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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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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올해의 판결] 대법원, 그 유쾌한 진화

집회·표현의 자유 부문②
검찰 기소 내용 답습한 경직된 하급심 일깨우며 집회의 자유 범위 넓힌 대법원 판결
등록 2009-12-23 08:46 수정 2020-05-02 19:25

조직의 건전한 변화는 대개 밑에서 ‘치받으면서’ 일어난다. 젊은 감각과 새로운 생각이 기존 관습에 반기를 들 테니까. 위에서 내려오는 ‘지침’은 변화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보수적이라는 사법부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을 흔드는 작지만 의미 있는 판결이 나타났다.

대법원은 “삼보일배 행진 자체가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폭력성을 내포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2005년 5월23일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원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행진하는 모습. 한겨레 김종수 기자

대법원은 “삼보일배 행진 자체가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폭력성을 내포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2005년 5월23일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원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행진하는 모습. 한겨레 김종수 기자

‘평화적 행진’ 수백 명 체포, 무더기 기소

2005년 5월23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민주노총 건설운동노동조합 덤프연대 주최로 ‘덤프노동자 생존권 결의대회’가 열렸다. 700여 명이 모였지만 참가자의 절대다수는, 업체들의 단체교섭 거부로 상경투쟁에 돌입한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원이었다. 이들 노조원 600여 명은 직접 교섭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깃발과 현수막을 흔들었다. 그리고 편도 2개 차로를 이용해 청와대를 향해 ‘삼보일배’를 시작했지만 경찰은 참가자 전원을 연행했다. 애초 신고와 달리 ‘울산 플랜트건설 노조원의 집회’로 성격이 변질돼 결과적으로 미신고 집회가 됐으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이요, 교통을 방해했으니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노조 간부 등 200여 명을 벌금 100만~2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이들은 울산에서 정식 재판을 청구했지만 100만원 안팎의 감액된 벌금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하지만 남궁현 전국건설산업연맹 위원장 등 노조 간부 7명과 이해삼 민주노동당 비정규직철폐본부장은 서울중앙지법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2006년 11월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 박준민 판사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들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이 집회는 덤프연대가 주최한 덤프노동자 생존권 쟁취 결의 신고대회와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 집회로 미신고 집회에 해당”하고 “삼보일배 행진의 경위, 행진 시간·경로·방법 등에 비춰볼 때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당 행위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재판장 김한용, 배석판사 김도균·송인경)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단이 달랐다. 지난해 7월 대법원 3부(주심 김영란)는 “시위를 신고한 주최자가 그 주도 아래 행사를 진행했다면 목적·일시·장소·방법 등의 신고 범위를 현저히 일탈했어도 이를 신고 없이 시위를 주최한 행위로 볼 수 없다”며 사건을 항소심으로 돌려보냈다. 방송차량·무대시설 등을 덤프연대가 준비하는 등 집회 신고자와 주최자가 일치하는 한, 집회 내용이 변했다고 해도 ‘미신고 집회’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을 내려받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임종헌, 배석판사 남기용·김혜란)는 대법원이 지적한 딱 그 부분(집시법 위반)만 무죄로 바꿔 30만원이 깎인 벌금 20만원을 선고했다.

피고인들의 상고로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갔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생각의 진화’가 이뤄진다. 삼보일배에 따른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도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지난 7월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는 애초 집회신고서에 편도 2차로를 통한 행진이 예정됐다는 점을 들며 “삼보일배 없이 천천히 (행진이) 진행된 경우와 달리 볼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삼보일배 방식의 행진은 표현의 자유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며 “이는 시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합리적인 범위에서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삼보일배 행진, 표현의 자유 영역 안 벗어나”

이제 사건은 두 번째 파기환송심이 예정돼 있다. 3년여에 걸쳐 끈질기게 ‘법정 싸움’을 벌인 이해삼씨는 “귀찮아서 그냥 벌금을 내고 상소를 포기한 사람도 많았은데, 작은 사안이지만 재판을 끝까지 하자고 했다”며 “상식이 통한다면 무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상식을 통하게 한 대법원의 판결. ‘어른들’의 진보는 무겁지만 유쾌하다.



■ 심사위원 20자평
오창익 평화적 행진을 한 수백 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경찰의 깡다구에 제동을!
최강욱 시위의 자유는 공익을 위한 것!
금태섭 뙤약볕 아스팔트에서 삼보일배 하는 분들이 형벌을 두려워할까마는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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