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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사라졌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2597건 첫 전수분석. 박근혜, 국가주의 암시하는 ‘애국심’ 출현… ‘민주주의’, ‘자유’와 짝을 이룰 때만 등장
등록 2016-01-20 11:17 수정 2020-05-02 22:17



숫자로 읽는 대통령


① 대통령의 말
② 언론이 그린 대통령


대통령의 ‘말과 글’은 중요하다. 대통령은 글로 국가 어젠다(의제)를 설명하고, 말로 국민을 설득한다. 대통령의 말에는 그의 생각이 드러나고, 그가 보는 세상이 담겨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가 펼치려는 정책의 중요 단서가 숨어 있다. 결국 대통령의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과 글에서 나온다.
언론의 ‘말과 글’도 중요하다.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대중에게 전하는 ‘전령’이다. 말과 글이 뉴스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원래의 언어가 비틀리거나 감춰지기도 한다.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 어젠다와 이념은 언론을 통해 ‘살아 있는 언어’로 구체화된다. 때로 언론은 ‘프리즘’이 되어 새로운 어젠다와 시각을 내놓기도 한다. 언론은 말과 글로 대통령의 정치에 개입한다.
은 1998~2015년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18년 동안 ‘대통령의 말’과 이를 기록한 ‘언론의 글’을 심층 분석했다. 대통령 연설문과 집권 시기 대통령을 언급한 6개 종합일간지 사설 등 총 8만6333건을 살폈다. 데이터 저널리즘 기법을 동원해 글을 단어로 해체하고 ‘레고’ 블록처럼 다시 단어들을 조합해 단순·상대 빈도, 의미연결망 분석 등을 시도했다.
(NYT) 등 미국 언론과 학계는 수백 년치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연설문을 깊이 분석해 기록을 축적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언론의 연설문 분석 보도는 현직 대통령 연설문 몇 개만 분석하거나 역대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만 비교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대통령 기록물과 뉴스 텍스트를 연결해 심층 분석한 것은 의 이번 보도가 처음이다.
한국의 정치 언어는 척박하다. 대통령의 말은 보수-진보 진영논리에 갇혔고, 언론은 갈등과 분열의 언어 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지난 18년 동안 쌓인 기록이 숫자로 말한다. ‘숫자가 말하게 하라’. 데이터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숫자를 통해 첫 번째는 대통령을, 두 번째는 언론을 말하겠다.
취재 황예랑·김효실·이완 기자, 편집 정은주 기자, 디자인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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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  읽는  방법


위 그림에는 모두 70개의 단어가 등장한다. 왼쪽에는 이른바 ‘진보’ 정권이라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많이 쓴 단어가, 오른쪽에는 이른바 ‘보수’ 정권이라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많이 쓴 단어가 놓였다. 노란색 비중이 클수록 ‘진보’, 빨간색 비중이 클수록 ‘보수’ 대통령이 주로 쓴 단어라는 뜻이다.
대통령들이 선호한 단어가 어떻게 달랐는지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다음 과정을 거쳐 단어를 분류했다. 먼저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쓴 단어의 횟수를 헤아려 총 500차례 이상 언급된 234개 단어를 추려냈다. 그중에서 ‘국민’ ‘정부’ ‘경제’ ‘협력’ 등 모든 대통령에게 공통적으로 많이 등장하거나, 각 대통령 간에 쓰임 편차가 크지 않은 단어는 제외했다. 그다음엔 언급 횟수가 많으면서도 각 대통령마다 ‘특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단어만 골라냈다.
예를 들어 ‘평화’라는 단어는 총 4309번 언급됐다. 이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91번, 노무현 전 대통령은 1382번 ‘평화’를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464번, 박근혜 대통령은 372번이었다. 이 횟수와 각 대통령이 쓴 전체 단어에서 ‘평화’가 차지하는 비중 등을 따져 ‘상대빈도’를 다시 구했다. 원그래프 속 크기는 ‘상대빈도’를 뜻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쓴 단어 횟수는 임기 2년8개월치라는 점을 감안해 가중치를 둬서 계산했다. ‘평화’와 달리 ‘국민’이라는 단어는 총 1만2587번 쓰여서 언급 횟수 1위였으나 ‘상대빈도’를 계산해봤더니 4명의 대통령이 모두 고르게 썼기 때문에 그림에는 넣지 않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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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는 [ ]다”.

[ ]에는 어떤 설명이 들어가야 할까?

취임 이후 지난 2년8개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은 공식 연설문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총 25번 썼다. 연설문 179건에 촘촘하게 심어놓은 9만4530개 단어(부사·조사 등 제외) 가운데 고작 ‘25’다. 사실상 거의 언급하지 않은 셈이다.

“과거 우리 선배들이 희생을 각오하며 조국과 가족을 위해 보여주었던 애국심을 이제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누고 서로 양보해서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 1월13일 박 대통령이 발표한 대국민 담화문의 일부다. ‘애국심’은 ‘민주주의’보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단어 언급 횟수로 보자면 그렇다. 같은 기간 동안 애국심은 43번 쓰였다. 25번 쓰인 단어로는 민생, 자본, 자동차, 사고 등이 있다. 흔히 쓰지 않는 ‘적폐’(20번)와 비교해도 ‘민주주의’는 홀대받았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애국심, 적폐만 못하]다.

민주주의, 적폐만도 못하다
(왼쪽부터) 1998년 취임사에서 ‘국민의 고통’을 말하다가 울먹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2007년 신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취임사를 낭독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2015년 10월 국회에서 시정 연설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승화 기자, 사진공동취재단

(왼쪽부터) 1998년 취임사에서 ‘국민의 고통’을 말하다가 울먹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2007년 신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취임사를 낭독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2015년 10월 국회에서 시정 연설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승화 기자, 사진공동취재단

이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총 2597건을 분석해본 결과다. ‘민주주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쓴 단어 순위 400위 안에도 속하지 못했다. 다른 대통령은 어땠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26위(1148번 언급), 노무현 전 대통령은 28위(906번 언급)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141위(269번)였는데, 박근혜 대통령만 유독 순위가 낮다. 민주화, 민주, 자유민주주의 등 비슷한 단어를 모두 합쳐도 겨우 63번에 머문다. 이러한 ‘민주주의’ 유사 단어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총 650번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에 나타난 절대적인 말의 양도 적었다. 분석 대상이 된 대통령 연설문의 형태소 총량은 317만670개다. 이 중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23만2025개뿐이다. 다른 대통령들은 90만~100만 개 정도다. 아직 전체 임기 5년을 다 채우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임기 2년8개월치에 해당하는 기간만 맞춰 비교해봐도 김대중(66만6259개), 이명박(58만4991개), 노무현(44만5591개)과 차이가 크다(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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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과는 말을 아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말할 기회를 만들지 않은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기자들과의 공식 회견에 지금까지 3차례 나섰다.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횟수가 현저히 적다. 더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109차례 라디오 연설을,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차례 TV 생중계 ‘국민과의 대화’로 대국민 접촉면을 넓혔다. 박 대통령은 공식 연설 대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공개하는 간접 방식으로 뜻을 전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연설문 속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현실에서도 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단어를 쓴 맥락에서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오늘날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2014년 8월15일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 “저는 이제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행복이고,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는 것입니다.”(2013년 5월18일,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기념사’)

민주주의는 자유나 애국, 행복 등 박 대통령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짝을 이룰 때만 연설문 속에서 살아난다. 반면 국가주의를 암시하는 단어가 불뚝 출현한다. ‘애국심’이나 ‘적폐’가 대표적이다. “월남이 패망할 때 지식인들은 귀를 닫고 있었고 국민들은 현실정치에 무관심이었고 정치인들은 나서지 않았습니다”(1월13일 대국민 담화문)는 우연히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으로 전사자 5천여 명을 희생시킨 뒤 1975년 TV와 라디오로 ‘월남 패망’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했었다. 베트남이 아닌 ‘월남’은 41년 전의 데자뷔다. 박 대통령의 연설문에 ‘박정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월남’ ‘한강의 기적’(48번)과 같은 일종의 암호가 곳곳에 숨어 있다.

또 박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듣는 대상을 대부분 ‘국민’(1117번)으로 통일해서 호명한다. 시민(59번), 서민(16번), 노동자(0번)와 같은 호칭의 등장 횟수는 다른 대통령의 10분의 1 수준이다. 박 대통령에게 ‘국민’은 얼굴 없는 추상의 존재다.

41년 만에 돌아온 ‘월남’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는 추상어가 많다. 은 대통령의 말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한 자료 안에서 동시에 등장한 주요 단어들 사이의 관계를 컴퓨터로 분석했다. ‘단어 의미연결망 분석’이다. 각 단어가 등장하는 횟수는 물론이고, 문장에서 각 단어들의 위치와 밀집도 등을 따져 ‘담론 지도’를 그려봤다. 여러 연설문마다 자주 함께 쓰인 단어들 사이에서는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와 ‘스토리’가 읽힌다. 단어들 간에 연결된 선이 굵을수록, 거리가 가까울수록 함께 자주 쓰였다는 뜻이다(상단의 ‘담론 지도’ 참조).

박근혜 대통령의 담론은 크게 2가지 축이다. 창조경제 담론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와 북한 문제로 짜인 ‘안보’ 또는 ‘통일’. 1월13일 대국민 담화문에서도 박 대통령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국가를 지탱하는 두 축(경제와 안보)이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며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식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담론은 크게 2가지 축이다. 창조경제 담론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와 북한 문제로 짜인 ‘안보’ 또는 ‘통일’.

그런데 담론 지도에서 다소 ‘튀는’ 단어가 보인다. 섬처럼 외로이 떨어져 있는 ‘행복’이다. 유일하게 어떤 가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다. “항상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평화롭고 국민들 각자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일 겁니다.” 이번 대국민 담화문의 첫머리에도 ‘행복’이 등장한다. 기승전‘행복’. 박근혜 대통령 취임에서 첫 일성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였다.

“강력한 국가주의, 국민주의다. 행복이 정치의 본질적인 목표이긴 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말 속에는 진보와 보수가 어떤 가치의 차이로 그 목표에 접근하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의 해석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경합하는 체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 차이를 뭉개고, 현실을 초월해버린다. 혁신, 창조 같은 비정치적 단어들로 눈길을 돌리는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 구체적인 집단을 호명하지 않고 ‘국민’이라고 뭉뚱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행복’에 관심 있다는 윤리적인 알리바이를 만들 뿐이다. (담론 지도만 봐도)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훨씬 국가주의가 강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섬처럼 외로이 떨어져 있는 ‘행복’

대통령의 말은 힘이 세다. 특히 대통령 연설은 매우 유용한 ‘자원’이다. 여러 가지 이슈 가운데 특정 이슈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의제(어젠다)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설득한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대통령의 프라이밍 효과’다. 대통령은 특정 이슈를 반복해서 국가 의제에 힘을 실어주고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고 싶어 한다. 호의적 여론 지형을 닦고자, 역대 대통령들은 라디오·TV 연설과 각종 강연, 언론 기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통’이라고 평가받는 박근혜 대통령만 예외다.

이런 까닭에 역대 대통령들은 연설문에 꽤 신경을 썼다. “나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연설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 연설문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작성하지 않았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했다. 어느 설명보다 어느 비유보다 내 연설문이 더 정확한 때가 많다. 또 당시의 내 철학과 비전, 열정과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런 욕심은 다른 대통령들도 비슷했다(같은 호 ‘청와대 연설비서관 3명이 말하는 대통령 연설’ 기사 참조).

미국에서는 대통령 연설문을 심층 분석하는 학문 연구와 언론 보도가 활발하다.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연설문에 등장하는 단어의 빈도와 의미연결망 분석을 통해 시기별 국가 의제가 어떻게 달라졌고,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으며 ‘대통령의 말’에 배어 있는 정치적 선동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NYT)는 대통령 연설문을 매번 주석까지 달아 깊이 분석하고 평가한다.

지금까지 국내 언론의 연설문 분석 보도는 현직 대통령 연설문 몇 개만 분석하거나 ‘광복절 축사’로 역대 대통령을 비교하는 정도에만 머물렀다. 1995~2015년 18년치 대통령 4명의 연설문 2597건을 모두 수집해 다차원으로 텍스트를 분석하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다. 은 연설문에 담긴 121만1611개 형태소를 분석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4명의 대통령 연설문에는 모두 ‘국민’ ‘경제’와 같은 단어가 등장 빈도 집계 1~4위를 차지했다. 빈도에서는 대통령별 관심사와 국가 의제가 나타난다. 지식정보사회를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보(22위), 지식(25위) 같은 단어가 상위에 올라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한테서는 사람(8위), 정치(18위), 언론(42위)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상위 단어는 성장(11위), 기업(14위), 녹색(36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행복(26위), 안전(43위), 여성(48위) 등을 내세웠다.

이 결과를 상대빈도로 계산해 따져보면, 좀더 재밌는 결과(상단 그래프 ‘연설문에 나타난 대통령 4인4색’ 참조)가 나온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평화, 사람, 개혁, 민주주의, 인권, 대화 등 정치·사회적인 단어를 즐겨 썼다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성장, 산업, 개발, 일자리, 규제처럼 경제와 관련된 단어를 선호했다.

김대중 ‘시장’, 노무현 ‘성공’ 즐겨 써

통념을 깨는 결과도 보인다. 보수 정권은 위기를, 진보 정권은 안정을 강조했다. 중간지대에 있는 국민을 지지 세력으로 규합하려는 ‘프라이밍’이다. 보수의 핵심 담론이라고 여겨졌던 시장, 성공, 경쟁력과 같은 단어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더 많이 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류’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방’을 가장 많이 썼다는 점도 흥미롭다.

북한, 한반도를 입에 가장 많이 올린 대통령은 김대중·박근혜였다. ‘통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여성’이라는 단어에 친화적인 대통령도 김대중·박근혜였다. 청년 실업이 사회 이슈가 되면서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젊은이’라는 단어를 자주 꺼낸 것도 새롭게 나타난 양상이다.


통념을 깨는 결과도 보인다. 보수 정권은 위기를, 진보 정권은 안정을 강조했다.

이 그림과 상단의 ‘담론 지도’를 함께 보면, 각 대통령의 특색이 더 명확해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혁’을 통해 일류 국가, 한반도 평화를 이뤄내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을 내려놓고 언론과도 경쟁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와 시장경제를 만들고 싶어 했다.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도 작용했겠지만, 탄핵과 개헌 논란 등 여러 갈등 국면을 반영해서인지 노 대통령한테서 등장하는 단어는 다채롭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세계 금융위기 사태를 ‘위기 극복’을 내세우며 헤쳐나갔다. 친기업 대통령답게 ‘시장’과 ‘성장’이 주요 열쇳말이다.

담론 지도에 그려진 경제 관련 단어 맥락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이나 공정을 내세우긴 했지만, 담론의 기본축에서 분배나 양극화, 복지 등의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반도 문제에서 협력·교류 등 차별적인 실현 방안이 등장하는 데 견줘, 두 대통령은 진보 경제 담론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각 대통령이 시기별로 어떤 분야를 집중적으로 말했는지도 분석해봤다(그림2). 우선 연설문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들을 정치/경제/통일·외교/사회/행정 등 7개 분야로 분류한 다음, 각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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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19.5%)이었고, 가장 적게 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3.6%)이다. 경제는 박근혜 대통령(40.2%)과 이명박 전 대통령(35.9%)이 1·2위를 다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시 통일·외교(40.1%) 비중이 높았다. 공통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분야는 통일·외교인데, 해외 순방과 정상회담이 있는 시기마다 그 비중이 치솟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일하게 연설문에서 정치 비중이 경제를 앞선 시기(2007년 1월·6월)가 존재한다. 탄핵, 열린우리당 탈당, 개헌 논란 등 정치 이슈가 많았던데다 ‘대통령과의 대화’, 참여정부 평가포럼 등 행사 일정이 많았기 때문이다(그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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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에 ‘보이지 않는 단어’ 또는 ‘사라진 단어’도 곱씹어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강조했던 경제민주화는 연설문에서는 고작 9번 쓰인 뒤 찬밥 신세가 됐다. 2013년 11월 이후 연설문에서 아예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복지’도 20번(2013년)→11번(2014년)→10번(2015년)으로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진다. 1월13일 대국민 담화문에서도 박 대통령은 주요 이슈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한-일 합의’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이나 갈등 국면에서 대통령이 침묵하거나 언급을 피한 셈이다.

연설문에서 사라진 ‘경제민주화’

“욕을 먹어도, 매일 잠을 자지 못해도,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어떤 비난과 성토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번 대국민 담화문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다른 회의 자리에서는 ‘암덩어리’ ‘단두대’라는 거친 표현을 쓰더라도 공식 연설문에서는 절제된 언어를 써왔던 나름의 균형감이 깨진 것이다. ‘진실한 사람’ ‘혼이 비정상’ 등 요즘 박 대통령이 쓰는 단어는 “막말이 우리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린다”(2013년 7월 ‘기독교 지도자 오찬’)는 평소 소신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불과 몇 년 전 ‘대통령의 말에 품격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언론은 지금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다음호 ‘언론이 그린 대통령’ 편에서는 대통령을 기록하는 ‘언론의 글’ 심층 분석이 이어진다.

어떻게  데이터 수집·분석했나


대통령  연설문  18년치  317만  형태소  분석


은 1998~2015년 대통령과 언론의 ‘말과 글’을 분석했다. 대통령의 말은 공식 연설문, 언론의 글은 종합일간지 6곳( )의 사설에서 뽑아냈다. 총 8만6333건의 글 속에 담긴 단어를 따라가서 그 시대의 어젠다(의제)가 무엇이었는지, 언론이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서 어떻게 ‘프리즘’ 구실을 했는지를 살펴봤다. 전체 데이터 수집·정제·분석 작업은 빅데이터 분석 전문 업체에 맡겼고, 데이터 분석 과정에서 신문방송학과, 문헌정보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의 자문과 검증을 거쳤다.
1회 ‘대통령의 말’에서 분석한 데이터 자료는 대통령 연설문(대국민 담화문, TV 생중계 ‘대통령과의 대화’ 속기록, 라디오 연설문, 강연·기고문 등 포함)이다.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김대중 전 대통령 연설문 822건,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문 780건, 이명박 전 대통령 연설문 816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179건 등 총 2597건을 수집했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자료는 재임 기간 5년 전체,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0월30일까지 2년8개월치다.
연설문에 담긴 말을 먼저 한국어 형태소 분석기(‘KOMORAN’ 2.4버전)로 헤아려 총 317만670개 형태소를 뽑아낸 뒤, 일반명사·고유명사, 형용사, 동사, 어근만 추출해 121만1611개 형태소를 대상으로 단어 빈도(시계열 및 상대빈도 분석 포함), 단어 간 의미연결망 분석 등을 해봤다. 개별 단어가 얼마나 많이 쓰였고, 각 단어끼리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각 대통령이 시기별로 어떤 담론에 집중했는지를 알아보고자 ‘단어 사전’도 만들었다. 대통령 연설문과 종합일간지 사설마다 적어도 20회 이상 쓰인 단어를 정치/경제/사회/통일·외교·국방/행정 등 총 7개 카테고리로 나눴다. 단어 사전은 기자 3명이 각자 카테고리를 분류하고 교차 검증하는 ‘휴먼 코딩’ 방식으로 만들었다.
다음호에 보도할 2회 ‘언론이 그린 대통령’에서는 6개 종합일간지 사설 총 8만3736건을 분석할 예정이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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