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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앞에서 부끄럽다

등록 2004-05-28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font color="maroon">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혁명가들보다 더 비타협적으로 군대를 거부했던 그들의 정신 덕분에 결국… </font>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5월21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렬 판사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유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 4명 중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부 수립 이래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만여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낸 끝에 나온 새로운 판결이다. 획기적인 판결이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이번 판결은 1심 판결로 아직도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거쳐야 하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해결이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오욕’의 사법부 역사를 떠올리다

나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1971년 사법파동 이래 한국의 사법부가 걸어야 했던 ‘오욕’- 전두환 시절 대법원장을 지낸 이영섭씨가 퇴임사에서 한 표현- 의 역사가 떠올랐다. 한국의 사법부는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는 시민들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욕의 길을 걸어왔고, 안팎에서 사법 개혁을 촉구하는 소리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말만 할 뿐 제대로 응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 법관이 진짜로 판결로 말해버렸다. 시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사법부가 이제 인권의 최후 보루로 거듭나려 한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의 자유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정황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50여년간 진행된 재판에서도 번번이 이런 정황 논리로 헌법적 권리인 양심의 자유가 무시돼왔다. 이번 판결은 정황 논리 이외에 변변한 헌법적 근거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의 판례를 깨고,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기초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헌법이 장식품처럼 듣기 좋은 말만 나열해놓은 사문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권리장전임을 일깨워준 명판결이다. 아마도 한국 사법 사상 이번 판결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권을 옹호하고 신장하는 데 기여한 판결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남성 판사들은 대개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군법무관으로 내딛게 된다. 군법무관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총거부자들을 항명죄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사건도 공소장이 한 페이지는 된다지만, 집총거부자들의 공소장은 다섯줄 정도였다고 한다. 한 사람을 3년 정도 감옥에 처넣는 판결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분여. 누구에게나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 있게 마련이지만, 아마도 한국의 법관들 대부분에게 군법무관 시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너무 쉽게 처벌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양심의 자유의 너무도 명백한 헌법적 근거와 아울러, 아마도 이 점이 보수적인 법원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한 사회 일반에 비해 좀더 열려 있는 입장을 보여오게 한 것은 아닐까?

이 땅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는 60년이 넘지만,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불과 3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2001년 2월 345호에서 약 1600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투옥돼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까지,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했다. 이 기사를 보고 많은 인권운동가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부끄러워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총을 거부해서 감옥에 간다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리는 이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0년대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해결과제는 비전향 장기수였다. 비전향 장기수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는 ‘빨갱이’가 아니었던가?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한국의 인권운동에서 당면 핵심과제로 떠오른 것은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인권의 보편성이 적용돼간 과정을 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징역을 살아야 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빨갱이’보다도 더 못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다음에야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주의·군사주의·권위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야말로 ‘왕따’를 당해왔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내면의 명령에 따라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집총을 거부해왔다. 친일파들이 경영자로 등장한 대한민국에서 사상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차라리 경멸의 대상이거나 위험물이었다. 비단 친일파들만이 아니었다. 양심과는 거리가 먼 비도덕적인 자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너무 일찍 ‘전술’에 눈을 뜨며 약아져갔다. 그 시절 사람들은 경찰에 잡혀가면 대부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반성문이나 각서 쓰고 ‘훈방’되는 데 익숙했다. 그런 우리에게 전향서라는 ‘그까짓 종이 한장’ 쓰지 않고 수십년 감옥에 앉아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이나, 눈 딱 감고 4주 군사훈련 받으면 병역특례로 빠지는 길이 널려 있는 한국에서 3년의 징역을 택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존재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호와의 증인, 1930년대부터 시련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1930년대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1939년 1월 일본에서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여 투옥됐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광적인 평화론자’로 몰아붙였다. 1939년 6월 일제는 일본, 대만에 이어 조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단행했다. 조선에서 체포된 여호와의 증인은 38명이었는데, 당시 교세가 미약했던 여호와의 증인 거의 전원이 체포됐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중 5명은 옥사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선 사람은 33명이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많은 민족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일제의 탄압 아래 무릎을 꿇었고, 또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좋은 목사님들도 믿음에 상처를 입었다. 해방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서 비전향을 견지하고 있다가 옥문을 나선 사회주의 혁명가는 2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33명이 비전향으로 옥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지 않고 총을 들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른 것이 이른바 등대사(燈臺社) 사건이다. 이 일을 두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적 믿음을 지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말하지만, 정부가 편찬한 독립운동사 서적에는 등대사 사건이 항일운동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의 별집은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카드를 모아놓았는데, 여기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진이 첨부된 신상기록카드가 여러 장 수록됐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일제강점기나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한 행동은 독립운동으로 찬양받고, 군사독재 시절에 한 행동은 반국가사범으로 처벌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치는 여호와의 증인들 수천명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고 “국법을 준수하고 손에 무기를 들고 조국을 방어”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서명 강요라는 형식은 없었다 뿐이지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그리고 노무현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똑같은 논리를 강요하며 처벌하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고, 그리고 민주화가 되었다는 마당에 아들은 ‘민주화된’ 감옥에 여전히 간다. 남부지법의 판결이 있던 2004년 5월21일까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여전히 일제강점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헌병대 입창중 맞아죽은 청년

일본의 극우파들이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군인’이라 찬양한 박정희가 다스리는 병영국가에서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병역기피율 0% 프로젝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최고의 걸림돌이었다. 1975년 2월18일 병무청장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종교적인 양심을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일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계몽 선도하기 위하여 그들 대표자와의 간담회를 개최”했다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대표들이 “일부 신도의 병역기피 행위는 그릇된 소행”임을 인정했고, “병역기피 방조 등을 하지 않고 병역의무자의 의무 이행을 권유”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이 보고는 허위였다. 2001년까지 아무런 소리소문 없이 매년 수백명씩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견지해온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역거부가 “그릇된 소행”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허위보고를 올린 병무청이나 군당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역기피율 0%를 달성하기 위해 징역을 살고 나오는 사람들- 1970년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징역을 살고 나와도 영장이 계속 발부됐다- 이 채 교도소 문을 나서기 전에 병무청 직원들은 이들을 입영통지서도 없이 다시 잡아가 총을 주고 다시 거부하면 재판에 회부하는 악랄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교도소 문 앞에서 가족이 기다리는데 손 한번 잡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잡아가야 할 절박한 사연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분위기에서 맞아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남 거제 출신의 이춘길이라는 청년은 1976년 3월19일 39사단 헌병대에 입창 중에 구타로 인한 비장 파열로 사망했다. 군 당국이 취한 조치는 그의 장례에 부대장 명의로 부조금 1만원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살벌했던 유신시대에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홀어머니는 진상조사니 배상청구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식이라는 청년도 집총을 거부하다가 논산훈련소에서 맞아 죽었다. 군복무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병역거부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일부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한다. 병무청에서는 “양심적 병역기피”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급격히 늘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복무 판정 절차를 잘 세운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병역기피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 늘어날 것에 대한 걱정은 정말 기우이다.

병역기피 악용, 걱정 안해도 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2001년 12월 이래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씨에서부터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던 사람이 총을 들 수는 없다고 선언한 초등학교 교사인 최진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명의 병역거부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 중 한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청년이다. 그에게 왜 여호와의 증인을 포기했으며, 그런데도 감옥에 가야 하는 병역거부는 하려고 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 20대 청년으로서 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자니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만은 어릴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평화 신념만은 지키고 살아야 하겠기에 감옥을 가더라도 병역거부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답답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한 여호와의 증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과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시기상조일까? 대한민국은 이미 50년에 걸쳐서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다. 이미 남북간의 국력과 군사력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 오래이다. 3대에 걸쳐 감옥에 가야 했던 50년이 시기상조라면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흘러 저들의 증손자, 고손자까지 감옥에 보내야 대체복무제 도입을 고려해볼 수 있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꺼리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미 지난 30년간 많게는 15만명, 적게는 7만여명을 방위, 공익근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체 특례요원 등 각종 명목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해왔다. 내가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라는 조금 긴 이름을 가진 단체가 대체복무제도의 ‘도입’ 대신 ‘개선’이란 단어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일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든가,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할 수 없다면 지난 30여년간 수만명씩 대체복무제도는 어떻게 운영해왔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포함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실시- 기존의 대체복무제도와의 차이는 4주간의 군사훈련 대신 4∼6개월 복무기간을 연장하는 것- 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세계 10위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한국이, 이북의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는 한국이 돈이 없어서 육군사병들에게 똑같은 전투복 팔 접어 입다가 펴서 입게 하면서 사계절을 보내게 하였겠는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입영 대상자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군 당국은 우수한 인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태까지의 말도 안 되는 복무 여건을 신속히 개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서울남부지법의 판결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문제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 종교의 신앙의 자유 차원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들까지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양심의 자유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로 토론회에 여러 번 나가봤지만, “그럼 저 사람들을 계속 감옥에 보내자는 말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식으로든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토론자들도 없었다. 이제 많이 처벌했으니 “봐줄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기분에 따라 봐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핵심적인 요소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낯선 권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논하도록 하겠지만, 지금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오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들은 지금부터 100여년 전만 해도 다 금지된 것들이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하더라도 어디 감히 대궐보다 높이 집 지을 궁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낡은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쩌면 숨쉬는 것만 빼고는 모두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100년전엔 ‘아파트’도 금기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라 너무 늦은 것이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아직 30여 나라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만큼 많은 사람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나라는 찾을 수 없다.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 중에서도 실제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5개국에 불과하고, 수감자 수도 다 합쳐야 70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처음 문제제기될 때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의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자를 합친 것의 7배가 넘는 사람들을 가둬두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가? 남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거부하는 행위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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