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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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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깊고 넓은

질문-답 형식으로 풀어본 저성장 경제의 그늘
등록 2015-01-03 13:10 수정 2020-05-03 04:27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법 철폐를 위한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 연금을 떠받치지 못하면 고령층에 타격들은 2014년 12월22일 서울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출발해 12월26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까지 가려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찰에 막혀 좌절됐다. 박승화 기자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법 철폐를 위한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 연금을 떠받치지 못하면 고령층에 타격들은 2014년 12월22일 서울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출발해 12월26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까지 가려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찰에 막혀 좌절됐다. 박승화 기자

한국 경제가 구조적인 ‘장기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2012년 이후 계속되는 저성장 기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시대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로켓에 일단 올라타면 함께 상승하는’ 고성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때만 해도 개인이 빚과 실업으로부터 탈출하는 건 노력에 달린 문제였다. 일자리를 찾기 쉬웠고, 빚내어 집을 사거나 사업을 벌이는 게 결국 이익으로 남던 시대였다. 하지만 저성장·저물가 시대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야 한다. 가계부채와 실업(일자리), 저출산·고령화, 소득불평등, 수출 둔화와 내수 침체 등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합적인 위기로 나타난다. 로켓에 태워 한 방에 해결해버릴 수 없는 문제가 됐다. 특히 찬바람은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든다. 1955년생 양띠 4인이 부닥친 현실을 중심으로, 한국 경제 저성장 시나리오를 질문-답 형식으로 풀어봤다.

#엄홍섭씨는 은퇴 뒤 커피숍을 운영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로 1억원을 빌렸다. 이홍열씨도 전세자금에 보태기 위해 은행에 2천만원을 빚졌다. 2014년 50대의 평균 빚은 7911만원, 60대는 4372만원이다. 2015년, 빚내어 집을 사거나 가게를 차린 또 다른 엄씨, 이씨는 괜찮을까?

2015년 한국 사람들이 가난해지고 있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가계부채가 그 증거다. 부채의 질(質)도 나빠지고 있다.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게 아니라, 기존 빚을 갚거나 생계비로 쓰는 경우가 늘었다. 가계부채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처분가능소득 대비 부채비율’도 2013년 말 처음으로 160%를 넘어선 이후, 2014년 3분기 163.6%까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소득보다 빚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뜻이다.

예전엔 월급쟁이가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 빚을 갚고도 남았다. 그러나 최근엔 소득과 빚의 연결고리가 끊겼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50대 가구주의 가계부채다. “한국 50대 가구는 경제 전체의 평균 가구보다 40%가량 많은 부채 부담을 지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20% 내외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또 한국의 고령층은 은퇴 시점 이후 소득이 급속히 감소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김지섭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가계부채의 연령별 구성 변화’) 미국은 젊었을 때 얻은 빚을 나이 들면서 차츰 갚아나가는 구조인데, 한국은 50대가 되어도 여전히 대출로 집을 사고 가게를 내는 등 빚을 상환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독립해야 할 나이의 자녀들이 청년실업으로 인해 50~60대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가계부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여기에다 정부는 대출 규제를 풀어줘, 빚을 더 내라고 부채질했다.

빚진 한국 50대 가구 부채, 평균보다 40% 많아

물론 정부도 ‘2015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가계부채를 ‘리스크 관리 3종 세트’로 지목했다. 단기·변동금리의 주택담보대출을 장기·고정금리로 전환해 가계부채의 위험을 줄이겠다는 게 뼈대다. 하지만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고정금리로 전환하는 식의 정책 효과는 크지 않다고 봤다. “가처분소득이 감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실물경기가 살아나야 한다. 디플레이션에서 빠져나오려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추는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펴는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 위기가 임계점에 왔다. 저소득층에서 더 이상 가계부채를 갚을 수 없게 되면, 위기(신용불안)는 전염돼 전체 경제로 파급될 것이다.” -장보형 하나금융연구소 경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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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뇌관의 폭발력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한다는 시각도 있다. 장보형 하나금융연구소 경제연구실장은 “가계부채 위기가 임계점에 왔다. 저소득층에서 더 이상 가계부채를 갚을 수 없게 되면, 위기(신용불안)는 전염돼 전체 경제로 파급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단순히 통화정책 기조의 변화만으론 풀기 어려운 난제라는 뜻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최경환 부총리 경제팀은 소득 주도 성장론에서 기업 투자 활성화로 방향을 트는 등 냉·온탕을 오락가락하면서 오히려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인구절벽’이 다가온다

한국의 50~60대에게 빚은 성인병과 비슷하다. 나이가 들수록 차곡차곡 쌓여가는데 완전히 털어내기도 어렵다. 결국 과감한 외과 수술이나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생존경쟁에 치명적인 것은 병이다. 김연숙씨는 3년 전 갑상선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막노동으로 목수일을 하던 남편은 8년 전 허리를 다친 뒤로는 용돈이나 버는 정도이지 고정적 수입이 없다. 남편이 수령하는 국민연금 월 17만원이 노후 대책의 전부나 다름없다. 그래서 김씨는 장사를 접을 수 없다. 뾰족한 노후 보장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 추세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고령화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고령화 시대는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다. 가계부채를 잔뜩 짊어진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은 노후에 대비할 여력이 없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이들은 지갑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은퇴한 세대 역시 씀씀이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는 만성적인 내수 침체로 이어진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정책연구실장은 “급속히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 속도를 사회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 내수 부족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2006년 이후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소비성향이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60대 이상 고령층의 감소 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출산율은 1.19명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저출산으로 인해 생산가능인구(15~64살)가 줄어드는 것도 만성적인 내수 부족 가능성을 높인다. 한국은 2017년부터 고령사회(65살 이상 인구 비중 14% 이상)에 접어든다. 줄어든 생산가능인구가 늘어나는 연금을 떠받치지 못하면 고령층에 타격이 간다. 노동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줄어드는 ‘인구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불 꺼진 충남 당진제철소 전기로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일본학)는 저출산 문제 해결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출산율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많은 재원, 지속적인 정책 수단,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월 20만원의 보조금을 준다고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진 않는다.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담보해줘야 한다.”

#최도철씨가 32년간 몸담고 일한 현대중공업의 2014년 영업적자는 3조2천억원(4분기 제외)에 달한다. 회사는 임원 3분의 1을 잘라내며 바짝 허리를 졸라맸다. 대졸 공채 인원도 줄였다. 최씨는 그동안 한국 주력산업의 성장과 함께 가계를 꾸려왔지만, 한 대기업의 전자제품 생산공장에서 일하는 최씨의 둘째딸은 미래가 불안하지 않을까?

동부제철은 지난해 충남 당진공장의 전기로 불을 껐다. 제철소 전기로는 한번 불을 끄면 다시 불을 붙이는 데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을 끈 것은 한국 제조업이 더 이상 뜨거운 전기로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완공한 당진공장에는 1조5천억원이 투자됐다. 연간 300만t 열연강판, 170만t 냉연강판 생산규모를 갖췄지만, 철강 수요 산업인 조선·건설업 경기가 하락하고 값싼 중국산 철강이 들어오면서 수익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사팀이 비정규직의 계약을 해지할 때 눈치를 보지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기사나 판결이 많이 나올수록 계약 연장도 쉽게 된다.” -한 대기업 직원


전기로처럼 한국 경제를 견인하던 수출 대기업의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내놓은 ‘2015년 산업별 수출 전망도’를 보면, 12대 주력사업 가운데 2014년보다 괜찮은 업종은 조선·반도체·음식료뿐이다. 휴대전화 등 정보통신기기, 가전, 자동차 등의 전망은 밝지 않다. 조선업 역시 2014년 저가 수주로 인한 타격이 커서 어느 정도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이근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대기업을 내세워 선진국을 추격하는 한국 경제의 성장 모델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진단한다. 한국 대기업들의 외국인 지분 비율은 외환위기 이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대기업들은 외국인 주주에 의한 배당 요구, 자사주 매입 등으로 이윤이 지출되면서 투자율이 하락하는 비용을 치르고 있다. 이 교수는 “과거 대기업, 정부, 제조업, 수출 주도라는 선도 추격 모델에서 중소기업, 민간, 서비스업, 내수라는 새로운 추격 동력을 육성해 동반 추격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불평등, OECD 33개국 중 3번째

아직 새로운 성장동력에 불이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한파는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등에게 먼저 몰아닥치고 있다. 현재의 40~50대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했던 대기업이 고용을 줄이면서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종에는 비정규직 등 노동조건이 열악한 일자리가 제조업보다 더 많다.

#이홍열씨는 SK브로드밴드 서울 마포홈고객센터에 고용된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그의 11월 보수는 97만원에 불과했다. 다단계 하도급으로 이어지는 고용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이씨의 노동조건은 여러모로 열악하다. 2015년, 비정규직의 삶은 좀더 나아질까?

기업들은 이익을 늘리기 위해 비정규직과 납품업체를 쥐어짰다. 회사는 그렇게 쥐어짠 이익을 정규직 일부와 나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2014년 11월 내놓은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를 보면, 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 총액은 284만원(2013년 8월)→289만원(2014년 8월)으로 5만원 상승했다. 반면 비정규직은 141만원→144만원으로 3만원 인상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수준(49.9%)은 여전히 50%를 넘지 못한다. 한국의 임금불평등(하위 10% 임금 대비 상위 10% 임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가운데 3번째로 높다(2011년 기준).

하지만 정부는 비정규직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구제해주는 대신, 더 많은 ‘장그래’를 양산하기로 했다. 계약직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비정규직이 경험을 쌓도록 해서 기업의 고용을 유도하겠다고 정부는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정부가 기업에 주는 노동 규제 완화 신호다. 노동계는 상시적 업무에도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등 악용 소지가 많은 방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 대기업 직원은 “(정부가 비정규직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수록) 인사팀이 비정규직의 계약을 해지할 때 눈치를 보지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기사나 판결이 많이 나올수록 계약 연장도 쉽게 된다”고 말했다.

근본 이유는 기업이 가계의 몫 가져가서

비정규직은 대부분 저소득 일자리다. 이는 가계부채와 내수 부족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나 경쟁 촉진 등을 이유로 월급생활자를 쥐어짜고 골목상권 자영업자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월급생활자나 자영업자는 바로 소비자다. 이들의 구매력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내수 부족은 기업이 자초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저성장의 근본 이유는 기업이 가계의 몫을 많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정규직 해고 요건 완화 등 내수시장을 더 허물어뜨리기보다 가계의 몫을 어떻게 늘릴지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영업자인 엄홍섭씨와 김연숙씨는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춥다고 했다. 손님들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탓이다. 노동자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실질임금 상승률은 2014년 3분기 0.08%를 기록해 6분기 연속 하향곡선을 그렸다. 경제전문가들은 만성적인 내수 침체로 인해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켜졌다고 우려한다. 소득분배는 나날이 악화되고, 중산층은 줄어들고, 서민들의 지갑은 얇아진다. 2015년, 어떻게 하면 서민들의 지갑이 열릴까?

“수출 주도 성장이 한계에 이른 만큼 내수 확대에 좀더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이 충분히 소비하지 못한 수요 부문에서 시장이 커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상당히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 LG경제연구원이 낸 ‘2015년 국내외 경제전망’ 보고서 맺음말 중의 한 문장이다. 복합적인 위기에 대한 처방은 ‘상당히 과감한 정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도에 없는 길’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장보형 경제연구실장은 “기존 수출 중심 성장 구도로 가면 경제적 불균형을 키우고 한국 경제를 외풍에 더 흔들리는 구조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른 이코노미스트 역시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는 사라지고 구조개혁을 내세우는 건, 정책 당국이 공급이 적어서인지 수요가 적어서인지를 헷갈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수요 부족 대책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는 ‘2015년 경제 전망’에서도 헛다리를 짚고 있다. 저성장에 대해 “기업 매출액·영업이익 둔화→투자 부진→고용·임금 둔화→내수 부진 심화 및 세수 감소”로 인식했다. 경제전문가들이 ‘내수 부진→기업 매출 둔화→투자 부진’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정부 경제 전망도 엉터리

오석태 SG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저성장·저물가는 위험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우린 더 가난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기초연금을 높이고, 실업급여를 키우는 방법을 통해 가처분소득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4년부터 국제노동기구(ILO) 등이 주목하고 있는 소득 주도 성장 또는 임금 주도 성장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유선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고, 상시·지속적인 업무의 정규직 일자리를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임금 주도 성장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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