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재건축 동의와 관련해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이 얼마의 비용을 부담하면 몇 평짜리 아파트를 분양(소유권 귀속)받게 되느냐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상 조합 설립의 동의 사항에 ‘비용 분담에 관한 사항 및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항’을 두어 주민들 자신이 어느 정도의 비용을 투입해 어느 정도 규모의 건물을 소유할 수 있는지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업 진행 도중 분담금·평형 변경 예사
그런데 서울시 조사를 보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민의 부담금이 70~80%씩 상승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막연한 정보만 주면서 큰 부담 없이 큰 평수의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는 것처럼 기대를 갖게 해놓고, 막상 구체적인 비용 분담을 정하는 관리처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거액의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재개발·재건축 사업 현장마다 분쟁이 끊이지 않고 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성동뉴타운 사업이 대표적이다. 20평형대 소형 아파트를 분양받는 데도 조합원의 부담금이 2억원에 달했다. 소득수준이 뻔한 영세 가옥주들은 입주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부담금 규모를 어느 정도라도 알렸더라면 주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재건축·재개발 사업 진행과 관련해, 올해 들어 법원이 잇따라 주목받을 만한 판결을 내놓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서울고법의 ‘순화 제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 설립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2008나38341)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중구 순화동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은 5년 전 조합이 설립돼 사업이 추진돼왔다. 그런데 주민들이 서명한 재개발 동의서에는 대지 면적, 건축 연면적, 전체적인 규모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사업 결과 자신들이 소유하게 될 건물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용 분담과 관련해서도 철거비 4억원, 신축비 914억8900만원, 기타 신축 비용 279억3100만원과 합계액(1198억2천만원) 만 기재돼 있을 뿐, 그와 같은 금액이 산출된 내역에 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비용은 일반 분양 수입금 및 조합원 분담금으로 충당하고 부족분은 공평하게 부담한다”는 ‘공자님 말씀’ 한 줄이 전부였다.
결국 조합원 김아무개씨 등은 조합 설립 부존재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김씨 쪽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민사16부(재판장 강영호, 배석판사 유진현·고종영)는 지난 3월19일 내린 판결에서 △시작 단계에서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제공 없이 동의를 받아 조합이 설립됐고 △이후 세 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치며 조합원의 구체적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의 정보가 변경됐는데도 최초의 재개발 동의에 필요한 80%의 동의를 다시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조합 설립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의 이같은 판결은 지금까지 지적돼온 재건축·재개발의 두 가지 큰 문제점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담고 있다.
중요한 내용 변경땐 엄격한 동의 절차 밟아야첫째, 비용 산출 및 소유권 귀속과 관련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동의서의 내용은 주민들이 비용 분담액 및 소유권 귀속을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볼 수 없어 재개발 동의가 무효이고, 따라서 조합 설립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시공사와 재개발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설계가 변경되거나 비용이 증가되기 때문에 조합 설립 단계에서 비용 분담과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정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애초 비용 분담의 산출 기준이 이후 사업 시행 단계에서 다시 비용 분담에 관한 합의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구체적이거나 △장차 사업에 참가할 경우 그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일단 진행된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처음에 잘못이 있어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과거 판례와는 사뭇 다른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사업비 분담 및 소유권 귀속과 관련해 투명하고 엄격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밝힌 판결은 올해 다른 법원에서도 여럿 나왔다. 부산 감천1구역 주택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부산고법 2008나16905), 부산 해운대 중동1구역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부산동부지법 2008가합1759), 서울 금호19구역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서울동부지법 2008가합13270), 서울 도봉2구역 주택 재개발조합 설립 무효소송(서울북부지법 2008가합3903)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재판부들은 주민들에게 비용 분담이나 소유권 귀속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동의를 받은 불투명한 조합 설립 행위는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았다.
두 번째는 재건축·재개발 사업 진행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순화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은 재개발 논의 과정에서 조합원이 부담할 평당 공사비를 427만3천원에서 47만2천원을 늘려 474만5천원으로 정했다. 또 세 차례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아파트의 평수 배정을 크게 변화시켰다. 64세대를 신축할 예정이던 40평형대 이하의 아파트가 16세대로 대폭 축소되고, 80평형대 이상 아파트가 추가되는 등 전체적인 사업 기조가 고급 아파트 신축으로 변경된 것이다.
조합은 1심 판결 뒤 조합원 46명으로부터 동의를 받아 하자를 치유했다고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조합 설립 당시 토지 소유자 등 78명에 대한 동의 요건인 5분의 4(63명), 또는 현행 도정법 소정의 동의 요건인 4분의 3(59)명에 모두 미치지 못함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비록 일반 분양금 수익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조합원이 입주하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크게 늘어난다면 최초의 재개발·재건축 조합 설립 때처럼 엄격한 동의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지금까지는 조합원 과반수 결의만으로 부담금 인상이나 설계 변경을 밀어붙여온 게 현실이었다.
최근 몇 년간 난개발·과속개발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은 극심해졌지만, 행정기관은 무책임 행정을 보여왔고 법원 또한 방임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올해 초 용산 참사는 그런 무책임 행정이 빚은 전형적인 사례다. 올해 들어 법원이 재개발·재건축 행정과 관련해 확연히 달라진 판결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스런 현상이다.
우선 재개발이 필요할 정도로 노후하지 않은데 개발이익만을 좇아 재개발지구를 지정하는 행정처분에 잇달아 제동을 건 판결이 여럿 나왔다. 무허가 건물인지 여부 등을 묻지 않고 노후·불량 건축물이 50% 이상이면 주거환경개선사업 도시정비계획 수립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경기도 조례는 상위법인 도정법에 위반된다는 서울고법 판결(2008누35431)이 대표적이다. 이 판결에서는 또 노후·불량 건축물의 수, 무허가 건축물의 수, 호수 밀도 중 어느 하나만 충족하면 주거환경개선사업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경기도 도시환경정비조례도 무효라고 밝혔다. 상위 법령에서 재개발을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명시했는데,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이 가운데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켜도 된다고 정한 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이밖에 주거이전비 지급 대상자를 선정하는 기준 시기를 정비지구지정 공람일이 아니라 사업시행계획 인가일로 늦춰야 한다는 서울고법 판결(2008누34711판결)도 사회적 약자의 주거권 안정에 큰 의미를 지닌다. 흔히 정비지구지정 공람일 이후 3~4년이 지나야 비로소 사업시행계획 인가가 이뤄져 이주가 시작돼, 그 사이에 들어온 세입자 등은 주거이전비를 받지 못해왔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최근 대법원은 종전에 민사소송으로 진행돼온 재개발·재건축 조합 설립 무효소송이나 관리처분계획 결의 무효확인 소송 등을 행정소송으로 진행해야 한다면서 모든 사건을 행정법원으로 이송시키도록 했다. 결국 여러 해에 걸쳐 소송을 진행해온 조합·건설사 쪽과 주민들은 다시 1심부터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됐다.
사법부는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재개발·재건축 분야에서는 그 명언이 간단히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개발 위주 정책과 개발이익에 혈안이 된 이해관계자들이 도사린 ‘현실’의 힘은 막강했고, 법원은 ‘다른 쪽에도 바쁜 일이 많다’는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남근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은 “올해 들어 재개발·재건축 분야에서 법원이 보여준 새로운 태도 변화는 그 의미가 적지 않다”며 “개발사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치를 조화시키고 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법원이 움직이기 시작한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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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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