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님!”
2006년 4월27일, 제주특별자치도 청사 2층. 김태환 제주도지사의 비서관 한아무개씨가 비서실장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사무실 안은 검찰의 압수수색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씨는 옆구리에 도지사 집무실에서 들고 나온 서류 뭉치를 끼고 있었다. 도지사의 업무일지와 메모지 등이었다. 수사관과 검사가 그에게 다가와 “들고 있는 서류를 압수하겠다”고 했다. 한씨는 거부했으나 실랑이 끝에 검사가 서류를 압수해갔다.
압수 대상 아닌 사무실의 서류까지 압수
전날 제주지검은 김태환 제주도지사와 그 측근들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법원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현직 지사로 재출마한 김 지사가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무원을 동원한 선거운동을 기획했다는 혐의였다.
영장에 명시된 압수수색 대상은 오아무개 제주도청 기획관, 김아무개 특별보좌관, 김아무개 기획관실 행정 6급 공무원 등 3명의 사무실에 보관 중인 관련 자료였다. 비서관 한씨는 압수수색 대상자가 아니었고, 그가 들고 있던 서류 또한 압수수색 대상 장소에 보관 중인 서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씨는 영장을 구경도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서관 한씨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피의자인 특별보좌관 김씨와 비서실장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당시 김씨가 부재 중이어서 수사관은 비서실장에게 영장을 제시하고 수색을 시작했다. 검찰은 특별보좌관 김씨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만을 갖고 있었지만 비서실장의 책상까지 수색해 노트북컴퓨터를 압수해갔다.
5개월 뒤, 비서실장과 한씨는 제주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무려 5개월 만에 ‘압수 목록’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압수 목록에는 한씨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와 비서실장의 노트북컴퓨터 등이 ‘임의 제출’ 형식으로 압수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압수 목록의 작성일은 공란이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세 장면은 이후 재판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2007년 1월 제주지법 제4형사부(재판장 고충정, 배석판사 이계정·박재경)와 2007년 4월 광주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조영철, 배석판사 박현·이관진)는 김태환 지사에게 당선무효형인 벌금 600만원을 선고했다. 여기엔 압수물이 큰 근거가 됐다. 현직 도지사가 다가오는 선거를 위해 공무원을 동원해 지역별로 선거운동 네트워크를 조직한 사실 등이 압수된 문건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일환 대법관)는 2007년 11월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된 증거는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김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행위를 입증할 유력한 증거들인 △2004 제주도 업무일지 △15개 지역·29개 직능별로 선거운동 책임자를 지정한 ‘지역별·직능별 특별관리 조직책임자 현황’ △산남 지역을 7개로 쪼개 총책을 지정한 문건인 ‘산남지역 책임자 추천의 건’ △주간보고 등이 모두 증거능력을 잃었다. 이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국내 첫 판결이다.
대법원은 압수수색 과정의 위법 사항을 조목조목 짚었다. 우선 영장을 보지 못한 채 서류 뭉치를 뺏긴 비서관 한씨의 상황은 명백한 위법이란 점이 지적됐다. 대법원은 “현장에서 압수수색을 당하는 사람이 여러 명일 경우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헌법 12조 3항은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118조도 ‘압수수색영장은 처분을 받는 자에게 반드시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선거에 공무원 동원’ 혐의는 사실이지만…형사소송법 219조와 109조 2항은 피의자가 아닌 사람의 물건에 대한 압수수색이 필요한 경우 엄격한 요건 아래 영장을 발부받도록 규정하고 있는 만큼, 피의자가 아닌 한씨에 대해 별도의 영장 없이 서류를 압수한 점도 위법이었다.
대법원은 또 검찰이 압수수색 대상 장소에 보관 중인 물건이 아닌, 한씨가 그곳에 일시적으로 가져온 물건을 압수한 점, 한씨가 압수를 거부하자 검사가 “검찰에 가서 조사를 받고 주겠냐”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 압수물을 제출받은 점도 잘못으로 꼽았다.
‘압수 목록’과 관련한 위법 사항도 여럿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압수수색 5개월 뒤에야 압수 목록을 대상자에게 보여준 데 대해 대법원은 “압수물 목록은 피압수자 등이 압수물에 대한 권리 행사 절차를 밟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므로 압수 직후 현장에서 바로 작성하여 교부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또 압수 목록에는 서류 뭉치 등을 ‘임의 제출’ 형식으로 받았다고 적혀 있는 반면, 압수 조서에는 압수물들을 ‘강제 압수’했다고 쓰여 있다. 압수 목록 작성 날짜도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대법원은 “작성월일을 누락한 채 일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으로 작성하여 5개월이나 지난 뒤에 압수 목록을 교부한 행위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원칙’을 확인했다. “압수수색영장에 기재한 문언은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고 피압수자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유추 해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해도 (진실 규명과 사법 정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평가되는 경우라면)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함부로 인정하게 되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김태환 지사 쪽 변호인단은 처음부터 이 사건의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문제제기에 주력했다. 대법원은 공개 변론까지 열어가며 위법하게 수집된 압수물의 증거능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끝에 김 지사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됐고 광주고법 형사2부(재판장 김상철, 배석판사 박홍래·조재건)는 2008년 1월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따라 김 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검찰은 재상고를 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 대법관)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피고인이 누구냐와 별개인 ‘수사 원칙’의 문제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김태환 지사는 지난 6월 또 한 차례 검찰 수사를 받았다. 이번에는 업무추진비 횡령 혐의였다. 이 사건 역시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이 내려졌다. 지난 8월에는 제주도민들이 김 지사의 주민소환투표를 발의했다. 5만1044명이 주민소환 동의 서명에 참가해 주민소환 발의 요건인 10%(4만1649명)를 훌쩍 넘겼다. 이에 따라 치러진 주민소환 투표에서 저조한 투표율로 끝내 주민소환은 불발에 그쳤지만, 광역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가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김태환 지사 개인은 이처럼 많은 잡음에 휩싸인 인물이지만, 그로 인해 나온 이번 판결은 압수수색영장 집행의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의미가 크다. 김 지사의 변론을 맡았던 문강배 변호사는 “이번 판결 이후에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에 포괄적인 범죄 사실을 써넣고 아무 곳이나 가서 압수하는 관행이 사라지게 됐다”며 “수사는 불편해졌을지 모르지만 인권 면에서 진보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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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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