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과 25일. 수요일과 목요일 사이 예멘 난민 373명의 운명은 크게 두 갈래로 엇갈렸다.
예멘인들은 올해 초부터 무사증입국제도를 통해 제주도로 들어왔고, 난민 신청을 한 뒤 제주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지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애초 예멘인들은 난민 인정 여부에 따라 희비가 갈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부는 난민으로 인정돼 직계가족까지 한국에 데려와 ‘준시민’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예상은 ‘난민인정자 0명’이라는 결과로 산산이 부서졌다.
대신 예멘인들의 운명은 예상치 않던 ‘인도적 체류’로 갈렸다. 339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앞서 9월에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23명도 마찬가지다. 이들과 달리 인도적 체류 지위마저 받지 못한 34명은 언제 ‘출국 명령’을 받을지,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뺏길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난민 불인정 이후 이의 제기나 행정소송 과정에서 결론을 뒤집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이들을 더욱 좌절하게 한다.
11월1일 현재 아직 심사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85명은 안도와 절망이 교차하는 풍경을 목도하면서 극도의 불안에 떨고 있다. 제주도에서 만난 한 예멘인은 “난민 심사 결과 발표 전에는 모두가 함께 고통을 이겨낸다는 연대감이 있었다. 최근에는 인도적 체류자와 단순 불인정자로 갈리면서 공동체가 분리되는 듯한 묘한 기류가 있다”고 했다.
이 단순 불인정자들을 취재한 결과 ‘제3국에서 체류 가능성’과 ‘외국 국적을 가진 가족’을 이유로 불인정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예멘인들은 “가족이 외국 국적을 갖고 있어도 갈 수 없고, 지구상에서 예멘인들이 갈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갈 수 있는 곳이 없는데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고 떠난 사람이 3명이다. 난민 신청을 하려 했지만 난민 심사 과정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예 신청을 하지 않은 채 제주도를 떠난 예멘인들도 있다.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의 운명과 상관없는 걸까. 지난 6월18일 예멘의 후티 반군이 올린 영상에서 한국산 무기가 발견됐다. 한국산 무기가 쓰이는 전쟁터에서 온 사람을 난민으로 한 명도 인정하지 않고, 일부에게는 인도적 체류조차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font>
‘010-××××-×××× 성환역 1번 출구.’
서울 구로구의 한 직업소개소를 찾은 예멘인 지야드(28)는 먼저 일자리를 소개받은 친구의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주일 전 제주를 떠나온 예멘인 7명 중 4명이 먼저 일자리를 찾았다. 종이 한 장을 받기 위해 일자리를 소개받은 지야드의 친구들은 알선비로 한 명당 12만원씩 총 48만원을 소개소에 내야 했다. 이들이 대림역에 도착하자마자 현금인출기를 찾은 이유다. ‘돈을 벌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돈을 쓰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 직업 알선비만 내고 사기를 당할지도 몰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울로 온 예멘 난민</font></font>이들이 무작정 이곳을 찾은 건 아니다. 앞서 9월14일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고, 서울에 먼저 왔던 예멘인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놓고 7명이 머리를 맞댄 결과였다. 이곳이 아랍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판단했다.
“여기로 가서 전화해.” 직업소개소 아주머니가 퉁명스럽고 짧게 툭 던지듯 말했다. 지야드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서로 갈 길을 찾아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지난 6월14일과 18일 두 차례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이하 출입국청)에서 열렸던 예멘인 직업소개 행사는 인간적인 편이었다. 고용주들과 마주해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도 들었다. 대림역 직업소개소에선 아무런 정보를 들을 수 없었다. 출입국청 공무원은 근로계약서를 꼭 쓰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고용주들에게 당부했다. 직업소개소 아주머니는 출입국청 공무원과 달랐다. 알선비에만 관심 있어 보였다.
“인천 지역 쇠공장에 가서 일하게 될 것 같다. 공장에 가면 사장님이나 관리자가 우리를 나쁘게 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제주도에 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몇 번 봐서 걱정된다.” 일자리를 구했다는 안도와 긴장이 묘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지야드가 말했다.
지야드는 난민 신청을 한 뒤 제주 바다에서 어선을 탔지만 한 달 전쯤 실업자가 됐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일거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그에게 미안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자리를 잃고 제주 시내로 돌아간 지야드는 성당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묵으며 난민 심사 결과가 발표되기만을 기다렸다.
지야드의 기다림을 한국 정부는 외면했다. 단 한 명도 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멘인들은 동요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지야드는 실망했다. 제주 출입국청은 “대신 인도적 측면을 고려해 체류를 허가한다”며 인도적 체류를 허락했다.
난민 불인정 결정에 대해 지야드는 “아무리 스스로 난민이라 생각해도 한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난민 심사 결과를 들은 예멘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중론은 일단 한국에서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으면 이의제기나 행정소송 과정에서 뒤집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 많은 돈과 시간이 든다는 것도 지야드가 이의제기를 망설이게 했다. “그 노력으로 차라리 일을 찾고 살 방도를 궁리하는 게 나을 거야.” 무리 중 누군가가 말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 지야드는 이의제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 전 오전, 지야드는 인도적 체류 통보를 받자마자 제주도를 떠났다. 인도적 체류는 난민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난민 신청자의 국가가 예멘처럼 전쟁으로 안전하지 않을 경우 일시적으로 체류를 허락하는 조처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을 데려오고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인도적 체류 지위는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만을 보장한다. 4월30일 이후 제주도에 들어와 난민 신청한 예멘인들은 심사가 끝날 때까지 제주도를 떠날 수 없었지만 심사가 끝나면서 출도 제한이 해제됐다.
6개월 만에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야드는 해방감과 약간의 흥분감을 느꼈다. 섬을 떠나 대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5월1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주도로 처음 올 때는 극도의 두려움에 떨었다. 공항경찰과 출입청 직원들은 그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인도적 체류 허가와 불허의 차이 </font></font>이번엔 달랐다. 공항 관계자들은 이들이 제주도를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오쯤 제주도를 떠난 비행기가 인천 상공에 있을 때 지야드는 창밖 풍경에 압도됐다. 태어나서 본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큰 서울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 만난 지야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할 수 있게 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하다. 우리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있지만 잘못 알려진 것이 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조용히 일하며 지내다 전쟁이 멈추면 언제든 예멘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 예멘인 단체숙소 등을 통해 파악해봤더니 지야드처럼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고 제주도를 떠난 사람은 100명이 훌쩍 넘은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 적절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시민사회의 도움에 의지했던 이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아 출도 제한이 해제됐음에도 제주에 머물기로 결심한 예멘인들도 있다. 이합(22)과 바삼(30)이 그렇다. 10월31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의 한 귤농장에서 만난 이들은 갓 딴 귤 상자를 옮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 6월부터 농장에서 일한 이들은 “이미 제주 생활에 적응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으로 떠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했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귤 수확은 다음해 1월 말까지 계속되고 이후에는 당근밭, 무밭, 그리고 김장철 작업까지 이어진다. 한동안 일이 끊길 걱정은 없다. 농장 관계자는 “지난주까지 예멘인 14명이 일했는데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고 12명이 제주도를 떠났다. 몇 개월 사이에 정이 깊이 들어 헤어질 때 눈물이 났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형제의 엇갈린 운명</font></font>“타국에서 장기간 취업하며 거주했던 자로서 급박한 위험을 피해 입국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해볼 때 신청인에게는 난민 인정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제주 출입국청에서 ‘난민 불인정 결정 통지서’를 받아든 압둘카위(34)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큰 충격이었다.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을 거라고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다. 출입국청은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도적 체류 지위도 주지 않은 예멘인들을 ‘단순 불인정자’라고 불렀다. 단순 불인정자 신분이 된 압둘카위(34)는 무작정 출입국청을 나와 걸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문이 닫히고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 8시였다. 어둑한 밤길을 걸어 한림의 어촌으로 되돌아왔다.
압둘카위는 자신보다 5살 어린 친동생 오마르(29)와 함께 어선을 탔다. 주로 고기잡이 그물을 당기는 일을 했다. 이들은 6월14일 일자리 알선 행사에서 고용주를 만나 한림으로 간 뒤 최근까지 계속 일한 몇 안 되는 예멘인이다. 압둘카위는 “6월에는 한림에 예멘인 100여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10명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고된 바닷일을 견디지 못한 예멘인 대부분은 일을 포기했다.
압둘카위는 한번 바다에 나가면 길게는 10일씩 뭍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뱃일이 버거웠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20시간씩 그물을 당기는 날이면 손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멘에 있는 아내와 태어난 지 2년6개월 된 딸 생각으로 버텼다. 그렇게 일해 500만원 정도를 모았고, 그 돈의 반을 예멘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다. 그에게는 난민으로 인정받아 아내와 딸을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이 한번에 무너져내렸다.
출입국청에서 전화가 왔던 10월30일 화요일 오후에도 압둘카위는 바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입국청과 통화한 선장이 “내일(수요일) 출입국청으로 가봐”라고 했다. 압둘카위 형제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게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 사이 출입국청에 가는 예멘인들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이들은 고된 바닷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가서 공장에 취직하자고 이야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배 일을 했던 압둘카위는 한국의 벽지 공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한국의 벽지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압둘카위는 자신의 이름을 인도적 체류자 명단에서 찾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입국청은 선장에게 동생 오마르를 보내라고 했는데, 당연히 형제가 같이 가는 줄 알았던 선장은 둘 모두를 보낸 것이다.
난민 인정과 불인정의 차이도 컸지만, 인도적 체류 허가와 단순 불인정의 차이도 컸다.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받으면 비록 가족을 데려오지는 못하더라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정적으로 한국에서 살 수 있다. 일해서 번 돈을 고향으로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 불인정 통보를 받으면 일하기도 어렵고, 언제 출국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누르 가족에게 필요한 한 문장</font></font>“동생은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았는데 왜 당신은 받지 못했어?” 예멘에 있는 아내가 압둘카위에게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사우디에서 5년 가까이 일했지만 동생과 거의 같이 다녔다. 한국에 올 때도 같이 왔는데 왜 동생은 되고 나는 안 되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했다. 압둘카위는 자신의 여권이 오래돼 외국을 다닌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단순 불인정을 받은 게 아닌가 짐작만 한다. 동생은 전쟁 직전 새 여권으로 바꿔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것 말고 다른 차이점은 찾기 힘들었다.
압둘카위는 “모든 예멘인은 위험에 처해 있다. 예멘으로 돌아가면 언제 전쟁터에 끌려갈지 모른다. 일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충분치 않다. 한국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인도적 체류 지위를 달라”고 했다.
“배우자와 자녀의 국적국에서 안정적 체류가 가능해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해 불인정한다.”
‘난민 불인정 결정 통지서’를 읽은 누르(28)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난 6월 버스에서 주운 지갑을 경찰서에 갖다 줬던 그(‘혐오에 선행으로 답하다’(제1219호) 참조)도 단순 불인정 결정을 받았다. 누르는 전날 출입국청의 전화를 받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목요일에 출입국청으로 가는 예멘인은 ‘단순 불인정’ 통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레인 국적의 아내 파티마(20)는 그런 남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태어나 석 달이 지난 아들 술탄을 보자 더 큰 슬픔이 몰려왔다.
파티마는 미국 앨라배마 지역에서 공부하며 7월28일 아들 술탄을 낳았다. 술탄이 미국 여권을 가진 이유다. 파티마는 서울을 거쳐 9월2일 제주로 왔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술탄은 처음 아빠를 만났다. 누르 가족의 목표는 ‘가족이 함께 있는 것’ 하나였다.(이번 호 표지 사진은 누르 가족이 10월31일 제주시에서 찍은 것이다.)
파티마는 국립 제주대를 찾았다. 대학교에 등록해서 학생비자를 받으면 남편과 함께 제주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학업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를 내밀었지만, 제주대는 “아랍권 학생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서울 지역에는 대학이 많기 때문에 누르 부부는 일단 인도적 체류라도 받으면 서울로 가서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누르가 단순 불인정자가 되면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과 만난 누르 부부는 “현재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한국뿐”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누르는 결혼식을 올릴 때도 아내의 고국인 바레인에 2주밖에 머물지 못했다. 최근 다시 체류가 가능한지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들 술탄의 국가인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예멘인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됐다. 예멘은 더더욱 위험했다. 파티마는 “예멘의 후티 반군과 싸우는 사우디 편에 미국과 바레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멘에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파티마와 술탄의 체류 허가 기간인 3개월이 끝나가고 있다. 파티마 모자는 12월2일까지 한국을 떠나야 한다.
“나는 가족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가족은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아빠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인도적’인 게 아니라면 무엇이 인도적이라는 말인가.” 누르가 절규하듯 말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걸고, 이의신청서를 법무부에 낼 예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단순 불인정자 구제해야</font></font>지야드와 누르처럼 단순 불인정자들에 대해 난민네트워크는 “인도적 체류를 허락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난민네트워크는 난민인권센터와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지부, 인권법 단체 등으로 구성됐다. 법무부가 최근 예멘 난민을 한 명도 인정하지 않고 34명의 단순 불인정 결정을 발표한 뒤, 난민네트워크 소속 변호사들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태스크포스에 속한 변호사는 “단순 불인정 사례를 분석해보면 (지야드와 누르처럼) 3국에서 오래 살다 왔거나, 외국인 배우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법에선 이것이 난민 불인정 이유로 명시돼 있지 않다. 게다가 누르처럼 외국의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경우라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제주=<font color="#008ABD">글</font> 이재호 기자 ph@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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