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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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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영화가 반짝이는 순간

등록 2006-06-09 15:00 수정 2020-05-02 19:24

와 가 관객을 홀리는 이유 … 음악 안 ‘사람 이야기’에 감동하고 ‘생짜 연주’에 흥분하다

나는 지난 10년간 내가 본 공포영화를 모두 알고 있다. 등 딱 네 편이다. 온몸으로 공포를 견디다 지쳐버리곤 해서 자연스레 꺼리게 됐다. 반면 한 친구는 이 장르를 쪼개 흡혈귀 영화를 섭렵하더니 관련 서적도 썼다.

다른 친구는 로맨틱 코미디 광이다 못해 를 만든 전문 제작사 ‘워킹타이틀’ 같은 곳에서 일할 날을 꿈꾸고, 어떤 이는 배우 벤 스틸러가 나오는 소심남 코미디 영화는 무조건 챙겨본다. 취미란에 단순히 ‘영화감상’이라 적는 게 ‘취미 없음’보다 더 무취미적으로 보이는 요즘, 사람들은 저마다의 취향을 사랑하고 자랑한다.

쿠바의 현실과 라흐마니노프를 알고

그렇다면 나는? 처럼 나르고 달리는 ‘속도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오늘의 초대손님 ‘음악 영화’에 쉽게 흥분하고 감동한다. 세상의 영화들이 치정과 살인을 담기에 바빠 음악 영화의 순번이 잘 오진 않지만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안 가리고 작은 영화관과 영화제에 들르는 수고스러움을 감내한다면 매년 몇 편 챙길 수 있다. 최근엔 무거운 엉덩이를 채찍질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를, 한 극장에서는 를 관람했다.

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쿠바 하바나에서 영화를 공부한 베니토 잠브라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스페인 음악계에 진출하고 싶은 젊은 음악인 루이와 티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작사의 터무니없는 계약조건에 갈등하는 루이네 밴드와 가난이 지겨워 목숨을 걸고 미국행 보트에 몸을 실은 루이의 아내에게서 의 노인들이 보여준 여유와 달관은 찾기 힘들다. 열대야는 관료주의로 흐물흐물해졌고, 젊은이들은 탈출을 원한다. 비록 슬픔과 화해가 신파로 채색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나 쿠바식 인디음악이 어떤 록과 일렉트로닉과 힙합을 보여주는지 궁금하다면 올 8월 열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나길 바란다.

음악 영화는 스피커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음악인들의 인생과 이를 둘러싼 사회상이 전개되면서 음악은 시대 공간 속으로 편입된다. 임순례의 가 주름살 새겨진 음악으로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그려냈다면, 영국 탄광촌 브라스밴드를 다룬 영화 는 잃어버리는 것을 앞에 두고 어떻게 저항하고 희망을 찾을지를 가르쳐준다. 영화 는 동경 어린 여행지로 각인된 쿠바의 오늘을 음악으로 말한다. 카세트테이프에서 MP3로 기술은 변했지만, 음악 안의 ‘사람 이야기’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음악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음악으로 관객을 호릴 때다. 변두리 피아노 학원 강사와 부모 없는 가난한 아이가 모자처럼 관계를 맺는 과정을 그린 영화 는 ‘착한 영화’에 대한 삐딱한 두려움을 가진 이에겐 위험한 영화다. 뻔한 화해를 버텨낼 강심장을 탑재하고 혹시나 싶어 견딘 108분. 대어는 후반부에서 낚였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선보이는 연주 장면에서 30분에 달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8분가량 편집돼 흘러나온다. 이 순간 클래식 초보자는 성인 역으로 특별출연한 피아니스트 김정원과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를 발견했다. 반면 피아니스트 신동이라는 아역배우 신의재의 진가가 발휘되지 못했다. 음악 영화는 음악에 집중할 때 빛날 수 있거늘.

음악을 보석처럼 닦아낸 영화로 지난해 개봉한 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미 어워즈에서 13번 수상한 스타 흑인 뮤지션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는 시각장애인인 그가 어떤 식으로 거대해져갔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녹음실의 백코러스들이 말썽을 일으키자 그들을 내보내고 혼자 여덟 트랙을 녹음해버리는 장면이나, 레퍼토리가 바닥나 곤란해진 밴드 앞에서 “일단 내가 칠 테니까 대충 맞춰봐”라고 소리치며 생짜 즉흥 연주를 선보이는 장면은 음악적 쾌감을 선사한다. 영화 를 연출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은 2004년 레이 찰스가 죽기 전까지 그와 교감을 나누며 영화를 준비했고, 레이 찰스는 수록곡들을 직접 녹음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친 주연배우 제이미 폭스의 립싱크 연기에 레이 찰스의 친구인 음악인 퀸시 존스는 “내 친구랑 똑같다”며 감탄했다. 가 아쉬운 이유다.

레이 찰스의 도 뺄 수 없지

‘애정’이라는 풍요로운 감정을 지닌 감독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음악의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다. 다큐멘터리 을 보며 옛 블루스맨에게서 소박하고 담백한 노동요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던 건 블루스를 아끼던 빔 벤더스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 영화 자막으로 철학적이고 인정 어린 노랫말을 읽어가며 관객은 감독과 배우에게로 연결된 연대의식의 실체를 느낀다. ‘음악은 우리의 영혼을 두드린다’는 명제를 대신 구현해주는 감독들이 고맙다.

솔과 블루스로 정상에 선 순간 컨트리를 시작했던 레이 찰스의 음악적 진보를 미국인이 영화로 기억하듯, 다양한 실험과 끝없는 공연 일정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조용필 같은 이도 언젠가 영화로 기록되면 좋겠다. 영화강국 한국이 언제 괜찮은 음악 영화 한 편 만들어낼까. 카메라를 들썩이는 어지러움이 세련된 영상미로 간주되고, 음악에 집중하지 않아야 음악이 인기를 얻는 현실에선 춤자랑 곁들인 아이돌 스타를 염두에 둔 기획서가 제작사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진짜 좋은 걸 만들 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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