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법규범을 모아놓은 게 민법이다. 민법이 모든 법규범의 기초로 여겨지는 이유다. 우리 민법 2조는 민법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해놓고 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대학 1학년생 원아무개(당시 20살)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86년 9월2일이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원씨는 60mm 박격포 탄약수로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해안 및 탄약고에서 실탄과 수류탄을 지참한 상태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그의 중대는 다른 중대보다 군기가 센 편이었다. 선임병들은 한 달에 몇 차례씩 후임병들을 화장실 뒤편으로 불러냈다.
특히 축구시합에 진 날엔 주먹질이 매웠다. 힘겨워하던 원씨는 동료 병사들에게 자주 “다른 소대가 부럽다”는 말을 했단다. 1987년 9월 무렵엔 해안경계 도중 자살을 하려다 선임병에게 들켜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1988년 1월10일 일요일, 그예 파국이 찾아왔다.
그날 오후 소대 대항 축구시합이 열렸다. 원씨가 속한 본부소대팀은 꼴찌를 했다. 운동신경이 무뎠던 원씨는 시합 도중 헛발질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임병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인마! 확실히 해.” 시합이 끝나기가 두려웠을 터다.
예상대로였다. 선임병 정아무개 병장은 원씨를 포함한 후임병 5~6명을 화상실 뒤로 불러냈다. 뭇매가 이어졌다. 그날 저녁 6시30분께 원씨는 휴가갈 때나 입는 군복을 입고 깨끗이 닦은 군화까지 신고는 초소 근무를 나갔다. 40분 뒤인 그날 저녁 7시10분께 원씨는 초소에서 나와 자신의 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탕, 탕, 탕. 세 발이 발사됐다.
사건을 조사한 사단 헌병대는 사망 원인을 ‘총기에 의한 자살’로, 자살 동기를 ‘애인의 변심, 건강 문제로 인한 신병 비관 등’으로 결론내렸다. 1988년 3월3일 부모에게 전달된 수사 결과 문서에는 “상급자로부터 구타나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며, 고 원 상병이 속한 내무반은 화기가 넘치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고 덧붙였다. 오래도록 이어질 외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2006년 1월 대통령 소속으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군의문사위)가 꾸려졌다. 원씨 부모는 그해 4월21일 진정서를 냈다. 군의문사위는 2008년 6월5일 마침내 원씨의 자살 동기를 밝혀냈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이 돼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인정한 게다.
원씨 부모는 군의문사위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3월26일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1심 재판에서 국가 쪽의 주장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씨 부모는 항소했다.
항소심은 서울고법 민사12부(재판장 서명수, 배석판사 남성민·안병욱)가 맡았다. 10월7일 공표된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잘못 인정 않고 또 상고“군 수사대는 조금만 수사를 더 했다면 실제 자살 동기를 쉽게 알 수 있었음에도 개인 사정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으로 (원고 쪽이) 인식하게 했으니,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신의칙에 반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국가는 애초 거짓을 말했다. 억울한 죽음임이 밝혀진 뒤에는 ‘소멸시효 완성’을 내세우며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원도 관행처럼 그 논리를 답습했다.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국가는 즉각 상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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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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