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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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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난민 인정 12년, 대한민국 최초 난민 보고서
한국 속 난민인정자 15개 나라 97명 추적조사
등록 2013-10-03 05:37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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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짐을 모두 챙기셨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인천공항을 빠져나가 서울로 가시려면 꼭, 입국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미리 여권을 준비해두세요. 저 앞에, 내국인-외국인 입국심사대가 나뉜 게 보이실 겁니다. 추석 연휴라 사람이 많습니다. 줄을 서시고 한 사람씩 심사대로 가시면 됩니다. 저기 저, 계속 두리번거리시는 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어느 쪽 입국심사대로 가야 할지 헷갈리신다고요? 간단합니다. 한국 국적이면 내국인 입국심사대로 가시면 되지요. 갖고 계신 여권에도 ‘대한민국’이라고 쓰여 있네요. 외국분이신거 같은데, 귀화하셨나보네요. 뭐 로버트 할리처럼. 네, 그쪽 심사대로 가시면 돼요. 선생님, 잠깐만요! 아까 그 여권을 다시 보여주시겠어요? 뭔가 이상합니다. 이것 보세요. 대한민국 여권 표지엔 ‘대한민국’ 네 자가 크게 쓰여 있는데, 이건 전혀 다른 모양새예요. 여행증명서? 한글로 쓰여 있긴 한데. 이런 여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짜 여권인지 의심스럽군요. 국적도 적혀 있질 않네요. 도대체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요?

두려워 마세요. 내국인-외국인 사이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난민입니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나고 자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다른 국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요.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모국 여권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신 한국 정부가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줍니다. 그렇다고 국적까지 덤으로 주는 건 아닙니다. 난민인정자는 3년 거주(F-2·갱신 가능) 비자를 받습니다. 외국인등록증이 있고요. 그러니까 난민은요,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사람’입니다.

국경 밖으로 향하는 난민은 대표적 ‘이주자’입니다. 그런데 이주자가 정확히 뭐냐고요? 유엔 기준은, 출생국이 아닌 지역에서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입니다. 물건과 자본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람의 이동도 늘어났어요. 국제 이주가 늘었고, 유형도 다양해졌습니다. 한국 속엔 140만여 명의 이주자가 있지요. 국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700만 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이주노동자·결혼이주민, 많이 들어보셨지요? 조선족이나 고려인·탈북자·난민 등도 이주자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난민은 조금 낯설어 보이긴 하네요. 한국 정부가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한 건 1994년부터인데, 2001년에야 첫 난민인정자가 나왔어요. 그래도 지난 19년간 한국으로 와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63개국 5580명(2013년 6월 기준·철회자 포함 누적 인원)입니다. 난민인정자는 26개국 334명(2013년 7월 기준)에 불과하죠. 길게는 8년까지 기다려,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도 있었죠. 그렇게 어렵사리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15개 나라에서 온 97명의 난민인정자에게 직접 물었지요. 난민 인정 뒤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67명이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다 했습니다. 12명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네요. 난민끼리 주고받는다는 ‘웃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난민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계좌번호·여행증명서·세금.”

한국 생활에 만족한다는 난민보단, 어려움을 호소하는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97명 중 30명은 한국을 떠나 제3국으로 이주할 것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고요. 또다시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각각 이탈리아·미국행을 택한 난민도 있었습니다. 좀더 행복해졌을까요? 열심히 물어봤는데 답을 안 주시네요.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면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은 사회보장 틀 안으로 쉽게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상 모든 사업장은 의무적으로 4대 보험에 가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4대 보험 가입이 되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난민 97명 중 16명이 의료보험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저임금에 따른 생계 곤란, 열악한 주거환경, 피부색에 따른 차별, 의사소통의 어려움, 심리적 불안…. 난민들의 호소는 한국 사회가 품어 안지 못하는 저소득층·비정규직·이주노동자 등이 겪고 있는 문제와 겹칩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노동3권·교육권·주거권 등 사회적 권리가 시혜 차원이 아닌 보편적 권리로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 현실이 난민들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난민인정자들은 한국에 들어와 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수년간 고난의 행군을 했습니다. 난민신청자(G-1 비자)는 일하는 데 제약이 있어요. 난민들의 정착기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부터 난민 그리고 국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엿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그리고….

저, 기자이신 거 같은데 말씀 끊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제 할 일이 있어서요. 이야기가 좀 어렵군요. 어쨌든 설명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산다니, 처음 듣는 소리군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 이제 처음 본 거네요. 저, 난민분 성함이? 그래도 입국 심사는 받으셔야 하니까요. 내국인-외국인, 어느 쪽 심사대로 가실지 정하셨나요? 어쨌든 한국에서 산다고 하시니, 내국인 쪽으로 가볼까요? 아니, 외국인 줄이 짧으니 그쪽으로? _편집자

조사 결과, 한국 속 난민인정자들은 고용불안·저임금 등의 문제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의 한 지역에 사는 난민 가족이 집 근처골목을 걸어가고 있다.김명진

조사 결과, 한국 속 난민인정자들은 고용불안·저임금 등의 문제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의 한 지역에 사는 난민 가족이 집 근처골목을 걸어가고 있다.김명진

■ 난민

현재 난민법에 규정된 정의는 이렇다.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well founded fear)로 인해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사람 등이다. 쉽게 말해, 나고 자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되레 박해를 받아 다른 국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캐나다나 영국은 박해의 개념을 ‘인권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침해, 이에 대한 국가의 보호 실패’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박해를 당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돼야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국외 판례를 종합해보면, 박해가 발생할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난민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난민협약에 규정된 ‘well founded fear’를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해석해 난민신청자에게 박해 ‘입증’을 과하게 요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추적조사 어떻게
작전명은 ‘다다익선’
작전명은 ‘다다익선’(多多益善). 한국 속 난민인정자들의 삶을 다각도로 살펴보려면 최대한 많은 수의 난민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출신국의 다양성 확보도 중요했다. 난민의 종교·언어·피부색에 따라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기준, 한국 내 난민인정자 수는 26개국 출신 334명이었다.
혹시 모를 박해를 우려해 난민들의 인적 사항은 철저한 비공개가 원칙이다. 한국 속 난민인정자의 명단과 연락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추적조사’가 됐다. 법무부 자료 분석 및 선행 취재 결과, 난민인정자 가운데 숨진 난민은 1명이었다. 또 ‘가족 결합 난민’(난민 지위를 받은 사람의 배우자와 자녀)은 99명, 국외에 정착한 것으로 확인된 난민은 3명이었다.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난민인권센터의 도움으로 난민 30여 명의 명단과 연락처가 확보됐다. 공익법센터 어필, 법무법인 동천, 공익익권법재단 공감을 비롯해 난민인정불허 취소소송을 담당했을 만한 변호사들을 통해 또 다른 난민을 수소문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난민인정자가 다른 난민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한땀 한땀 가내수공업식 추적으로 어렵사리 확보한 난민인정자 명단은 130여 명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2013년 7월15일부터 8월30일까지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설문지는 객관식 문항 16개로 이뤄졌다. 피난처·난민인권센터에서 나란히 인턴으로 활동해 난민 문제에 대해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김진하(서울대 종교학 3)·채유성(경희대 정치외교학 2)씨가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설문조사는 주로 난민들이 일을 하지 않는 평일 저녁과 주말에 전화 인터뷰로 진행됐다. 영어·한국어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인터뷰를 꺼리는 경우 전자우편을 통해 답변을 받았다.
한국어·영어·프랑스어 외에도 난민들이 쓰는 언어는 다양했다. 추적조사를 주춤하게 한 또 하나의 난관이었다. 문제 해결에 나서준 이들은 난민이었다. 문제 해결에 나서준 이들은 난민이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에 살아온 소수민족 출신 로넬 차크마 나니(41)가 영어 설문지를 방글라데시 공용어인 벵골어로 번역해주었다. 버마어 통역은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도움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15개국에서 온 난민인정자 97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끝끝내 설문조사 참여를 거부한 난민들은 ‘조용히 살고 싶다’ ‘이런 조사 많이 했지만, 변하는 게 없었다’ ‘언론 입맛대로 난민을 소비하는 게 싫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아예 전화를 받지 않거나, 수소문한 연락처가 이미 다른 번호로 바뀐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13년 9월8일부터 2주 동안 5개 나라에서 온 14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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