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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기획이 던지는 화두다. 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빈곤층 앞에 놓인 죽음의 막다른 골목을 함께 걸어봤다.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서울 월곡동 성가복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머물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의료시설이었다. 이곳에서 삶의 질곡에 떠밀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밤 시간에는 응급실 두 곳도 들여다봤다. 몸이 깨지고 상한 사람들이 실려와 울고 있었다.
현장에서 본 가난한 이들은 너무 쉽게 아팠고, 쉽게 다쳤고, 쉽게 죽었다. 단 한 달 동안의 취재로 이들이 느끼는 절망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기획은 그들의 시점에서 본 죽음에 가까스로 한 발 다가서려는 시도였다. 취재는 그들이 강 건너에 사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 결국 되돌아 ‘우리’임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첫 회에는 성가복지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환자 15명 가운데 5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취재 과정에서 가족과, 세상과, 그리고 기자와 이별한 환자들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_편집자
11월4일 오후, 4인용 병실에 있던 이순임(42·가명)씨가 독실인 710호실로 옮겨졌다. 오전까지만 해도 혈압이 130/90mmHg이었지만, 오후 들어 70/40mmHg까지 떨어졌다.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는 징후였다. 이인월 간호사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위암 말기로 2년을 견딘 이씨의 몸은 이미 뼈만 도드라졌다. 곡기는 끊은 지 오래였다. 혈관으로 주입되는 포도당 수액이 그의 생명선을 잇는 유일한 영양분이었다. 그의 관자놀이와 눈은 이미 움푹 꺼졌다. 살이 빠지면서 머리뼈의 윤곽이 선명했다. 살이 위축되면서 눈꺼풀도 눈동자를 마저 덮지 못했다. 메마른 눈꺼풀 밑으로 때때로 검은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앙상한 그의 얼굴 군데군데 그림자가 깊게 졌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눈물 혹은 체액
오후 3시, 로랜조 원목 수녀가 독실에서 이씨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씨는 가톨릭 신자였다. “많이 힘들죠. 말하기도 힘들죠. 하고 싶은 말 있을 텐데 말하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잘하더니… 하느님 아버지가 가까이 오시는 것 같네요… 예수님 돌아가신 고통을 생각하며 나의 아픔도 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노수녀는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씨의 손목에 있던 묵주는 끌러져 그의 뼈만 남은 두 손에 안겼다. 그 손을 다시 감싸쥔 수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가 떠날 먼 길을 축복했다. 분홍색 바탕에 흰색 동그라미가 새겨진 환자복 속 뼈만 남은 몸이 언뜻언뜻 앙상했다. 눈의 초점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녀가 기도를 마무리하자, 그는 마른 몸을 간신히 돌아누웠다. 이불 바깥으로 나온 그의 발바닥은 건조했다. 빗살무늬토기에서 본 것 같은 깊은 주름이 발바닥에 겹겹이 새겨졌다. 주름 사이에 불규칙하게 벌어진 틈들도 촘촘했다. 그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탄식과 신음, 울음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 소리였다.
그렇게 그는 이틀을 더 버텼다. 이미 최저혈압이 40mmHg 밑으로 떨어졌다. 보통 환자 같으면 벌써 사망했을 상태다. 그의 몸은 고통스럽게 삶의 마지막 끈을 잡고 있었다. 이인월 간호사는 “걱정거리가 많은 환자들은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고,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오래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하루 전 4남매가 아빠와 함께 왔다. 나이는 20살, 19살, 10살, 6살이었다. 그 가운데 셋째는 엄마 곁에 오지 않았다. 겁먹은 얼굴로 한사코 병상에서 떨어졌다. 수척해진 엄마의 얼굴을 보고 “무섭다”고 했다. 엄마는 가쁜 숨을 쉬면서도 계속 눈을 감지 못했다.
남편의 눈물이 콧등을 흘러 환자복에 떨어졌다. 반쯤 감긴 환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라기보다, 그의 몸이 잠기면서 솟아오른 진한 체액 같았다. 이인월 간호사가 두 손으로 그의 눈꺼풀을 감겨줬다.독방에 들어간 지 이틀째, 저녁 7시를 넘기면서 몸의 곳곳에서 죽음의 징후가 선명했다. 맥박이 잡히지 않았다. 체온은 39.6℃까지 올랐다. 호흡도 분당 28회까지 올랐다. 연락이 닿은 환자의 남동생이 달려왔다. 그는 죽어가는 이의 귀에 대고 말을 이었다. “누나, 걱정하지 마.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돼. 울지 마.” 환자의 입도 몇 번 벙긋거렸지만 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숨 쉬는 것도 벅차 보였다. 동생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침상 밑에 두 명의 학사가 섰다. 병원에서 실습을 하는 신학생들이었다. 가는 이를 위해 기도문을 읽었다. “성모 마리아여,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침대 왼편에서 남편 김씨가 핏기라고는 없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편의 눈물이 콧등을 흘러 환자복에 떨어졌다. 반쯤 감긴 환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라기보다, 그의 몸이 잠기면서 솟아오른 진한 체액 같았다. 이인월 간호사가 환자의 눈물을 닦았다. 두 손으로 그의 눈꺼풀을 감겨줬다. 그의 영면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 간호사의 손이 떨어지자 그의 눈은 다시 천천히 열렸다. 뜬 것이 아니라, 그저 감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인이 살았던 시장 옆 반지하탄력 잃은 눈은 초점을 잃었다. 임종을 앞둔 병상에는 남편과 남동생뿐이었다. 멀리 경기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반지하방에 사는 아이들 4명은 엄마 곁에 없었다. 치매를 앓는 친정아버지나 심장 질환을 앓고 누워 있는 친정어머니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가쁜 숨을 내쉬던 그의 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저녁 8시29분. 독방 시계의 초침은 막 숫자 8을 지나치고 있었다. 네 아이의 엄마 이순임씨의 숨이 멎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이씨는 서울 면목동의 가죽공장에서 일했다. 여성 치마에 들어가는 가죽 안감의 이음매를 만드는 일을 했다. 중매로 만난 남편은 제기동의 의류회사 직원이었다. 남동생은 남편을 처음 보고 “형님이 착하게 생겼다”며 좋아했다. 결혼은 1983년에 했다. 네 아이 가운데 둘째를 빼고 모두 딸이었다. 근근이 유지되던 살림에 금이 간 것은 2008년부터였다. 남편은 그해 3월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 이씨가 사망하기 하루 전 기자와 만난 남편은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심장에 기계를 박아 살고 있다”고만 말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셋째아이의 담임교사가 보낸 것이었다. 환자의 상태를 물어왔다. 그가 기자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는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몰랐다. 그의 부탁에 따라 ‘위독한 상황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답을 보냈다. 이 가정에 닥친 불행은 김씨의 심장병에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에 이씨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박영숙 간호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면, 병에 걸린 다음에 가정이나 병원에서 제대로 관리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씨가 세상을 떠난 이틀 뒤,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을 찾았다. 이씨가 살던 곳이다. 이날은 이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부천으로 향한 올림픽대로에는 안개가 짙었다. 한강 건너편의 풍경도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먼 길을 가기에는 날씨가 궂었다.
그의 집은 부천 강남시장 옆으로 난 좁은 골목에 있었다. 2층 가옥의 반지하 공간이 그의 집이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내부 구조는 독특했다. 대문을 열자마자 화장실 문이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에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화장실과 계단 사이에 마당으로 통하는 공간이 있었다. 마당은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함부로 구겨진 옷가지가 여러 벌 흩어져 있었다. 호스가 길게 똬리를 튼 수돗가에는 나무판자 바닥이 물에 불어 들떠 있었다. 그곳에도 마른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때 묻은 세탁기 옆에 현관문이 있었다.
그 현관문을 열고 이씨의 첫째딸 윤지(20·가명)씨가 나왔다.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회색 반팔 면티와 남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들고 간 피자를 건네자 말없이 받았다. 기자를 바로 보지 않고 45° 정도 비스듬하게 맞았다.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둘째는 일터인 오토바이 가게에 갔고, 셋째는 학교에 갔다고 한다. 넷째는 집에서 자고 있었다.
아빠를 빼고는 아무도 엄마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셋째와 넷째는 엄마에게 생긴 일을 몰랐다. “충격을 받을까봐” 얘기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무척 가슴 아프겠다’고 말을 건넸다. 20살 아가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3일 전 병원을 찾았을 때, 둘째 동생과 아빠는 계속 우는데 자신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했다. 가슴에 손을 대면서 “심장이 죽어서 그런가”라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앳된 얼굴의 아가씨는 고등학교를 미처 마치지 못했다.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엄마는 시름시름 아팠고, 돈은 없었다. 집안일은 그의 몫이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말아달라”고 답했다. 그래도 이야기가 길어졌다. 대화 장소는 현관에서 마루로 옮겨졌다. 돌아보니, 10평(33m2) 남짓한 공간에 방 2개와 마루가 있었다. 침침한 마루는 옷가지와 전선, 그릇, 이불 등으로 어지러웠다. 마루 어느 지점에 어정쩡하게 놓인 텔레비전은 문 열린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통 방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듯했다. 화장실은 현관문에서 10m 정도 떨어진 대문 앞에 있었다. 위암을 오래 앓았던 이순임씨가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을 오갔을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를 대신하는 맏딸의 무표정윤지씨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셋째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남자아이인 줄 알았다. 또래들처럼 머리에 리본을 매거나 치마를 입지 않았다. 머리는 여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은 ‘스포츠형’이었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게 관심은 없어 보였다. 기자를 지나친 아이는 텔레비전 앞에 모로 누웠다. ‘오늘 학교에서 뭐했느냐’고 묻자, “학예회를 했다”고 말했다. “우리 엄마·아빠만 오지 않았어.” 그 말에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엄마·아빠가 학예회에 오지 않아도, 10살짜리 아이는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아이에게, 엄마에 대해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아빠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엄마 병원에 갔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바로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가서 박혔다. 아이는 기자가 가져간 피자를 꺼내 먹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니가 콜라를 플라스틱 컵에 따라주자 말없이 받아먹었다. 엄마가 묻히는 날, 아이는 혼자서 학예회에 참가하고, 집에 돌아와 피자와 콜라를 먹었다.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에 텔레비전 불빛이 어른거렸다. 텔레비전 속의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의 얼굴에 간간이 웃음기가 돌았다.
첫째와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끔 너무나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랑은 사이가 좋았다.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라고 했다. “집에서 확 나가버리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 가고 싶다.” 그는 일본에 관한 것은 무작정 좋았다. 일본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남자를 만나서 살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동생들이 그의 발목을, 허리를, 뒷목을 잡아끌었다. 아빠는 짜증이 나게 했다. 엄마한테도, 자신한테도 잔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엄마 편’이었다. 자신도 엄마 편이었다. 엄마가 이치에 맞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가 이젠 없었다. 엄마의 몫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윤지씨는 천천히,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었다. 하소연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남의 얘기를 하듯이 이야기는 계속됐다. 떠안은 짐을 두고 불평하는 것이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20살의 윤지씨는 깨달은 듯했다. 10살 셋째가 콜라를 이불에 흘리자 언니 눈치를 봤다. 집을 나서려는데, 열린 방문 너머 안방의 이불 뭉치 속에서 잠든 막내의 작은 등이 보였다.
2층 주인집의 현관을 두드렸다. 주인집 손녀인 신아무개(20)씨가 문을 열었다. 반지하 집에 대해 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했다. “그 집 둘째와 친구들이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집 앞에 모여들어서 이웃에서 민원이 많다”고 말했다. 둘째도 고등학교를 그만뒀다는 윤지씨의 말이 떠올랐다.
전쟁 고아의 쓸쓸한 최후윤지씨를 만난 날 새벽, 성가복지병원에서는 또 한 명이 숨을 거뒀다. 68살 장인철(가명)씨였다. 사망 시각은 새벽 5시50분이었다. 그는 담낭암을 앓았다. 이날 새벽 야근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가족들만 임종했다. 따로 빈소가 마련됐는지 병원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역시 곡기를 끊고, 포도당 수액으로 남은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담낭에서 시작된 암은 위로 번졌다. 그의 소화기관은 주인에게 영양을 공급한 지 오래였다.
그는 기자가 호스피스 병동을 처음 찾을 때부터 혼수상태였다.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호스피스에서는 진통제를 투여하며 그의 통증을 덜었지만, 표정에는 오랜 고통이 화석처럼 굳은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서서 얼굴을 마주 대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사고와 질병이 그의 얼굴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장씨의 삶에 대해선 몇 가지 조각만 들을 수 있었다. 형 장수철(77·가명)씨로부터였다.
빈소에서 고인이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쩌면 웃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그의 표정은 항상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문객은 10여 명이었다.
장씨의 고향은 백령도였다. 어릴 적 홍역을 앓아서 한쪽 눈은 실명했다.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은 가로 2cm 정도로 아주 짧게 트였다. 어머니는 장씨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 형은 “동생이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운명을 갈랐다. 형은 뭍으로 떠났다. 미군 극동군사령부 연락파견대 소속이었다. 그렇게 형제는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는 전쟁 통에 사망했다. 장씨는 고아가 됐다. “교육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형은 동생이 “평생 막노동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몸조차 약했다. 한눈에도 그의 골격은 왜소했고, 뼈는 가늘었다. 조카는 “삼촌이 감기를 달고 살았다”고 말했다.
장씨에게 사고가 닥친 것은 1989년이었다. 차에 치였다. 그때 경찰 조회를 통해 그의 형에게 연락이 닿았다. 사고로 그나마 보이던 오른쪽 눈도 실명했다. 그 뒤로는 거의 40년 만에 만난 형의 집에서 살았다. 형은 동생이 기초생활수급권 혜택을 받도록 했다. 장애수당도 받도록 했다. 나라의 지원 덕분에 생계는 꾸려갈 수 있었다. 착실한 기독교인인 장씨는 매일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살았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그는 지난 8월 성가복지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왔다.
그가 사망한 며칠 뒤, 장씨의 조카에게 전화를 했다. 장씨의 형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버지가 삼촌이 사망하고 나서 심하게 우울하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라고 말을 전했다. 시간이 흐른 뒤 조카에게 한 번 더 연락했지만 그는 여전히 취재를 거부했다. 그들의 슬픔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저문 김제 부농의 아들장씨가 사망한 다음날인 11월7일 오전 10시40분, 호스피스 병동에서 또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72살 이종길(가명)씨였다. 담도암을 오래 앓았다. 혈압이 갑자기 떨어져 독방으로 옮긴 것이 전날인 토요일이었다. 하루 만에 사망했다. 그나마 세상에 두고 가는 마음의 짐이 무겁지는 않았던 것일까.
다음날 저녁에 그의 빈소를 찾았다. 비가 내려앉은 서울의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잔뜩 무거웠다. 지하철 6호선 태능입구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작은 병원 영안실이었다. 지하 1층에 마련된 빈소에서 고인이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쩌면 웃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그의 표정은 항상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문객은 10여 명이었다. 친자식이 없는 이씨의 상주는 조카사위였다. 고인의 동생 가족을 제외하고 찾는 이는 거의 없어 보였다. 철모르는 조카손자들이 옆에서 고무공을 차고 놀았다. 대형 보안업체의 과장이라는 상주는 “자제분이 없다 보니 조문객이 뜸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면 바람을 피우는 데 다 썼다. 방탕한 생활로 사업은 기울었다. 어머니는 13년 전 세상을 떴다. …지난 10월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말기 암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의 거처는 미아동의 한 고시원이었다.이씨는 전북 김제 출신이었다.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첫째였다. 전쟁으로 집안은 풍비박산났다. 아버지는 전쟁 통에 병을 얻고 사망했다. 마을은 “어제 좌익이었다가, 오늘은 우익이었다”.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혼란 속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했는데, 이씨의 가족은 오히려 “샌드위치식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나마 맏이인 이씨는 동생들 대신 혼자 대학을 나왔다.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중앙 일간지에서 잠시 기자 생활도 했다. 회사 생활을 먼저 하고 군대는 뒤늦게 갔다. 제대한 뒤에는 사업을 벌였다. 장사는 번번이 실패했다. 밥그릇이나 수출용 포장박스 만드는 일을 했지만 사업규모는 점점 줄었다. “버는 돈보다 잃는 돈이 더 많았다.”
기울어가는 가정형편에도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혼자 감당했다. 오갈 곳도 없었다. 셋방살이도 못할 형편이었다. 끼니까지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그나마 동생과 조카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활했다. 설상가상이었다. 6년 전, 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어디 입원을 할 수 있겠느냐”며 홀로 사라졌다. 다른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떠돈 뒤에야 그는 돌아왔다. 그 사이 그는 신앙의 힘으로 암을 이기겠다며 기도원을 전전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 서울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서울 중화동 반지하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하면서 5년을 더 살았다.
집요하게 살아남은 암세포는 이씨를 다시 쓰러뜨렸다. 고등학교 때 육상 선수를 할 정도로 건장하던 이씨였다. 지난해 간에서도 암세포가 확인됐다. 그에게는 입양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은 “없느니만 못했다”. 결혼한 뒤로는 10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호적상으로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딸이 있어서 이씨 부부는 가난해도 국가의 보조를 받지 못했다. 지난해 간신히 기초생활수급권을 받게 됐다.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은 지난 10월26일이었다. 이씨의 동생은 “성격이 곧기만 해서 요령을 부리지 못하고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씨는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는 축이었다. 16살 어린 동생이 관세사였다. 동생은 빈곤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형에게 마지막 안전판 구실을 했다.
사업가로 살다가 수급권자로 죽다
이경남(87)씨는 안전판도 없이 바닥까지 떨어진 경우였다. 11월10일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그는 간세포암을 앓고 있었다. 그는 고혈압과 당뇨병도 함께 앓았다. 암세포는 폐로도 옮겨왔다. 식도정맥류도 있었다. 서울 쌍문동에 있는 작은 병원에 입원했다가 치료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넘어왔다.
87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피부가 좋았다. 얼굴도 팽팽했다. 기력도 있었다. 그가 병원에 온 날 병상 옆에 앉았다. 그가 문득 양손을 뻗어 기자의 얼굴을 감싸쥐며 “잘생겼네”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종종 그는 간호사들에게도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자주 오락가락했다. 그는 마약성 진통제의 도움을 받았다. 진통제가 없다면 고통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는 자주 몸에 연결된 링거를 뽑아서 간호사들의 속을 썩였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링거 주사기는 뽑혀 있었다. 주변은 피로 흥건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양팔은 침대 양끝 기둥에 묶였다. 팔이 느슨하게 묶인 채 잠이 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병원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아들 이아무개(55)씨가 7층 간호사실을 찾았다. 아버지에게 뭐라도 음식을 먹여주고 싶다고 했다. 박우순 간호사가 그를 맞았다. 소화기관의 기능이 심하게 저하됐다고 이씨에게 설명했다. 또 환자의 목에서는 가래가 쉼없이 올라왔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박 간호사는 “마음의 짐이 많은 가족들이 끝까지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아들 이씨와 마주 앉았다. 섬세한 인상의 미남형이었다. 환자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이경남씨는 옛날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운수업을 했다. 1960∼70년대를 상징하는 ‘제무시’ 트럭이 두 대나 있었다. 제무시는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던 2.5t의 파란색 트럭이었다. 트럭 두 대는 강변에서 모래를 실어날랐다. 현금 장사였다. 아버지는 부자였지만, 가족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태양이 아니라 그늘”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는 좀처럼 집에 오지 않았다. 가끔 집에 오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다. 아버지는 돈을 벌면 바람을 피우는 데 다 썼다. 방탕한 생활로 사업은 기울었다. 어머니는 13년 전 세상을 떴다. 장례식장에 아버지가 나타났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외면했다. 지난 10월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말기 암이었다. 이번에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의 거처는 미아동의 한 고시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는 봄날이 계속될 줄 알고 인생을 낭비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옆에 아버지는 말없이 누워 있었다.
편의점 부부를 덮친 혈액암
이씨와 말을 주고받은 이틀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계절은 따뜻한 봄이 아닌 겨울의 초입이었다. 사망 시각은 오후 5시24분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날이었다. 수십만 수험생들이 펜을 내려놓을 즈음, 그도 함께 생을 접었다. 박영숙 간호사는 “잠든 모습이 평화로웠다”고 전했다.
다음날 빈소를 찾았다.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영정 속의 이경남씨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침대에서 항상 입을 벌리고 잠들던 모습과는 달랐다. 빈소는 한갓졌다. 아들 이씨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조용한 빈소에서 그와 술을 나누었다. “국어사전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아예 없애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생계를 불법 링거 시술로 잇고 있다. 약국에서 전화가 오면 “링거 바늘을 꽂아주러” 간다. 병원에서 링거를 산 환자들의 집을 방문해서 혈관에 링거주사 바늘을 꽂아준다. “옛날에는 3만원이었는데, 요즘엔 5만원 정도 한다.” 드라마의 엑스트라나 광고 모델로 나오는 것도 그의 부업이다. 한번은 상조 광고를 찍었다. 최대한 ‘리얼’하게 찍어달라는 말을 들었다. 평생 아버지에게 맞기만 했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눈물, 콧물이 다 쏟아졌다. 광고주는 흡족해했다. 생전에 어머니는 “엄마가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도, 너는 아버지랑 사이가 좋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그는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 내가 잘못했다.” 번창하던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세상을 떴다. 의사가 되고 싶던 아들은 링거를 꽂아주면서 생계를 이었다. “이제 잘되겠죠.” 적십자병원을 나서는 기자에게 그는 말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11월의 끝자락은 무사히 지나갔다. 18일 뒤로 더 이상의 망자는 없었다. 호스피스에 남은 7명의 환자들은 한동안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기자가 병원에서 맡은 자원봉사 일도 여느 때와 같았다.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점심·저녁 때면 거동이 불편한 이승호(65·가명·남)씨나 최효인(62·여)씨의 식사를 도와줬다. 밖에 나가서 물건을 사달라거나, 커피를 타달라는 환자들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부탁하면 조금씩 누워 있는 자세를 바꿔주기도 했다. 간호사들이 무엇보다 무서워하는 것은 환자들의 욕창이었다. 간호사들은 보통 2시간마다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의 누운 위치를 바꿨다. 11월30일, 710호에 장경옥(64)씨가 입원한 날 자원봉사도 마무리했다. 11월 한 달 동안 4명의 환자가 세상을 떠났다. 보통 한 달에 사망자가 10명까지 이르는 점을 생각하면 비교적 조용한 한 달이었다.
최씨는 어떻게든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 싶었다.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치료는 무위로 그쳤다. 지난해 그는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최씨는 이제 서울 서초구의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고 있다.12월7일, 707호에 있던 김성범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호스피스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때는 저녁 7시40분이었다. 7층은 이미 조용했다. 710호 독실에서 김씨의 숨은 멎어 있었다. 향년 58살. 사슴처럼 맑던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의 부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 몸에 주입된 링거액은 피가 제대로 돌지 않으면서 몸속에 고였다. 망자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사망 시각은 저녁 7시22분이었다. 불과 18분 전까지 생명은 그의 몸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아내 최금자(56)씨가 준비한 검은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다. 앙상한 그의 손은 아랫배에 모아져 있었다. 손목에는 나무 묵주가 있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그의 머리 뒤 테이블에는 작은 십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두 개의 촛불과 작은 성수통 두 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을 덮은 노란색 이불 위에는 분홍색 조화 화환이 놓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을 찾은 아내 최씨가 김씨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말라붙은 그의 입술에 습기가 남았다. 최씨가 김씨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나 이제 병원 안 와도 된다. 만세다.” 그렇게 말하는 최씨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김씨가 암을 발견한 때는 2004년이었다. ‘뇌원발성악성림프종’이라는, 일종의 혈액암이었다. 편의점을 운영하던 평범한 부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재앙이었다.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엔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2년 김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작은 편의점을 열었다. 한동안 월수입이 400만원을 넘었다. 암은 순항하는 듯하던 두 부부의 삶에 걸린 급브레이크였다. 암에 걸린 김씨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게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매장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기 일쑤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잊는 일이 잦아졌다. 증상은 치매에 가까워졌다. 한겨울에 집을 나가 헤매기도 했다. 그를 보호하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아내가 달려나가기도 했다.
암투병에 밀려간 비닐하우스
최씨는 어떻게든 남편의 병을 낫게 하고 싶었다.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치료는 무위로 그쳤다. 지난해 그는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1979년에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치료 때문에 편의점은 이미 꾸리기 어려웠다. 2008년에 닫았다. 그렇게 유일한 생계 수단도 사라졌다. 13년 전에 당한 사기로 살림은 크게 기울어 있었다. 3억원 넘는 돈을 떼였다. “집이 날아갔다.” 최씨는 착하고 순한 남편이 이 일 때문에 “말도 못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 스트레스가 병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최씨는 이제 서울 서초구의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고 있다. 서초구의 헌인가구단지 근처 산자락에서 그는 매일 서울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병원을 찾았다. 밤에 비닐하우스로 걸어가는 길은 어두워 무서웠다. 혼자 성가를 부르면서 다녔다. 최씨는 “이제는 밤길도 무섭지 않고, 연탄을 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부부 금실은 좋았다. 입원 초기, 최씨는 “우리 남편 눈 깜짝”이라고 하면 말없이 누워 있던 김씨가 눈을 껌뻑였다. 최씨는 “남편이 병을 앓은 뒤로는 점점 아이같이 돼간다”고 말했다. 임종을 한 병원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니, 사망을 앞두고 최씨는 자신의 감정을 미처 감당하지 못했다. 수녀들과 간호사들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지내던 그였다. 최씨는 임종 순간에 “나만 혼자 남겨두고 어딜 가”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남편을 부여잡고 “미안해, 여보, 잘 가”라고 속삭였다. 죽음을 앞두고 환자의 몸에 퍼지는 청색증이 김씨의 팔과 다리를 덮었지만, 김씨는 쉽게 숨을 멎지 못했다. 죽어가는 사람의 혈압도 마지막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삶의 끈을 편하게 놓지 못한 이의 반응이었다.
기자가 병상을 찾았을 때, 남편을 임종하고 병실을 나온 최씨는 ‘사체인수증’에 사인을 했다. 표정은 굳었다. 서류에는 ‘위 사망자의 사체를 성가복지병원으로부터 인수함을 증명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인수된 주검은 그날 밤 성가복지병원 1층 냉동기에 보관됐다. 주검은 다음날 아침 고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김씨의 몸은 연구용으로 기증됐다.
이순임, 장인철, 이종길, 이경남, 김성범. 11월 이후 호스피스 병동은 5명의 환자를 떠나보냈다. 이들은 모두 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누구는 처음부터 가난했고, 누구는 중·상류층에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모두 자신의 사연을 가슴에 묻고 세상과 이별했다.
157만 명 중 5명의 임종일 뿐…
암은 5명 모두에게 각자의 사정이었고, 각자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만 볼 일일까. 개인을 떠나 집단으로 시야를 돌리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강원대 손미아 교수(예방의학) 등이 2008년 보건복지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암사망위험비는 소득 상위 19%(월소득 335만원 이상)에 견줘 극빈층인 의료급여 대상 집단이 1.55배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두 집단의 연령별 인구분포가 같다고 가정하면 소득 상위 19%에서 암으로 100명이 죽을 때, 의료급여 대상자는 155명이 죽었다는 뜻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세상을 떠난 5명의 소득이 상위 20%에 속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가정을 거치면, 5명 가운데 한두 명은 아직도 살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개인의 죽음을 집단으로 묶어낼 때 우리는 이렇게 다른 해석에 이르게 된다(26쪽 기사 참조).
생의 마무리를 성가복지병원에서 할 수 있었던 5명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일지 모른다. 이곳에서는 수녀와 간호사, 자원봉사자가 고인들이 세상 떠나는 길을 전송했다. 또 상대적으로 질 좋은 숙식과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보장받았다. 이들은 전국 157만 명에 이르는 기초생활수급권자 가운데 극히 일부 사례일 뿐이다. 이 5명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며 생의 마지막을 맞을까. 가늠하기 쉽지 않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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