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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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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없으면 노래 없으리, 노래 없인 삶도 없으리!

‘허깨비 자본’의 주인을 찾아 원정투쟁 나선 해고 노동자들,
그들을 따라 간 LA와 파리에서 절망과 희망을 보다
등록 2010-02-05 04:58 수정 2020-05-02 19:25
‘자본’은 수틀리면 자르고 공장 문을 닫는다. 국외로 떠나거나 숨는 게 항공권 예약하는 일처럼 쉽다. 자본의 세계 여행은 1960년대 미국 제조업계에서부터 본격화됐다. ‘인간’은 돌아보지 않은 채 ‘이익’만 좇는 그 여행은 한국에도 수많은 피해자를 남겼다. 콜트악기의 부평 공장, 콜텍의 대전 공장, 발레오공조코리아의 천안 공장, 승림카본의 안산 공장이 문을 닫았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은 물 밖 물고기처럼 퍼덕대지만 메아리가 없다. 하소연이나 담판은커녕 대면조차 힘든 자본 앞에서 노동자는 절규한다. 미치지 않으려고 가방을 싼다. 자유로이 세계를 이동하는 ‘글로벌 자본’을 뒤늦게 좇는다. 도처의 지구 노동자들이 한 달 제 몸값보다 비싼 비행기삯을 마련해가며 고단한 원정 투쟁을 떠나는 까닭이다. 그 노동자들의 세계 여행을 따라가봤다. 편집자
미국 한인사회 시민단체 ‘우리 문화 나눔회’가 애너하임컨벤션센터 앞에서 원정투쟁을 벌이는 한국의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지지·격려하기 위해 판을 벌였다.

미국 한인사회 시민단체 ‘우리 문화 나눔회’가 애너하임컨벤션센터 앞에서 원정투쟁을 벌이는 한국의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지지·격려하기 위해 판을 벌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쪽 도시 애너하임. 100만 명의 한인이 사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1시간 거리다. 해마다 1월이면 악기들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애너하임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남쇼’(NAMM Show)다. 신제품이 선보이고,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장식’이 되는 세계 최대 악기 박람회(1월14~17일)다.

부당해고·해고무효 판결에도 복직 안 돼

행사 내내 퀸시 존스, 오노 요코, 제이슨 므라즈, 스티비 원더를 발치 건너 마주칠 때마다 센터는 들썩거린다. 그 틈에서 무심하게 색소폰을 합주하는 부자를 만난다. 무릎을 꿇은 한 여인 앞에서 낮은 전자음으로 속삭여대는 중년 남성을 본다.

행사의 꼭짓점이 되는 1월16일 토요일 오후 5시, 1층 소형 콘서트장 주변은 북새통이다. 이름 없는 여가수의 노래에도 500여 명이 홀려 있다. 로비를 점점이 채워 지나기가 불편할 정도다.

음악은 인간의 본능을 가장 아름답게 대변한다. 악기산업 종사자, 초청객, 기자 등만 입장이 가능한 남쇼는 그 본능을 가장 우아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센터를 나서면, 바로 앞마당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메마른 ‘투쟁가’를 토해내는 콜트악기와 콜텍 노동자들을 만난다. 꿈을 깨는 ‘날벼락’ 같다. 도 예고 없이 만난다. “노동자가 없으면 음악이 없고, 음악이 없으면 삶도 없다!”(No workers no music, no music no life!)가 장단 맞춰 쇳소리로 터져나온다. 인간의 본능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음악들이다.

지난 1월8일 2명의 노동자가 미국 LA행 비행기에 오른다. 올해로 각각 23년·11년째 콜트·콜텍의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해온 방종운(52)·이인근(44)씨다. 하지만 그들의 일터는 실상 2007년(콜텍·대전 공장)과 2008년(콜트·경기 부평 공장)에 문을 닫았다. 마지막 노조위원장이었다.

비행기엔 두 벌 안팎의 옷가지를 챙긴 작은 가방 하나씩이 실린다. 박영호 콜트·콜텍 사장의 얼굴이 담긴 걸개그림이 실리고, 전단지와 붉은 머리띠도 여행길에 오른다.

실직자들이 ‘불순한’ 짐만 잔뜩 챙겨 이역만리를 가는 까닭엔, 12시간 비행 거리만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관심 갖지 않는다. 낡은 노래는 1절만 재창하기도 부담이다.

1970년대 세워진 콜트악기와 자회사 콜텍은 세계 기타 생산의 30%를 차지한다. 2006년 당기순손실을 입는다. 흑자경영 10년 만이다. 2007~2008년 국내 공장을 모두 문 닫는다. 당시 콜트악기 쪽은 “경영 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생산은 1993년과 99년에 세운 인도네시아·중국 공장으로 넘긴다.

‘위장폐업’ 비판이 거세다. 중앙노동위원회는 해고가 부당하다고 2008년 결정한다. 2009년 법원 판결이 쏟아진다. 콜트의 해고무효확인 행정소송(2심)에서 노동자 손을 들어준다. 민사소송(1심)도 “해고가 무효하며 원직 복직시킬 때까지 월평균 임금 등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콜텍 역시 지난해 11월 해고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791호 표지이야기 ‘2009 올해의 판결’ 참조)

회사는 눈이 없고 귀가 없다. 각각 항소·상고했다. 복직투쟁 1100일이 다 되어간다. 방종운씨는 2007년 9월 이후 박영호 사장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정말 희한한 사장”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노동자들이 자기 신세를 조졌다고만 하면서 완벽하게 외면한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왕복 200만원 남짓이다. 20년 기타 제조 남성 숙련공의 한 달치 월급을 넘는다. 이른바 ‘원정투쟁’이다.

근로 빈곤층의 피할 수 없는 세계 여행

급히 유행이 된다. 또 다른 무리가 1월19일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발레오공조코리아(충남 천안) 해고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일터도 지난해 말 사라졌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가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사항이다. 이들이 돌아오는 2월엔 승림카본(경기 안산) 해고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난다. 회사 경영권을 독일의 다국적 자본 ‘슁크’가 쥐고 있다. 노조와 갈등을 거듭하다 2007년 직장을 폐쇄했다.

사연은 다들 닮아 있다. 자본 철수 이후,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책임·윤리 경영 따위의 호소는 경영진의 귓등에도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경영진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거나 결정권이 없다. 권한 있는 경영진은 만날 수도 없다. 그림자도 없는 ‘허깨비 자본’은 노동자를 무력화한다. 그 때문에 발레오공조·승림카본 노동자들은 결정권 없는 국내 경영진을 넘어 그들의 ‘주인’과 직접 만나고자 한다. 국내 자본인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외국의 거래처나 고객을 직접 만나 호소하려 한다. 근로 빈곤층의 피할 수 없는 세계 여행이 된다. 지구 노동자의 비애다.

‘글로벌 자본’에 맞서기엔 본래가 미약한 이들이다. 자본의 여행 속도를 좇기엔 더딘 이들이다. 기자가 현장 취재를 하겠다며 합류한 1월12일 콜트·콜텍 원정단이 숙소로 삼은 사무실 풍경은 그 대목부터 웅변했다.

현지 노동인권단체인 한인타운노동연대(KIWA·소장 대니 박)의 지원을 받아, 사무실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잔다. 샤워는 할 수 없다. 미국에선 주거지가 아닌 건물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는다.

남쇼에 들른 여러 시민들이 한국 노동자들을 응원하며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애너하임 경찰은 1월14일 개막 당일, 앰프 사용을 금지하며 통제했다가 이튿날부터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남쇼에 들른 여러 시민들이 한국 노동자들을 응원하며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애너하임 경찰은 1월14일 개막 당일, 앰프 사용을 금지하며 통제했다가 이튿날부터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고추장 팔고 48명의 돈을 모으고

원정투쟁에 동참한 금속노조 양득윤 부위원장, 김성상 국제국장, 문화연대 이원재 사무처장도 아침저녁 세면대에 올릴 수 있는 부위만 닦는다. 홍일점으로 통역을 도맡은 재미동포 홍석종씨의 손톱엔 때가 끼어 있다. 기자의 손톱에도 정확히 이틀 뒤 때가 낀다.

방종운씨는 “처음 해외로 가는 거라 좀 설레기도 했다”고 말한다. 헛웃음을 자아낸다. 모든 여행이 각별할지언정, 노동자의 것만은 다르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48명이 돈을 모아 경비에 보탰다. 콜텍 노동자들이 고추장과 된장을 팔아 번 돈이 포함돼 있다. 콜트 해고 노동자 22명 가운데 여성이 13명이다. 낮엔 학교 급식 보조, 늦은 밤 목욕탕 청소를 해서 번 돈, 극장 청소로 번 여성 가장들의 돈도 경비에 포함돼 있다.

원정단이 몸으로 때워야 할 부채다. 다들 하루 서너 시간씩만 자며 원정시위를 버텨냈다. 아침은 때때로 굶고 점심은 햄버거로 해결한다. 방종운씨는 공수부대 시절 뱀도 잡아먹었는데, ‘미국의 전통 식량’엔 기겁했다. 햄버거를 먹지 않으려고 잠을 더 줄여 아침밥을 지었다.

귀국 때까지 한 번도 샤워를 못한 이인근씨는 아침 빗질은 거르지 않았다. 한국에선 외면받던 자신들의 사연을 들어줄 이들에 대한 최소의 예우처럼 보였다. 그리고 차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애너하임컨벤션센터 일대에서 하루 8시간가량 1천 장 안팎의 전단지를 돌린다. “콜트와 거래를 중단하라!”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국에 있는 동료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무 편한 시간이었다는 뜻이다. 우유팩 제조업체인 페트라팩(경기 여주) 해고 노동자들은 2007년 스위스로 원정투쟁을 가 석 달을 머물렀다. 천막농성을 했다. 단식투쟁도 했다. 그들도 한국에 남은 동료들에게 미안해했을 것이다.

원정단의 진짜 고통은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데 있다.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의 원정투쟁은 이번이 세 번째다. 복직투쟁을 하는 100여 명 노동자 가운데 4명이 참가했다.

‘고단한 여행’의 속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이 처음 여행가방을 싼 건 지난해 11월23일이다. 일본행이다. 10월23일 일본 발레오 본사가 주주총회를 통해 회사 청산 계획을 일방 통보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180명 노동자 전원에게 문자와 퀵서비스로 해고가 통보된다. 노조의 거센 반발에, 본사 책임자는 청산인을 대신해 노동자들과 면담하겠다며 11월17일 한국에 왔다. 하지만 공장 내 시위 현수막 등을 거두지 않았다며 돌아가버렸다.

노동자가 갔다. 일본에서 본사 경영진과의 면담이 성사됐으나 “청산을 철회할 의지는 전혀 없다”는 입장만 재확인했다. “발레오공조코리아는 경쟁력이 없고 고용승계 책임이 우리한테 없다”는 얘기는 2004년 공장을 인수할 당시의 태도와 너무 다르다. 지난해 12월 프랑스의 발레오그룹 본사로 향했다. 겨우 만난 경영진은 “위로금·재취업 등 후속 작업에 대한 교섭 권한을 한국 쪽 전 경영진에 맡겼다”고 말했다. 축구공처럼 돌려차인 셈이다.

이번 원정은 1월31일까지다. 파리 내 한인 민박집에서 머문다. 2차 원정 때와 달리, 그룹 경영진은 면담 자체를 거부한다. 현지 시민단체들의 호응도 기대에 못 미친다. 원정투쟁에 동참한 정원영 민주노총 충남본부장은 “공장 해외 이전 등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심각하지만, 우리와 달리 실직자한테 구직 때까지 지원금을 주거나 각종 세금 혜택을 통해 구직자와 실직자의 소득차가 적기 때문에 사회적 쟁점이 되는 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원정단은 아침 6시께 일어나, 이탈리아산 쌀로 아침밥을 꼬박꼬박 지어 먹는다. 그래야 본사까지 40여 분을 걷고, 해 질 때까지 시위를 하며 지지도 요청할 수 있다.

애너하임에서 만난 레오 제라드 전미철강노조 국제위원장의 말은 그래서 무게 있다. “세계화 시대에는 한 나라 문제가 다른 나라 문제가 된다. 국제적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은 더 가난한 국가로 이동하며 비슷한 문제가 되풀이되고 커진다.”

최대 거래처 펜더, 진상 조사 착수

발레오는 전세계 사업장에서 올해 1천 명을 추가 감축하기로 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서 갈등이 야기될지 내다보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한국 노동자의 문제로까지 엮인다는 건 분명하다. 원정단은 “이런 상황 때문에 (한국 공장에 대한) 발레오 쪽 입장이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전망한다.

반면 콜트·콜텍 원정단은 펜더(FMIC)가 ‘진상 조사’에 착수토록 이끌어냈다. 미국 제1의 기타 브랜드로, 콜트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하청을 주는 최대 거래처다. 원정 일정 마지막 날인 1월17일 펜더의 법률담당 마크 밴 블릿과 홍보담당 제이슨 파지트는 “당장 콜트에 준 주문을 중단할 순 없다”면서도 “(콜트의 노동 착취 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전했다. 블릿은 이후 콜트·콜텍 쪽 의견을 듣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본래 다른 약속이 있는데, 대표가 이 자리에 꼭 참석한 뒤 내용을 직보해달라고 지시해서 왔다”고도 말했다.

만남 자체가 대단히 의미 있다. 콜트는 법원 판결도 거부했다. 자본은 오직 자본에만 복속한다는 태도다. 그런 콜트가 ‘갑’으로 삼는 가장 큰 ‘자본’을 만난 것이다.

세계적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가 펜더에 편지를 보냈다. 남쇼에서 전단지를 받아든 여러 악기상도 펜더에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LA 등지 100여 개 인권단체와 노조도 원정투쟁단에 지지의 뜻을 밝혔다.

발레오공조코리아 원정단은 7명으로 꾸려졌다. 한국 노동자의 원정투쟁 소식을 접하고 발레오 그룹 본사 앞까지 찾아와 연대를 표명한 프랑스 솔리데어 노총 활동가에게 금속노조 정혜원 국제부장이 최근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발레오공조코리아 원정단은 7명으로 꾸려졌다. 한국 노동자의 원정투쟁 소식을 접하고 발레오 그룹 본사 앞까지 찾아와 연대를 표명한 프랑스 솔리데어 노총 활동가에게 금속노조 정혜원 국제부장이 최근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진짜 힘은 자본보다 ‘소비시민’에게서 구해진다. 지난 1월14일 한 여인이 대뜸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다가오더니 “이곳에 와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6년째 악기점 두 곳을 운영하는 크리스틴 스피아크다. “기타 같은 악기는 겉은 화려하고 예쁜데 속은 안 그런 경우가 많다”며 “크래프터 같은 한국 브랜드를 팔고 있는데, 콜트는 앞으로도 취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국내에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연대다.

뜻밖의 힘을 만나다

일본 기타 브랜드 ESP의 사장과 부사장은 시위 중인 원정단을 직접 찾아와 “우린 콜트·콜텍과 상관없으니 플래카드에 넣은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맷 매시안다로 사장은 “콜트 쪽과 만난 적은 있지만, 신뢰가 가지 않아 거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관심 없는 연대는 불가능하다. 톰 모렐로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원정단이 준비한 전단지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2007년 분신을 시도한 이동호씨가) 정말 분신했느냐, 죽었느냐?” “한국의 법은 뭘 하고 있느냐?”

독일 악기제조업체 ICM의 지그프리트 아커는 “1980년대 OEM을 주며 콜트 공장에 여러 차례 가봤다”며 “OEM을 주면 어디든 프로젝트 매니저가 현지 공장을 가보기 때문에, 지금 상황을 펜더가 모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일러준다.

더 내밀한 관심들이 있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고 연일 수면이 부족해 원정단은 예제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유학 중인 한의사 우호창씨가 이들을 챙겼다. 하루, 이틀 걸러 늦은 밤 숙소인 KIWA 사무실을 찾아 침을 꽂았다. KIWA의 대니 박 소장이나 윤우찬 목사 등은 아침저녁으로 왕복 2시간 거리의 애너하임으로 원정단을 태워다줬다. 여러 교민이 저녁마다 식사를 대접했다. 상당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차린 시민분향소를 계기로 어울렸다. 정치·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하길 주저하던 이들이었다. 덕분에 진보 시민세력의 외연이 조금씩, 대신 더 견고하게 확산 중이다. 양득윤 부위원장은 “교민들이 없었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고 잘라 말한다.

남쇼 행사장 내 콜트 부스는 중급 규모다. 그러나 1월16일만큼은 어느 브랜드의 부스보다 붐볐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진 시먼스(그룹 키스)가 콜트 기타를 사용하기로 하며 홍보 행사에 참여한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콜트 직원들이 시먼스 인터뷰는 물론, 줄 서 기다리는 이들과의 인터뷰도 방해했다. 서진모 해외영업팀 과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걸 말해서 나쁜 이미지를 주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직원은 “내가 아는 열에 여덟은 (원정시위 때문에) 한국 이미지가 나빠진다고 한다”며 “(기자)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회사 망하고 일자리를 잃으면 어쩔 거냐”고 말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결락 없이 모두를 이해했으나, 가장 불편하고 본데없는 언어였다. 이미 오래전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센터 밖에서 시위를 잠시 멈추고 점심용 햄버거를 먹고 있었을 낮 1시께다.

콜트는 미국 법인 웨스트하이머를 통해 현지 유통이 된다. 이곳 대표 잭 웨스트하이머는 “밖에 (시위하는) 몇 명이 있는 걸 안다”며 “그들과 만나 얘기할 뜻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번 한국의 작업장을 가봤는데, 노동법을 잘 지키는 기업이었다. 그들이 극단적으로 얘기한다”고도 말했다.

행사장을 빠져나오는 진 시먼스를 붙잡고 ‘콜트 문제’를 겨우 물었다. “너도, 나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시먼스의 답은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는 톰 모렐로의 것만큼이나 명료했다. 공인으로서 관심을 둬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그건 너무 시적인 말”이라며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자를 수 있고, 그만둘 수도 있고, 그럼 다른 직업을 구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본과 음악의 견고한 결합이었다.

실제 콜트 쪽은 철저히 원정투쟁단을 외면했다. 단 한 차례 대응이 있었다. 콜트 원정투쟁을 방송한 현지 라디오 프로그램에 반론 보도를 요청한 것이다. 그 또한 명료했다. “(이 시위엔) 금속노조가 배후 세력이고 그들(방종운·이인근씨)은 콜트·콜텍의 노동자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탈제조업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산업 수요를 예측하고 정부 차원의 인력 조정과 지원책을 마련하는 게 우선적 대응으로 꼽혀왔다. 산업연구원은 2005년 이를 담당할 기구로 국가경쟁력위원회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페트라팩 원정투쟁에 동참했던 화학섬유연맹 정기진 조직국장은 “구제금융 위기 이후 수많은 다국적기업이 한국에 와 혜택을 받고 이익을 챙겼지만, 정작 자본이나 공장이 철수할 때 받는 규제는 별로 없다”고 지적한다. 다들 2000년 초반부터 되풀이되던 얘기다. 노동자들 처지는 달라진 게 없다.

1월16일 애너하임컨벤션센터 앞. 오후 5시30분을 넘어서며 해는 마지막 볕 하나를 겨우 붙들고 있다. 한 백인 남성이 원정단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레 “당신들이 시위에 쓰던 그림을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한다. 허리춤까지 오는 거추장스런 소품을 들고 가는 그를 붙잡았다. 크리스 프레이슈(42)는 이유를 묻자 “학생들한테 부당한 노동 현실에 대해 가르칠 때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미 동부 샌프란시스코에서 7년째 중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다. 그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상품이 저렴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고통이 반드시 숨어 있다.”

물론 프레이슈에게 콜트·콜텍은 그 범주조차 넘어선다. “(해고나 공장 폐쇄 등은) 인간적으로 옳지 않다.” 함께 남쇼를 찾은 토비 하월(36·LA 중학교 교사)도 같은 그림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그림 중 하나를 그가 먼저 챙긴 것이다. 얇은 널빤지엔 기타를 몸통으로 삼은 노동자의 판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일하고 싶다.” 한마디가 더해져 있다.

미국 중학생에 보낼 ‘새 반론’은

연대는 저 홀로 분열하고 자라는 세포가 된다. 이제 LA와 샌프란스시코의 중학생들도 콜트·콜텍의 경영윤리를 알게 될 것이다. 콜트·콜텍은 훗날 이들을 위한 ‘새 반론’을 내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원정단이 모두 떠난 1월18일 화창하던 캘리포니아 날씨는 돌변했다. 10년 만의 폭우가 쏟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차가워졌다. 도시는 종일 윙윙댔다. 이번 원정투쟁에 하늘의 연대도 있었음을 원정단은 알지 못한 채 여행가방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갔다.



원쟁투쟁 약사
먼저 쓰러지는 건 노동자


세계적으로 투기자본 논란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조업 이동은 1960년대 미국에서부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노조 조직화와 그로 인한 비용 상승이 문제가 됐다. 한국에도 일찌감치 다국적 자본이 들어왔다.
1990년 전후 마산·창원 수출자유지역에서 주로 일본의 제조업체가 야반도주하며 종종 말썽을 일으켰다. 1989년 일본 현지 원정투쟁을 떠난 수미다전자, 아세아스와니, TND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원정투쟁사의 시작이라 볼 만하다. 집단해고와 경영진 도주로 문제가 된 수미다전자 사례는 특히 유명하다. 여성 노동자 4명이 현지서 단식농성까지 감행했다. 투쟁 기간만 206일이다. 당시 수출자유지역은 외국 자본이라면 ‘어서 옵쇼’ 하던 때다. 그러나 싼 노동력을 찾아왔던 기업은 이익 폭이 줄면 바로 사업을 접거나 중국과 동남아로 이주했다. 임금 체불 상태의 도주도 적지 않았다. 제반 규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투기자본의 ‘먹튀’ 문제가 본격적으로 더해졌다. 배경이 무엇이든 결론은 ‘일터 증발’이다.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되던 2000년, 노조가 자체적으로 대표단을 꾸려 미국에 보낸다. GM 주주총회까지 참석해 대우차의 노동 착취를 고발하고 인수 때 고용·노동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2003년 한국네슬레 노동자들은 국내 직장 폐쇄 계획에 맞서 본사가 있는 스위스로 갔다. 노사 갈등이 극렬해 원정투쟁까지 전개됐으나 이후 합의점을 모색했다. 드물게 원정투쟁 끝 타결이 이뤄진 경우다. 2007년 페트라팩 해고 노동자들은 스위스에서 3개월을 머물었다. 스웨덴 자본으로 스위스에 본거지를 둔 채 한국 공장을 폐쇄했다. 노동자들은 단식투쟁과 천막농성을 감행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한라라파즈는 하청업체인 우진기업에 노조가 결성되자 폐업을 단행해, 프랑스 원정투쟁을 불렀다. 두 곳 모두 본사와 심도 있는 타협이 이뤄졌으나 모두 결렬됐고, 지금은 복직투쟁 자체가 흐릿해졌다. 갈수록 사태가 장기화되기 때문이다. 먼저 쓰러지는 건 노동자다.
2008년 한국씨티즌정밀지회·기륭전자, 2009년 콜트·콜텍의 독일·일본 원정투쟁, 발레오공조코리아의 일본·프랑스 원정투쟁이 이어진다. 원정투쟁이 중소 제조업체 근로 빈곤층의 ‘숙제’로 굳어진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애너하임(미국)=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파리(프랑스)=정원영 민주노총 충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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