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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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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올해의 판결] ‘용산의 눈물’이 작은 열매를 맺다

경제정의 부문 ①
올해 들어 재건축·재개발 사건에서 조합원 권리와 민주주의 절차 강조한 판결 잇따라
등록 2009-12-23 15:47 수정 2020-05-03 04:25

재개발·재건축 동의와 관련해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이 얼마의 비용을 부담하면 몇 평짜리 아파트를 분양(소유권 귀속)받게 되느냐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상 조합 설립의 동의 사항에 ‘비용 분담에 관한 사항 및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항’을 두어 주민들 자신이 어느 정도의 비용을 투입해 어느 정도 규모의 건물을 소유할 수 있는지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이라고 밝히고 있다.

법원은 그동안 재건축·재개발 관련 법적 다툼에서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조합과 시공사 쪽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용산 참사 이후 엄격한 의견 수렴 절차와 민주주의적 조합 운영에 무게를 두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았다. 조합 설립 무효 판결이 내려진 서울 중구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지구 전경.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법원은 그동안 재건축·재개발 관련 법적 다툼에서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조합과 시공사 쪽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용산 참사 이후 엄격한 의견 수렴 절차와 민주주의적 조합 운영에 무게를 두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았다. 조합 설립 무효 판결이 내려진 서울 중구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지구 전경.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사업 진행 도중 분담금·평형 변경 예사

그런데 서울시 조사를 보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민의 부담금이 70~80%씩 상승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막연한 정보만 주면서 큰 부담 없이 큰 평수의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것처럼 기대를 갖게 해놓고, 막상 구체적인 비용 분담을 정하는 관리처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거액의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재개발·재건축 사업 현장마다 분쟁이 끊이지 않고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성동뉴타운 사업이 대표적이다. 20평형대 소형 아파트를 분양받는 데도 조합원의 부담금이 2억원에 달했다. 소득수준이 뻔한 영세 가옥주들은 입주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부담금 규모를 어느 정도라도 알렸더라면 주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재건축·재개발 사업 진행과 관련해, 올해 들어 법원이 잇따라 주목받을 만한 판결을 내놓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서울고법의 ‘순화 제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 설립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2008나38341)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중구 순화동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은 5년 전 조합이 설립돼 사업이 추진돼왔다. 그런데 주민들이 서명한 재개발 동의서에는 대지 면적, 건축 연면적, 전체적인 규모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사업 결과 자신들이 소유하게 될 건물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용 분담과 관련해서도 철거비 4억원, 신축비 914억8900만원, 기타 신축 비용 279억3100만원과 합계액(1198억2천만원) 만 기재돼 있을 뿐, 그와 같은 금액이 산출된 내역에 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비용은 일반 분양 수입금 및 조합원 분담금으로 충당하고 부족분은 공평하게 부담한다”는 ‘공자님 말씀’ 한 줄이 전부였다.

결국 조합원 김아무개씨 등은 조합 설립 부존재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김씨 쪽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민사16부(재판장 강영호, 배석판사 유진현·고종영)는 지난 3월19일 내린 판결에서 △시작 단계에서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제공 없이 동의를 받아 조합이 설립됐고 △이후 세 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치며 조합원의 구체적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의 정보가 변경됐는데도 최초의 재개발 동의에 필요한 80%의 동의를 다시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조합 설립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의 이같은 판결은 지금까지 지적돼온 재건축·재개발의 두 가지 큰 문제점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담고 있다.

중요한 내용 변경땐 엄격한 동의 절차 밟아야

첫째, 비용 산출 및 소유권 귀속과 관련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동의서의 내용은 주민들이 비용 분담액 및 소유권 귀속을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볼 수 없어 재개발 동의가 무효이고, 따라서 조합 설립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시공사와 재개발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설계가 변경되거나 비용이 증가되기 때문에 조합 설립 단계에서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정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애초 비용 분담의 산출 기준이 이후 사업 시행 단계에서 다시 비용 분담에 관한 합의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구체적이거나 △장차 사업에 참가할 경우 그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일단 진행된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처음에 잘못이 있어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과거 판례와는 사뭇 다른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사업비 분담 및 소유권 귀속과 관련해 투명하고 엄격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밝힌 판결은 올해 다른 법원에서도 여럿 나왔다. 부산 감천1구역 주택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부산고법 2008나16905), 부산 해운대 중동1구역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부산동부지법 2008가합1759), 서울 금호19구역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서울동부지법 2008가합13270), 서울 도봉2구역 주택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서울북부지법 2008가합3903)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재판부들은 주민들에게 비용 분담이나 소유권 귀속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동의를 받은 불투명한 조합 설립 행위는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았다.

두 번째는 재건축·재개발 사업 진행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은 재개발 논의 과정에서 조합원이 부담할 평당 공사비를 427만3천원에서 47만2천원을 늘려 474만5천원으로 정했다. 또 세 차례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아파트의 평수 배정을 크게 변화시켰다. 64세대를 신축할 예정이던 40평형대 이하의 아파트가 16세대로 대폭 축소되고, 80평형대 이상 아파트가 추가되는 등 전체적인 사업 기조가 고급 아파트 신축으로 변경된 것이다.

조합은 1심 판결 뒤 조합원 46명으로부터 동의를 받아 하자를 치유했다고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조합 설립 당시 토지 소유자 등 78명에 대한 동의 요건인 5분의 4(63명), 또는 현행 도정법 소정의 동의 요건인 4분의 3(59)명에 모두 미치지 못함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비록 일반 분양금 수익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조합원이 입주하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크게 늘어난다면 최초의 재개발·재건축 조합 설립 때처럼 엄격한 동의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지금까지는 조합원 과반수 결의만으로 부담금 인상이나 설계 변경을 밀어붙여온 게 현실이었다.

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으로 인해 법원에서 조합 설립 무효 판결이 내려지면 공사가 중단된다. 이는 조합원은 물론 조합과 시공사 모두의 피해로 이어진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으로 인해 법원에서 조합 설립 무효 판결이 내려지면 공사가 중단된다. 이는 조합원은 물론 조합과 시공사 모두의 피해로 이어진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무책임 행정의 후과, 용산 참사

최근 몇 년간 난개발·과속개발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은 극심해졌지만, 행정기관은 무책임 행정을 보여왔고 법원 또한 방임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올해 초 용산 참사는 그런 무책임 행정이 빚은 전형적인 사례다. 올해 들어 법원이 재개발·재건축 행정과 관련해 확연히 달라진 판결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스런 현상이다.

우선 재개발이 필요할 정도로 노후하지 않은데 개발이익만을 좇아 재개발지구를 지정하는 행정처분에 잇달아 제동을 건 판결이 여럿 나왔다. 무허가 건물인지 여부 등을 묻지 않고 노후·불량 건축물이 50% 이상이면 주거환경개선사업 도시정비계획 수립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경기도 조례는 상위법인 도정법에 위반된다는 서울고법 판결(2008누35431)이 대표적이다. 이 판결에서는 또 노후·불량 건축물의 수, 무허가 건축물의 수, 호수 밀도 중 어느 하나만 충족하면 주거환경개선사업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경기도 도시환경정비조례도 무효라고 밝혔다. 상위 법령에서 재개발을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명시했는데,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이 가운데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켜도 된다고 정한 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이밖에 주거이전비 지급 대상자를 선정하는 기준 시기를 정비지구지정 공람일이 아니라 사업시행계획 인가일로 늦춰야 한다는 서울고법 판결(2008누34711판결)도 사회적 약자의 주거권 안정에 큰 의미를 지닌다. 흔히 정비지구지정 공람일 이후 3~4년이 지나야 비로소 사업시행계획 인가가 이뤄져 이주가 시작돼, 그 사이에 들어온 세입자 등은 주거이전비를 받지 못해왔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최근 대법원은 종전에 민사소송으로 진행돼온 재개발·재건축 조합 설립 무효소송이나 관리처분계획 결의 무효확인 소송 등을 행정소송으로 진행해야 한다면서 모든 사건을 행정법원으로 이송시키도록 했다. 결국 여러 해에 걸쳐 소송을 진행해온 조합·건설사 쪽과 주민들은 다시 1심부터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됐다.

사법부는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재개발·재건축 분야에서는 그 명언이 간단히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개발 위주 정책과 개발이익에 혈안이 된 이해관계자들이 도사린 ‘현실’의 힘은 막강했고, 법원은 ‘다른 쪽에도 바쁜 일이 많다’는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남근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은 “올해 들어 재개발·재건축 분야에서 법원이 보여준 새로운 태도 변화는 그 의미가 적지 않다”며 “개발사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치를 조화시키고 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법원이 움직이기 시작한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심사위원 20자평
김영진 무차별 개발이 능사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다
오창익 지금까지 누구를 위한 재개발이었는지?
김남근 한번 도장 찍고 봉 되는 영세 가옥주, 쫓겨나는 원주민….

‘재개발 난맥’ 책임 큰 중앙정부와 지자체
단체장만 결심하면 부조리 많이 줄 텐데


재개발·재건축 사업에서 불투명한 사업 관행이 자리잡게 된 데는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무책임한 재개발 행정이 한몫하고 있다. 개발사업의 속도만 강조한 나머지 막상 사업이 시작되면 영세 가옥주나 세입자의 억울한 하소연은 팔짱을 끼고 모른 체하는 것이다.
국토해양부에서 ‘표준동의서’라며 만든 동의서 양식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이미 여러 차례 판결에서 구체적인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정보 제공의 기준에 한참 함량 미달이어서 조합원들로부터 표준동의서 양식에 따라 동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무효라고 밝혔다. ‘표준’이란 말이 머쓱해진 셈이다.

실무적으로는 지방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미 수많은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이 ‘팔짱 행정’으로 난장판이 된 지 오래지만, 서울시가 뒤늦게라도 조합 설립과 시공사 선정 등 초기 단계에서 공공관리제도를 도입하고 책임 행정을 펼치겠다고 밝힌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아직은 시범사업에 머물고 있을 뿐이고, 직접 인허가권을 가진 일선구청에서는 이런 정책 변화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법원 판결 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관할구청이 서울시에 단 한 곳도 없을 정도다.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추가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기왕에 투명한 재개발·재건축 진행을 위해 공공관리제도를 도입했다면, 설계·철거·토목·건축·설비·전기·조경 등 구체적 공사 항목별 공사비를 재개발·재건축 동의 단계에서도 추정할 수 있는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업 초기부터 주민들이 면밀한 사업성 검토를 할 수 있다. 사업 추진 단계에서 서울시가 표준공사비를 제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표준공사비보다 너무 높은 공사대금을 책정한 사업시행계획은 일선 구청에서 승인을 하지 않도록 행정지도에 나서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사실 조합 설립 인가, 사업시행계획 승인, 관리처분계획 인가, 착공 승인 등 재개발·재건축의 각 단계가 모두 관할관청의 행정적 책임을 거친다. 따라서 단체장이 ‘주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재개발·재건축을 시작할 수는 없다’ ‘조합원 부담금을 70~80%씩 인상하는 재개발사업은 인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결심하면 지금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일들은 대부분 미연에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앙정부가 재개발·재건축 등 도심 개발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개발 드라이브 정책을 펼치고 있고, 이와 맞물려 지자체에서는 ‘빨리빨리’라는 속도 행정과 팔짱 행정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이어진다. 2009년 서울시에서 재개발·재건축으로 멸실되는 주택이 3만1천 가구인데, 전세 수요를 감당할 단독·다가구 주택의 공급은 1만1천 가구에 불과했다. 결국 전세 대란이 일어났고 서민들은 짐을 싸 외곽으로 밀려나야 했다. 2010년에는 4만8천 가구가 멸실될 예정이라는데, 전세 대란이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김남근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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