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기관차처럼 거침없는 ‘정리해고’의 물결에 돌 하나 던져졌다. 특히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의 제1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쟁점이 됐다. 보기 드문 풍경이다. 이야말로 대개 경영진 논리가 거침없이 수용되며 실상 사문화한 원칙에 가까웠던 탓이다.
2004년 1월 대법원의 판례가 큰 변곡점이 됐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는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지 않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하여 인원 삭감이 필요한 경우도 포함한다.” 이후 경영계는 물론 정부 쪽도 ‘긴박한’이란 단서를 아예 법규에서 지워야 한다고 주문한다. 단순한 ‘경영 전략’ 차원에서도 정리해고는 가능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방기해서는 안 돼”거대한 흐름에 맞선 꼴이다. 인천지법 민사11부(재판장 최은배, 배석판사 정현식·서영호)는 지난 5월14일 대표적 기타 생산업체 ‘콜트악기’의 해고 노동자들이 제기한 해고무효 확인 소송에서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노동자들에겐, 해고가 시작된 2007년 4월 이후 2년여 만에 전해진 복음이다. 재판부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업은 주주나 투자자의 의사에 따라 운영되고 정리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존재하게 된 많은 사회적 요인에 따라 존속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단순히 도산의 위험성이나 장래 막연한 경영상 위기라는 이유로 그 기업을 폐지하여 근로자를 해고하고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긴박한 경영상 필요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 판례와도 뚜렷하게 선을 긋는다. 눈대목이다.
이어 재판부는 회사 쪽이 제기한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재판부는 “해고 당시 회사의 경영 상태가 성장성 또는 수익성 측면에서 나빠지고는 있었다 할지라도 안전성 측면에서는 매우 양호했다고 볼 수 있다”며 “종합하면 해고를 해야 할 정도의 경영상 필요 또는 그 긴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해고가 부당하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에 맞서 콜트악기가 제기한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 행정소송 1심 판결과도 배치되는 판결이었다. 서울행정법원 12부(재판장 정종관, 배석판사 권창영·정혜은)는 지난해 10월 “주문량이 줄고 동종 업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단기간에 매출이 확대되거나 재무 상태가 현재보다 개선될 여지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해보면, 경영상 해고해야 할 긴박한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회사 쪽 손을 들어줬다.
행정소송 2심 재판부도 같은 결론회사는 민사소송에 대해, 노동자 쪽은 행정소송에 대해 각각 항소했다. 하지만 행정소송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1부(재판장 안영률, 배석판사 신헌석·조정현)는 지난 8월13일 민사소송 1심 판결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며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이란 제1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근거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2000년 이후 2006년에 처음으로 당기순손실이 발생했을 뿐이고 △30%라는 높은 비율의 전자기타 세계시장 점유율에 계속 신상품을 내고 있는 점 △2006년 유동비율(315%)과 부채비율(37%)이 동종 업계 평균치인 103.9%와 168.35%에 견줘 크게 양호한 점 등을 세목세목 적시했다.
외면받던 노동자들의 허기를 채우는 숫자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천지법의 민사소송 1심 판결과 서울고법의 행정소송 2심 두 판결문을 보면 △2006년 10월과 2007년 12월 관리직 사원들을 승진시키고, 해고 전후 특히 관리직 사원들의 임금을 인상하거나 △목표 생산량을 맞추려고 해고일(4월12일)부터 그달 29일까지 연장·휴일 근로를 시켜 평균 근로시간이 전년 평균치보다 330% 증가한 사실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해고를 통해, 남은 생산직은 노동시간이 늘고 관리직은 임금이 늘어난 셈이다. 재판부는 “주문량 감소로 인한 구조조정이라는 사측의 설명과 배치된다”고 꼬집었다.
콜트악기의 역사는 현대 한국 노사갈등사의 한 단원으로 꼽을 만하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담은 경영지표와 핵심 정보만으로도 기업사의 골격이 그려진다. 국내 2위의 전자악기 제조업체로, 2006년 8억5천만원의 당기순손실을 입는다. 정확히 10년 흑자경영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부평공장 노동자 160명 가운데 56명을 정리해고한다. 지난해 8월엔 공장문을 아예 닫는다. 당시 콜트악기는 “국내 기타 생산은 수익성이 없다”며 “그래도 유지하려 했으나, 경영 적자와 노사 갈등 때문에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공장이 2003년 전후로 해외 공장에서 만든 ‘반제품’의 마무리 공정을 떠맡다가 정리해고 분쟁, 노조와의 갈등을 거치며 그마저도 없앤 것이다. 노조는 ‘위장 폐업’으로 본다.
가공할 추진력을 내보이는 회사에 대항하려고 노동자들은 공장 앞에 천막을 세웠다. 때로 원효대교 끝 송전탑에 올랐다. 단식 농성을 벌였다. 주목받지 못했다. 메아리도 없었다. 기댈 건 디케(정의의 여신)가 든 저울 뿐이다. 이 사건 민사·행정 소송에서 노동자 쪽 변호를 맡은 김선수 변호사는 “그간 정리해고 관련 소송에서는 노동자 편을 들더라도, 해고 회피 노력이나 절차상의 문제가 배경이 된 게 대부분이었다”며 “그와 달리 이번엔 긴박한 경영상 필요라는 요건부터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는 논지가 전개되었다”고 말했다.
노동계 안팎에서 ‘올해의 판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1990년대 말 ‘도산 회피’만을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보던 관례에서 점차 완화돼, 이젠 ‘경영 합리화’를 위한 조처까지도 폭넓게 인용하는 추세가 막강했던 탓이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 김진 변호사는 “경영상의 이유는 회사가 장부를 들이대기만 해도 필요성이 인정됐으나, 이번 판결은 재판부가 최초로 감사보고서 수준의 분석을 거쳐 그렇지 않다고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올해 노동 관련 판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고 평가한다.
현재 행정소송은 대법원에, 민사소송은 서울고법에 계류 중이다. 회사가 불리한 판결에 맞서 각각 상고, 항소한 결과다. 지난 11월27일엔 자회사 콜텍도 해고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이 잇따르지만, 복직된 이는 전무하다. 복직할 회사가 공식적으론 사라진 상태다. 김선수 변호사는 “폐업 이후 복직 문제를 어떻게 할지가 민사소송의 또 다른 쟁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쪽 폐업으로 복직은 여전히 불투명세 번째 맞는 겨울의 바람을 콜트악기 공장 앞 천막은 여전히 막지 못한다. 1천 일이 훌쩍 넘는다. 방종운 노조위원장은 “대법원 판결까지 나와야 회사 쪽 대응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조차도 복직은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고 노동자들은 2010년 1월14~17일 회사가 참여하는 악기박람회 '남쇼‘(미국 캘리포니아)에 원정 복직투쟁을 하러 떠날 계획이다. 그들의 해맞이가 된다. 항소에 진 콜트악기도 국내 5위권의 법무법인을 추가 선임해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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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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