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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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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건강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표지이야기] 생명 OTL-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총론뿐인 건강 형평성 제고, 숨 막히게 커지는 소득 격차…

소득 재분배 못하는 정부는 국민 건강 악화 방치해
등록 2011-01-27 01:55 수정 2020-05-02 19:26

1980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작은 책자 하나가 발간됐다. ‘블랙리포트’라 이름 붙은 책자는 겨우 260본만 인쇄됐을 뿐이었다. 3년 전 노동당 정권의 용역을 받아 제작됐지만, 대처 정권이 집권하면서 잊혀진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1977년 건강 자료를 분석한 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이를테면 비숙련 육체노동자의 사망률이 전문가 집단의 2배이고, 두 집단의 자녀 사망률은 3배 이상의 격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바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지식사회에서 메아리가 컸다.

극심하게 악화되는 불평등 지수

» 지난해 12월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의 청와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민이 행복한 따뜻한 대한민국”의 소득 불평등 지수는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해 12월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의 청와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민이 행복한 따뜻한 대한민국”의 소득 불평등 지수는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영국에서 국가 정책 과제로 건강 형평성 문제가 떠오른 것은 1997년이었다. 보수당 정권이 물러나고 노동당이 집권한 해였다. 블레어 정부는 전국의 26개 낙후지역을 대상으로 ‘건강활동구역’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영국 정부의 정책 방향을 집대성한 ‘애치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가 제시한 12가지 미래 정책 개발 분야를 보면, 모든 정책을 대상으로 건강 불평등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가늠하는 건강영향평가를 실시하고, 장애아동 학교에 추가적 재원을 제공하고, 연금 대상자에게 재정 지원을 확대해 노인 세대의 빈부 격차를 줄인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2009년 영국 정부는 건강 형평성 개선사업의 10년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특히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잉글랜드 전체와 낙후지역 사이의 평균수명 격차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고서를 보면 낙후된 지역으로 지정돼 예산 지원이 있었던 70개 지역에서 남녀의 평균수명은 1.9~2.9살이 늘었을 뿐이다. 잉글랜드의 전체 평균수명은 그사이 2.1~3.1살 증가했다.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연수를 받고 있는 윤태호 부산대 교수(예방의학)는 “건강 불평등 개선이 생각보다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면서도 “유럽 선진국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인 영국에서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정부의 접근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 교수는 그의 책 에서 “불평등 자체를 줄이지 않고 건강이나 사회문제를 줄이려는 시도는 마치 사회·경제적 불이익과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를 단절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면서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영국의 사례는 건강 형평성 사업에서 영국 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현주소는 어떨까.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핵심 쟁점이 있겠다. 첫째 정부가 얼마나 건강 형평성 의제에 적극적인가, 둘째 우리 사회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우리나라는 2003년에는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일본과 북유럽 4개국에 이어
여섯 번째로 분배 수준이 고른 나라였지만,
6년 사이에 여덟 번째로 떨어졌다.
‘평등 사회’에서 ‘불평등 사회’로 우리는 뒷걸음질하고 있다.

우선 우리 정부의 인식 수준을 보기 위해 ‘국민건강증진종합대책’을 펼쳤다. 종합대책은 우리나라 보건정책의 뼈대에 해당한다. 정부는 2003년과 2007년에 두 차례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현재 세 번째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공청회에서 제시한 종합대책 초안을 살펴보니, 종합계획의 2대 총괄목표 가운데 하나로 ‘건강 형평성 제고’가 제시됐다. 2007년에 만든 종합계획에도 같은 내용이 있었다. 문제는 각론이었다. 82쪽에 걸친 공청회 자료집에서는 건강 형평성을 높이기 위한 체계적인 정책들은 마련되지 않았다. 자료집은 건강 형평성 문제에 대해 “총괄에서 구체적인 지표를 세우지 않고 각 분과의 중점 과제에서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초안에서 건강 형평성을 이루겠다는 목표는 설정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없어서 정부가 정책 의지가 있는지 두고 볼 일”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우리나라의 소득분배 동향을 살펴봤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만큼 가진 이들과 없는 이들의 소득 격차가 빠르게 벌어졌다. 통계청이 지난해 내놓은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등 소득분배 지수를 보면 소득 불평등 정도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2003년부터 집계되고 있는 2인 이상 가구 집계 지니계수를 보면 2003년 0.293에서 2009년 0.319까지 커졌다. 지니계수는 0~1 사이에서 분포하는데, 0은 사회 성원이 완전히 동등하게 소득을 나눴을 때, 1은 가장 부유한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식했을 때 나오게 된다. 따라서 1에 가까워질수록 소득 불평등 수준이 커진다는 뜻이다. 불과 6년 사이에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0.026이나 늘었다. 부의 쏠림이 크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기준 지니계수를 보면 2009년 0.293이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보다 0.026이 낮았다. 이 말은 정부가 조세나 사회복지 급여 등 재분배를 통해 계급 간 소득 격차를 약간 낮췄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정부가 소득 형평성에 기여했다는 뜻이다.

스웨덴의 마법, 한국의 방치
» 전국 가구* 소득5분위 배율** 변화

» 전국 가구* 소득5분위 배율** 변화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의 구실이 얼마나 컸을까. 2009년에 나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낯이 뜨거운 수준이다. 일단 ‘분배 정책의 모범생’인 스웨덴의 시장소득 지니계수를 봤다. 우리보다 높은 0.43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소득수준이 불평등한 미국(0.46)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스웨덴 사회정책의 ‘마법’은 재분배 정책에 있다. 조세정책 등을 통해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0.23이 떨어졌다.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시장의 소득 불평등 수준을 절반으로 줄였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소득 재분배 효과인 0.026은 통계가 잡힌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OECD 평균인 0.14의 21%에 불과했고, 우리 다음으로 소득 재분배에 게으른 스위스의 0.07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이쯤되면 충분히 ‘작은 정부’다.

지니계수가 조금 추상적이라면, 소득 5분위 배율을 살펴보면 조금 더 쉽다(표 참조). 5분위 배율이란 소득 상위 20%가 소득 하위 20%보다 얼마나 더 벌어들이는지를 나타내는 배율이다. 쉽게 말해 ‘양극화 지수’인 셈이다. 2003년 소득 5분위 배율은 5.0이었는데, 2009년에는 6.1로 폭증했다. 시장에서 사회의 부는 상류층로 급격하게 쏠렸다는 뜻이다.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은 6년 사이 4.44배에서 4.92배로 늘었다. 정부의 조세·사회복지 정책으로 자원을 배분했지만 시장의 양극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뜻이다. 앞서 윌킨슨 교수가 에서 비교한 23개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2003년에는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일본과 북유럽 4개국에 이어 여섯 번째로 분배 수준이 고른 나라였지만, 6년 사이에 벨기에와 오스트리아에 처지면서 여덟 번째로 떨어졌다. ‘평등 사회’에서 ‘불평등 사회’로 우리는 뒷걸음질하고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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