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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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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줄기의 빛

출입국청, 신청자 중 0.4% 이스마일과 하니 단 두 명만 난민으로 인정하는 결과 발표…

<한겨레21>은 6월 말부터 #난민과함께 기획 연재
등록 2018-12-22 04:29 수정 2020-05-02 19:29
끈질기게 끝까지
2018 보도 그 뒤

전 대한항공 승무원 K씨가 백혈병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는 보도는 또 다른 승무원이 산재 신청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긴 싸움의 출발선에 선 K씨는 마침내 승리로 이끈 삼성전자 반도체의 황유미씨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국 사회는 제주에 온 수백 명의 예멘 난민을 일찍이 보지 못했던 호들갑으로 맞았다.
제주 외국인·출입국청으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스마일(30). 이스마일은 예멘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박승화 기자

제주 외국인·출입국청으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스마일(30). 이스마일은 예멘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박승화 기자

“저희 언론사 소속 기자들과 직원들은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위협이 점점 커져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게 됐음을 알립니다. 독자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2015년 8월6일 예멘의 올라신문사가 페이스북에 발행인 이름으로 올린 마지막 글이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 있는 올라신문사는 지금까지 3년이 넘도록 기사를 내지 못했다. 2014년 후티 반군이 예멘 행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으로 내전이 격화된 뒤로 신문사는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15년 5월5일 게시된 글을 보면 신문 발행 비용이 두 배로 치솟으면서 신문사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토로했다.

2018년 상반기 언론인 8명이 예멘에서 숨져
후티 반군에 납치됐다 1년 만에 풀려났지만 지난 6월2일 목숨을 잃은 예멘 언론인 라칸. 오른쪽은 석방된 뒤 숨을 거두기 직전 모습. 국경없는기자회 누리집

후티 반군에 납치됐다 1년 만에 풀려났지만 지난 6월2일 목숨을 잃은 예멘 언론인 라칸. 오른쪽은 석방된 뒤 숨을 거두기 직전 모습. 국경없는기자회 누리집

전쟁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으면서 소속 기자였던 이스마일(30)의 삶도 닫혔다. 그는 과 나눈 대화에서 “주변에 20개 가까운 언론사가 문을 닫았고, 80명 넘는 기자가 후티 반군에게 납치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감옥에 끌려갔고, 또 일부는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예멘 내전이라는 악몽은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이스마일의 꿈을 빠르게 몰아냈다.

이스마일은 신문사가 문을 닫은 뒤 거리로 나섰다. 그는 수천 명이 참가하는 반전 시위에서 연설했다가 후티 반군 관계자에게 수차례 “시위를 계속하면 납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후티군의 ‘납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지난 6월2일 ‘프레스 카드’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후티 반군에 납치된 기자 라칸은 1년 만에 석방됐지만 며칠 만에 숨을 거뒀다. 라칸의 가족들은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고문과 질병, 굶주림으로 몸이 망가져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예멘언론인연합(YJS) 쪽에 설명했다. 이스마일은 “6월에는 동료 기자였던 압두르만도 후티 반군 감옥에서 1년 만에 풀려났지만 2주 지나 죽었다. 너무 슬펐다. 군대에 억류됐다가 사우디 연합군의 폭격에 목숨을 잃은 친구도 많다”고 했다.

두려웠던 이스마일은 2016년 집을 떠났다. 친구, 가족과 연락을 끊었고 페이스북 계정을 지웠다. 모든 흔적을 지운 그는 후티 반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숨어 지냈다. “예멘 밖은 21세기이지만 예멘은 16세기 같았다. 늘 어둠 속에 지내야 했고, 빛을 보지 못해 힘들었다.” 그는 결국 2017년 예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예멘의 언론인에게 선택지는 ‘죽음’과 ‘떠남’ 둘밖에 없었다. 이스마일은 아르메니아와 말레이시아를 거쳐 지난 5월, 제주도로 들어와 난민신청서를 냈다.

이스마일은 예멘을 떠났지만 예멘에서 언론인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9월16일(현지시각) 예멘 내에서도 격전지로 꼽히는 호데이다 지역에서는 사우디 연합군이 떨어뜨린 미사일이 라디오 방송사에 떨어져 방송사 관계자 셋이 죽고 인근에 있던 일반 시민들도 목숨을 잃었다. 후티 반군과 관계있는 언론사는 사우디 연합군의 폭격 대상으로 간주돼왔다고 예멘언론인연합은 주장한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예멘을 세계에서 언론 자유가 가장 위협받는 위험국(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멕시코) 넷 중 하나로 꼽는다. 예멘은 국경없는기자회가 평가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180개국 중 167위를 차지했다.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미사일 폭격과 언론인 구금·암살 시도가 잇따르는 예멘에서 언론 자유를 추구하고, 객관적 보도를 하는 일은 목숨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다.

국경없는기자회가 파악한 자료를 보면 2018년 상반기 전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언론인과 언론사 관계자 47명 중 8명이 예멘에서 숨졌다. 통신시설을 장악한 후티 반군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언론사 누리집은 폐쇄했고, 최근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활동하는 ‘시민 기자’들의 게시물도 광범위하게 감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난민 인정받으면 가족 초청 가능해

이스마일은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왔지만 한국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제주도 내 시민사회와 종교단체의 도움에 의지해 7개월을 버텼다. 그리고 12월14일 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올라신문사의 기자였던 이스마일과 일간 의 기자였던 하니(37), 두 명을 난민으로 인정했다.

하니가 일했던 신문사 샤리아도 올라신문사와 같은 시기에 문을 닫았다. 하니는 언론사가 문을 닫은 뒤에도 SNS를 통해 후티 반군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그는 2016년 5월 예멘 정부군에게 납치돼 고문당했다. 정부군은 후티 반군과 싸우지만 언론을 위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언론 자유는 정부군과 반군 모두에게 불편했다. 하니는 시민단체와 언론인 보호단체의 도움으로 풀려났지만 정부군의 감시는 계속됐다. 미행을 따돌리며 도망 다니던 그도 예멘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 와 난민 신청을 했다.

이스마일과 하니는 난민 인정 발표 직후 제주도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하니는 단 두 명만 (법적)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에 안타까워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니 힘들기도 하다. 현재 전쟁으로 예멘 상황은 아주 힘들다. 안타깝다.” 영어와 한글 공부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니는 “가족들이 예멘에서 힘들게 살고 있어 한국으로 초청하고 싶다.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난민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받으면 ‘인도적 체류 지위’와는 달리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이스마일은 과 한 통화에서 “법적으로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기쁘다.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고통받아 지쳐 있던 그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는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하 출입국청)이 언론 인터뷰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며 난민 인정 결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다만, 난민 인정 이전에 과 수차례 만나 나눴던 대화를 기사화하는 것은 허락했다.

단순 불인정 56명 이의신청 계획

12월14일 출입국청은 이스마일과 하니, 단 두 명만 (법적)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난민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1차 발표(9월14일), 2차 발표(10월17일)에 이어 세 번째다. 출입국청은 난민 심사 결과 발표가 보류됐던 85명에 대해 “완전히 출국해 심사를 종료한 11명을 제외한 74명 중 2명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50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를 인정한다. 22명은 단순 불인정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인도적 체류 지위 부여와 단순 불인정 사유는 앞선 2차 발표와 비슷했다. 출입국청은 “난민협약과 난민법상 난민 인정 요건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추방할 경우 예멘의 내전 상황 등으로 인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 인도적 체류 허가를 주고, 제3국에서 안정적인 정착이 가능하거나 국내 체류가 부적절한 사람에 대해서 단순 불인정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올해 제주도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중 출도가 제한돼 제주도에서 난민 심사를 받은 484명의 난민 심사가 모두 끝났다. 13명은 한국을 떠나 심사가 직권종료됐고, 412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 56명이 단순 불인정을 통보받았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하고 면접을 봤지만 이들의 운명은 ‘난민, 인도적 체류, 단순 불인정’ 세 갈래로 나뉘었다.

두 명만이 난민 지위를 받은 것에 예멘인들은 실망하면서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3차 발표에서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받은 무함마드(가명)는 “후티 반군의 징집을 피해 한국으로 온 사실이 예멘에 알려지면서 체포 영장이 떨어졌고, 이런 사실을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법적) 난민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실망스럽다”고 했다.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은 또 다른 예멘인 아흐마드(가명)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은 것은 감사하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건 아쉽다. 전쟁을 피해 왔고,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은 언론인 두 명만이 아니다”라고 했다. 인도적 체류도 사실상 난민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2차 발표에서 인도적 체류를 받은 예멘인 중 14명은 난민 심사 결과 발표에 이의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 단순 불인정을 통보받은 예멘인 56명은 모두 이의신청을 할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고 제주도를 떠날 수 있게 된 예멘인들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제주도를 떠나고 있다. 이들은 중소 규모 공장이 많은 인천·경기, 대기업 조선소가 있는 부산·울산, 그리고 전남 목포 등 크게 세 지역으로 흩어졌다. 목포의 대기업 조선소에 일자리를 구한 압둘라(가명)는 “제주도에 있던 예멘인 100여 명이 함께 이곳 목포 조선소로 왔다. 대형 선박에 페인트칠을 한다”고 했다. 압둘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업과 돼지고기 식당 외에는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제주도보다는 상황이 나아 보였다.

“내전이나 피신은 가장 일반적 난민 보호 사유”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지 못하고 단순 불인정 판정을 받은 예멘인들은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제주도를 떠날 수 없고, 언제까지 일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월25일 출입국청으로부터 ‘불인정’을 통보받은 누르(28)는 결국 아내 파티마와 아들 술탄을 떠나보냈다(제1236호 ‘불허와 허가, 엇갈리는 운명’ 참조).

남편을 두고 제주도를 떠난 파티마는 “체류 허가 기간을 하루 남겨둔 12월1일 술탄과 함께 바레인으로 왔다. 너무 슬펐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누르는 난민 심사 결과에 대한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행정소송까지 하면서 머물 수는 있지만, 언제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내 난민 관련 시민사회는 예멘인 난민 신청자 중 0.4%인 2명만 난민으로 인정하고, 56명에게는 인도적 체류 지위도 주지 않은 것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출입국청의 발표가 있었던 12월14일 성명을 내고 “유엔난민기구가 2015년 발표한 ‘예멘 귀환에 관한 입장’에 따르면 예멘 난민 신청자들은 강제송환을 할 수 없고, 내전이나 피신은 가장 일반적인 난민 보호 사유다. 법무부가 밝힌 불인정 사유가 난민법과 난민협약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난민인권네트워크도 성명서를 내고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협소한 인정 기준으로 비판받았던 기존의 낮은 난민 인정률보다 더 낮은 난민 인정률이고, 예멘의 엄혹한 정황을 고려해도 부당한 결정이다. 난민인권네트워크가 구성한 변호인단은 부당한 처분을 받은 난민에 대한 법률적 조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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