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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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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안 한다가 아니라 이해를 못한다”

김무성 수첩 사건으로 확인된 청와대 실세들의 존재와 인식, 행태…

사건 이후에도 대통령의 ‘청와대 무죄론’은 그대로
등록 2015-01-21 05:57 수정 2022-11-08 09:55
지난 1월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수첩을 펼쳐보고 있다. 수첩에는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등의 이름과 함께 “문건 파동의 배후는 K, Y(김무성, 유승민)”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뉴스웨이

지난 1월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수첩을 펼쳐보고 있다. 수첩에는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등의 이름과 함께 “문건 파동의 배후는 K, Y(김무성, 유승민)”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뉴스웨이

“(청와대가) 집단 피해망상증에 걸린 게 아닌가 한다.”

음종환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사태를 두고 한 정치 전문가가 내놓은 평가다. 음 전 행정관은 지난해 12월18일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보고서 유출 사건’의 배후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의원이 있다고 발언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전 비대위원과 음 전 행정관 간에 발언 내용과 관련해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설령 음 전 행정관의 주장대로 그가 김 대표와 유 의원에 대해 ‘배후’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정윤회 사태’를 바라보는 청와대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동안 청와대와 각을 세워온 인사들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으며 박근혜 대통령과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십상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집단 피해망상증’이라는 말은 청와대의 이러한 인식을 가리킨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청와대만…

재밌는 대목은 ‘정윤회 문건 파동’의 배후에 실제로 김 대표와 유 의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음 전 행정관의 말을 김 대표와 유 의원에게 직접 전한 이준석 전 비대위원도 ‘음 전 행정관이 사실이 아닌 내용을 가지고 근거도 없이 두 의원을 음해하려 한다고 생각해 이들에게 알렸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음 전 행정관 본인도 ‘자신은 이들이 배후라고 말한 적 없다’고 주장한다. 김 대표와 유 의원 본인들도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데다, 실제로 ‘정윤회 문건’ 작성 당시 당의 실세도 아니었던 김 대표와 유 의원이 이 사건을 직접 만들어내거나 혹은 만들어낼 이유를 제공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힘들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김 대표와 유 의원을 문건 유출의 배후로 본다면 그것은 검찰의 설명(조응천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 박지만 EG 회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문건을 만들었다는 것)과도 다르다. 이 둘이 문건 유출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십상시’로 대표되는 청와대 실세들의 존재와 그들이 그동안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어떤 행태를 보여왔는지가 확인됐다는 점에 있다. 음 전 행정관은 ‘십상시’ 가운데서도 실세 그룹에 속한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여권 관계자는 “음 전 행정관이 평소에도 김 대표와 유 의원을 굉장히 안 좋아했다. 대통령의 앞길을 막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인물들에 대한 청와대의 ‘음모론적 시각’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이번 사건은 청와대가 ‘자신들과 반대 의사를 가진 쪽에서 자꾸 이 문제를 퍼뜨리고 확대하고 있다’는 프레임으로 문제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번 기자회견으로 대통령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참모들의 잘못이 아니고 결국 대통령 자신의 실패라는 것, 그게 본질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문제의 근원이 대통령이라면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 이철희 소장


이번 사건으로 청와대가 부적절한 사찰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이 전 비대위원은 음 전 행정관이 자신에게 특정 직업군을 거론하며 “(그 직업군의 여성을) 만나고 다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이 전 비대위원이 방송에서 청와대를 비판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것을 음 전 행정관이 지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듣기에 따라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협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승민 의원도 최근 “언론사 간부를 만날 때 조응천 전 비서관이 함께 나온 적은 있지만, 그걸 청와대가 어떻게 아나?”라며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부적절한 사찰을 벌이고 이를 통해 얻은 정보로 ‘찌라시 수준’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K와 Y, 청와대에 사실관계 확인 요청 그 뒤
수첩을 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지난 2월 3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전에 “골프 활성화 방안을 문화체욱관광부에서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지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수첩을 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지난 2월 3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전에 “골프 활성화 방안을 문화체욱관광부에서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지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음 전 행정관 사태는 청와대 내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청와대는 1월15일 음 전 행정관을 면직 처리했다고 밝혔지만, 애초 청와대는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6일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의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이 전 비대위원을 통해 배후설을 전해들은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의원은 각각 6일 밤과 7일 오전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과 안봉근 청와대 제2부속실장에게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 발언을 직접 들은 이 전 비대위원에게 사실관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언론을 통해 사건이 공개되고 여론이 악화된 뒤에야 “공직자로서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음 전 행정관의 뜻을 받아들여 사표를 수리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이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강하게 주장한 ‘청와대 무죄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사건의 당사자인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 뒤 처음으로 가진 공개적인 자리인 1월15일 새해 정부부처 업무보고에서 “혁신의 기회를 다 놓치고 힘 다 빠졌을 때, 그때부터 부산을 떨어봤자 소용이 없다”며 부처별 정책 성과를 강조했을 뿐 음 전 행정관 사태 등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았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태를 시작으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항명, 음종환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 사태까지 불거지며 후폭풍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데도 대통령의 인식은 여전히 ‘청와대 무죄론’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 안팎에서 쏟아져나오는 인적쇄신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내뱉었던 발언은 그의 폐쇄적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평가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과 관련해 “우리 비서실장께서는 정말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이다. …(비서실장 교체는) 지금 여러 가지로 당면한 현안들이 많이 있어서 그 문제들을 먼저 수습하고 나서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에 대해서는 더욱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세 비서관은 교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는 그 세 비서관이 묵묵히 고생하면서 그저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또 그런 비리가 없을 거라고 믿었지만 이번에 대대적으로 다 뒤집고 그러는 바람에 ‘진짜 없구나’ 하는 것을 저도 확인을 했다”고 말했다. 여론과는 동떨어진 인식이다.

“국정 운영이 뭔지 모르는 것 아니냐”

이철희 소장은 “이번 기자회견으로 대통령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참모들의 잘못이 아니고 결국 대통령 자신의 실패라는 것, 그게 본질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문제의 근원이 대통령이라면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운영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대통령이 기본적으로 국정 운영이 뭔가를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기자회견 내용도 지난해 기자회견과 상당 부분 비슷했다. 정부가 코미디의 소재가 돼버렸다”고 우려했다.

박 대통령이 ‘소통 부족’을 지적하는 질문에 ‘불통’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도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장관들의 대면보고가 부족하다는 기자의 지적에 대해 박 대통령은 “사실 옛날에는 대면보고만 해야 했지만, 지금은 전화나 이메일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더 편리할 때가 있다”며 장관들을 향해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었다. 질문한 기자에게는 “청와대 출입하면서 내용을 전혀 모르시네요”라고 탓하기도 했다. 김종배씨는 “박 대통령이 소통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소통 부족에 대해) 인정을 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이해를 못하는 거다. 대면보고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도 ‘장관들과 만나서 좀 깊숙한 얘기도 듣고 해야 정부 돌아가는 것,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지 않겠느냐’는 질문인데 대답을 보면 이것을 단순히 ‘보고 형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신년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마이웨이’식 인식으로 인해 앞으로의 국정 운영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돈 교수는 “대안이 없다.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겠나. 국정 추동력은 이미 상실해버렸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 우발적인 사건이 더 터질 것 같다. 이런 이상한 사건은 계속 대기 중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정권 지지는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대통령의 리더십 자체에 정통성을 부여하면서 지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적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지지하는 것이다. 현재 박근혜 정권의 리더십은 한계까지 가버린 상태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도한 정책도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아무 역할 못한 ‘기춘대원군’, 물러난대도

일각에서는 한 달 안에 김기춘 비서실장이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그렇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김 원장은 “한 달 안에 대통령이 언급한 특보단을 구성한 뒤에 김기춘 비서실장이 빠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러나 특보단 구성은 당·청 관계와 내각에 대한 통제를 노린 게 아닌가 한다. 원래는 대통령이 측근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점을 보완하고 청와대 내부를 체계화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도록 하자는 취지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본인의 직할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특보단 구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김종배씨는 “문고리 3인방이 계속 남아 있다면 비서실장의 교체는 의미가 없다. 정윤회 파동에서 제기된 문제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위상이었다. 김 실장이 문건이 작성되고 유출되는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못했다는 게 밝혀지면서 과연 ‘기춘대원군’이 맞느냐는 의심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런 비서실장을 자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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