 없는 김 사장으로선 담보 대출이 불가능해 어떤 때는 일숫돈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처음 다음을 만들 때 이름의 뜻은 다양한 음악을 담자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운동단체가 아니라 사업이다보니 생존이 절박한 상황이 돼버렸죠. 그러다보니 처음 뜻보다는 주류 매니지먼트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 목표가 돼버렸어요.”

그러면서 다음기획의 이미지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들의 기획사라는 것, 그리고 다음기획 가수들은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김 사장의 지론은 “가수야말로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사장은 가수들을 데리고 파업현장도 많이 다녔다. “가서 저 사람들은 왜 데모하고 있고, 무슨 문제 때문에 데모를 하는지를 알아야 그런 곳에 가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알잖아요.” 실제 다음의 가수들은 ‘파업가수’로 불릴 만큼 파업현장에서 많이 노래를 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푸른영상처럼 다음도 아직까지는 생존만으로도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업체들은 다음의 방식에 대해 ‘정신나간 짓’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신인은 수익의 절반을, 고참 가수에게는 수익의 7할을 주는 방식 때문이다. 매니저 비용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누는 게 정상이지만 제작자가 그러는 것은 누가 봐도 지금 가요시장 구조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김 사장은 더 큰 계획을 갖고 있다. 가수들이 회사에 출자해 직접 제작하고 자신은 경영만 하는 가수협동조합으로 다음기획을 만드는 것이다. 조만간 실제로 시행에 옮길 계획이다. 아직 80년대 꿈꿨던 열정을 담아낸 작품이 없다는 것은 조만간 털고 싶은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다.

게릴라 셋- 책으로 산을 옮기는 강인황·문현숙

출판계에서 요즘 괜찮은 출판사로 주목받고 있는 이산출판사의 강인황(40) 사장과 문현숙(36) 실장 부부도 게릴라처럼 출판문화의 변화를 시도하는 이들이다. 연세대 앞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알(아래아로 넣어주세요)서점’을 운영하던 강 사장과 한길사와 돌베개출판사에서 편집을 해왔던 문 실장이 출판사를 만든 것은 97년. 이제 4년째를 맞은 진짜 ‘영세’출판사다. 부부와 편집 인력 1명까지 전 직원 세명의 초미니 출판사지만 이들이 내는 책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웬만한 대형출판사를 능가할 정도다.

이산출판사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관련 전문출판사로 이름처럼 ‘산을 옮기려는 어리석음’을 특성과 무기로 내세운다. 책 하나 찍어내 번 돈으로 다음 책을 찍어내고, 예상보다 성과가 더 좋으면 한권 기획할 것을 두권 기획하는 식으로 첫 번째 책 부터 최근의 와 까지 모두 17권의 책을 펴냈다. 어차피 자급자족 형태의 전문출판이 아니면 이 규모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방향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이렇게 평생 좋은 책 100권만 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 부부의 신조다. 남편은 책을 찍는 전반적인 일을 하고, 부인은 책의 표지를 디자인하고 홍보를 맡는다. 사실 홍보란 신문사에 책을 부쳐주는 것뿐이고, 별다른 광고도 하지 않는다. 애초 홍보비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권당 4천∼5천부 정도만 출고할 뿐인데도 인문도서 시장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이산의 책은 나올 때마다 인문분야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다.

각각 출판사를 다니던 두 사람이 만난 것은 80년대 후반. 두 사람이 다니던 회사가 한 동네였고, 마침 당시 출판계 안에서 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진 편집자 모임 ‘문맥회’가 활발히 열리던 터였는데 그들은 이 모임에서 만났다. 당시 문 실장이 성북구 지부장이었다. 문 실장이 더 분명하게 ‘문화운동’에 나선 경우라면 강 대표는 “책이 좋아 언젠가는 출판을 한다”는 신념으로 출판에 투신한 경우였는데 알고보니 한 대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결혼 7년째에 ‘계획대로’ 이산출판사를 차렸다. 물론 80년대 품었던 생각과 가치관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출판으로 ‘계몽’한다는 식의 의식은 없다. “읽을 만한 책, 돈만 가지고는 낼 수 없는 책을 낸다는 것이다. 운동?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면 그게 운동일 것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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