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7일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 20명에 가까운 보좌진이 유심히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직원들이 준비해온 ‘업무보고’ 내용을 검토하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보좌진이었다. 나흘 뒤 열릴 20대 국회의 첫 복지위 회의를 앞두고 보좌진이 식약처로부터 먼저 주요 업무보고를 듣는 비공식 설명회였다. 의원들이 식약처에 공식 질의를 하기 전, 부족한 내용의 보완을 지시하거나 추가 자료를 요청하기 위한 자리였다.
소비자는 ‘완전표시제’ 도입 요구식약처 보고서를 넘기던 ㅇ보좌관(더불어민주당)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국회에서 핫이슈인 유전자변형식품(GMO) 표시 (관련) 보고를 이렇게 간단히 해오면 어떡해요!”
보고서엔 GMO 표시제와 관련해 ‘유전자변형 DNA 또는 단백질이 남아 있는 경우 유전자변형식품 표시를 주요 원재료에서 모든 원재료로 확대 추진’한다는 내용이 달랑 두 줄 적혀 있었다. 이미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식품위생법 개정안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법 개정 이후 6개월간 벌어진 일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ㅇ보좌관은 “복지위 회의에선 GMO 표시제에 관해 전반적으로 보고해야 한다”며 준비를 신신당부했다.
복지부 보좌진이 식약처에 보고를 요청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GMO 표시제 확대에 대한 식약처의 명확한 입장이다. 식약처는 지난해 12월 개정된 식품위생법에 따라 지난 4월21일 하위 시행 기준인 ‘유전자변형식품 등의 표시기준 일부개정 고시’를 행정예고했다. 개정 식품위생법에 맞춰 개정된 고시는 GMO 표시 대상을 ‘상위 5개 주요 원재료’에서 ‘모든 원재료’로 확대했다.
그러나 ‘제조·가공 후 유전자변형 DNA 또는 단백질이 남아 있는 경우’라는 예외조항은 그대로 남았다. 이렇게 되면 간장, 식용유 등은 여전히 GMO 함유 여부를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소비자 단체들은 유럽연합(EU)처럼 GMO를 원료로 하는 모든 식품에 표시를 의무화하는 ‘완전표시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지만 주무 부처인 식약처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여왔다.
둘째, 식약처가 국회와 상의도 없이 이번 고시에 ‘비유전자변형식품(Non-GMO)·무유전자변형식품(GMO-Free) 표시 제한 규정’을 신설한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이다. 입법예고된 고시는 콩(대두)·옥수수·카놀라(유채)·면화·사탕무·알파파 등 6개 GMO 표시 대상이 아닌 농산물·가공식품에 비유전자변형식품, 무유전자변형식품 표시를 하지 못하도록 못박았다. 상위법인 식품위생법에도 없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일부 생활협동조합이나 식품업체는 다양한 국내산 식품에 무유전자변형식품 표시를 해왔다. 부실한 GMO 표시제를 보완하는 나름의 안전 대책이었다. 그런데 이번 식약처의 뜬금없는 고시로 자발적 노력이 처벌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에 야당 국회의원 30명은 “고시를 철회하라”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GM연어, GM감자 대책 삭제나흘 뒤인 6월21일, 20대 국회 복지위의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식약처에서 의원들에게 배포한 보고서엔 추가된 내용이 전혀 없었다. 새로 복지위에 배정받은 의원들은 GMO 표시제의 최근 상황을 알 길이 없었다. 정춘숙 의원(더민주)이 문제를 제기했다.
“보좌진과의 업무 설명회 당시 분명하게 ‘GMO 표기 관련 업무보고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사회적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번 업무보고에서 누락시킨 것은 국회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사안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요?” 정 의원은 식약처장의 사과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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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고 누락’도 도마 위에 올랐다. 나흘 전 보좌진 설명회 자료에 있던 ‘GM연어·GM감자 등 미승인 유전자변형식품 시험법 마련’이라는 대목이 복지위 업무보고에선 아예 삭제된 것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조리시 발암물질이 적게 나오는 감자에 이어 성장 속도가 두 배 빠른 연어가 동물로는 처음 식용 판매 승인이 나자, 국내 소비자들의 불안이 커지는 상황이다.
식약처는 의례적인 한 줄짜리 대책마저 나흘 만에 보고서에서 빼버린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뭐든지 GMO 언급은 안 하겠다는 게 식약처 의도 아니겠느냐”고 한 보좌관은 말했다.
여러 지적이 쏟아진 뒤에야, 손문기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GMO 표시제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손 처장은 적어도 내년까지는 완전표시제 논의 자체를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대 국회에서) 개정된 법률안(식품위생법)은 소비자단체나 업계 등 오랜 토의를 거쳐 선택한 사회적 합의였기 때문에 이를 우선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개정 법안조차도 2017년 2월에나 시행될 예정이다.
다만 비유전자변형식품·무유전자변형식품 표시 규제에 대해, 손 처장은 “오늘자(6월21일)로 표시제 (고시) 행정예고가 종료되는데 다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한 달 정도 더 행정예고를 할까 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소비자보다는 식품기업 편에 선 듯한 식약처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법원에서도 국민의 알 권리라고 판단 내린 것을 식약처에서 왜 이렇게 법정 싸움까지 하면서 버팁니까?”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2년 넘게 ‘GMO 수입 현황 관련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벌이고 있는 식약처를 질타했다.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를 명분으로 업체별 GMO 수입 현황 정보 공개를 거부해온 식약처는 1·2심에서 연달아 패소한 뒤에도 끝장을 보겠다며 지난 5월 상고를 제기한 상태였다.
“GMO 관련해서는 식약처가 모든 자료를 다 공개해왔습니다. 다만 특정 업체가 얼마, 몇kg 수입했는지 그 업체명을 공개하는 부분에 있어선 과거의 다른 판례도 있어, 이번 기회에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겁니다.” 손 처장이 차분하게 반박했다. “국민에게 피해가 갈까봐 걱정해야 하는 식약처가 기업에 피해가 갈까봐 그렇게 걱정을 해주어야 합니까?” 윤 의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국민의 편인가 식품업체 편인가식약처의 상급기관인 보건복지부는 이날 “식품위생법, 축산물위생관리법 등 여러 법령에 산재된 식품 표시 관련 규정을 통합하는 ‘식품표시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GMO의 경우 농산물은 농수산물품질관리법, 가공식품은 식품위생법 등으로 관련 법률이 나뉘어 있어 시민사회에서도 통합관리의 필요성은 인정해왔다.
그러나 ‘법 위의 고시’로 논란을 일으킨 식약처가 식품표시법 제정 과정에서 GMO 표시제를 후퇴시키는 꼼수를 부리진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박지호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간사는 “GMO를 비롯한 식품 관련 표시제 가운데 미흡한 것이 너무 많은데 하나하나 해결하려는 대신 뜬금없이 새로운 법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된다”며 “GMO 관련 표시제가 지금보다 더 악화된 방향으로 흘러갈까봐 불안하다”고 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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