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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 5명 중 1명 “나 또는 동료가 성상납 강요받았다”

단독 입수한 한국예술인노동조합 183명 설문조사…
PD·기업인·정치인 등 10여 명의 ‘가해자 리스트’도 존재해
등록 2009-07-09 13:05 수정 2020-05-03 04:25

고 장자연씨의 죽음으로 그 일단이 드러났던 연예계 성상납·접대의 실상이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됐다. 참혹한 진실이었다. 연기자 1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19.1%인 35명이 ‘나 또는 동료가 성상납을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5명 중 1명꼴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 단독 입수한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한예조)의 ‘인권침해 실태 설문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장자연씨 사건 이후 증폭돼온 연예계 인권침해 의혹이 수치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접대 강요’도 34.4% 달해

연기자 5명 중 1명 “나 또는 동료가 성상납 강요받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연기자 5명 중 1명 “나 또는 동료가 성상납 강요받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한예조는 지난 4월 탤런트 지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벌였다. 제2, 제3의 장자연 사건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체 탤런트의 95%에 달하는 2천여 명에게 설문지를 보내 183명의 회신을 받았다. 한예조는 실태조사와 함께 ‘심층 설문조사’도 진행했다. 성상납·접대·폭행 등의 인권침해를 당한 연기자들에게 가해자의 이름을 적어내게 했다. 이를 통해 한예조는 PD·기업인·정치인 등 10여 명의 ‘가해자 리스트’도 확보한 상태다. 살아남은 ‘장자연’들이 작성한 ‘제2의 장자연 리스트’인 셈이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먼저 ‘인권침해나 금품 요구를 받은 적이 있느냐(중복 답변 가능)’고 물었다. 이에 대해 조사에 참여한 연기자 중 24.6%(45명)가 ‘직접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본인이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동료의 피해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는 응답은 68.2%(125명)에 이르렀다.

이어 구체적인 피해 유형을 묻는 질문(중복 답변 가능)에 ‘성상납’을 지목한 이가 응답자의 19.1%인 35명이었다. ‘접대 강요’를 짚은 이는 34.4%에 달하는 63명이다. 이밖에 △금품 요구 78명(42.6%) △폭언·폭행 18명(9.8%) △인격 모독 72명(39.3%) 등도 있었다.

지난 3월 자살한 장자연씨가 남긴 문건에는 자신이 당한 폭행·성상납·술접대 강요 등의 정황과 PD·기업인·언론사 대표 등 가해자의 이름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장씨는 문건에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한예조의 심층 설문조사 결과는 또 다른 ‘장자연’들이 남몰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그들은 구체적인 ‘가해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예조는 확보된 ‘가해자 리스트’까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10여 명의 이름이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의 직업은 방송사 PD, 작가, 방송사 간부, 연예기획사 관계자, 정치인, 기업인 등이다. 피해 연예인들은 가해자 이름과 소속, 지위 등의 정보를 적어냈다.

중복되는 이름 10여 명 추린 ‘리스트’

문제갑 한예조 정책위 의장은 “꽤 많은 배우들이 가해자를 밝혔고 그중 중복되는 이름이 여럿이어서 추려보니 10여 명이었다”고 밝혔다. PD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 3사의 PD가 모두 거론됐으며, 그중엔 이미 금품 요구 등으로 처벌받은 적이 있는 PD도 포함됐다. 문 의장은 “리스트가 있다고 해도 피해자들이 나서지 않으니 구체적인 정황을 밝히기는 어렵다”며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한예조 차원에서 가해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대응 방식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장자연씨의 죽음이 일회성 사건이 아님은 잇따르는 사건들도 말해준다. 장씨 자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신인 가수를 성폭행하고 동영상을 찍어 협박한 소속사 대표가 경찰에 적발됐다. 지난 6월26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소속 신인 여가수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성폭행 동영상’을 찍고 술접대를 강요한 연예기획사 대표 김아무개(47)씨를 구속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스무 살 가수 지망생이던 2007년, 김씨를 만나 계약을 맺었다. 이후 소속사가 지정한 오피스텔에서 감시를 당하며 살던 여가수는 급기야 지방공연길에 호텔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소속사는 그 장면을 촬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김씨가 “믿고 투자하려면 성관계를 하는 동영상을 찍어야 한다”며 여가수를 협박했다고 전했다. 동영상 촬영 뒤에도 김씨는 여가수에게 지속적으로 성관계와 성상납을 요구했다. 여가수가 거부하면 폭행을 하거나 전속 계약서를 내세워 수억원의 위약금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 63명이 지목한 ‘접대 강요’도 이 사건에 여지없이 등장했다. 김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강남 소재 ㅂ주점에서 신인 여가수가 방송사 관계자, 기업인, 정치인 등 ‘고급 손님’을 접대하도록 했다.

세 곳을 옮겨봐도 모두 부당한 요구

고등학교 시절 잡지 모델로 데뷔한 A양의 첫 소속사 사장은 “내가 널 뭘 믿고 밀어주냐”며 자기의 애인이 되어달라고 했다. 40대 사장은 고등학생 신인 배우에게 성상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A양이 거절하자 소속사는 그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계약 기간 2년 동안 A양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A양은 이후 세 곳의 소속사를 거쳤지만 모두 그에게 부당한 요구를 했다. 두 번째 소속사는 유명 스타도 소속된 중견 업체였다. 그곳에선 매니저가 나서 스폰서 제안을 했다. A양이 한 드라마에 캐스팅돼 미팅까지 마친 상황에서 매니저가 “영화사 임원 하나가 널 보고 마음에 든다며 개인적으로 보자고 한다”고 말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냐고 따지자 매니저는 “그렇게 안 하면 일 못한다”고 협박했다. 결국 A양은 스폰서 제안을 거절했고, 미팅까지 마친 드라마에선 그의 배역이 사라졌다.

유명 여배우와 같은 소속사에 들어간 신인 배우 B양의 경우엔 접대 요구에 순진하게 응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드라마 출연을 위해 얼굴도 익힐 겸 감독과 술자리를 하자는 소속사의 연락을 받고 나간 자리였다. 소속사와 드라마 제작자 등은 B양에게 지속적으로 술을 강요했다. 그러다가 같이 춤을 추자며 껴안았다. B양은 도망쳤다. 다음날 소속사는 B양에게 화를 내며 “계약금을 3배로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당시 충격을 받은 B양는 지금까지 별다른 연기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례들이 몇몇 연예인의 불행이 아니라 연예계의 ‘공공연한 문제’임을 이번 실태조사는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관계에서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62.3%(114명)에 해당하는 연기자가 ‘성상납을 비롯한 각종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다가 캐스팅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답했다.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캐스팅 불이익’은 가장 효과적으로 연예인들을 옥죈다. 이밖에도 16.9%(31명)는 인격모독을, 9명은 음해·협박을, 7명은 폭언·폭행을 거부의 대가로 받았다.

“대응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

상황이 심각하지만 ‘공공연한 문제’는 좀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연예인들의 지독한 절망이 묻어난다. 53.5%(98명)의 응답자가 ‘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법적 대응을 포기했다고 했다. 나머지 20명(10.9%)은 ‘2차 피해가 두려워서’, 14명(7.7%)은 ‘방법을 몰라서’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응답자 중 배우 4명은 ‘법적 대응을 한 적이 있으나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으니 괜한 우려는 아닌 셈이다. ‘법적 대응으로 피해 구제를 받았다’는 응답은 2명(1.1%)에 불과했다.

법적 대응을 포기하는 속내는 복잡하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이다 보니 “내가 이렇게 당했다”고 폭로하기가 쉽지 않다. ‘법적 대응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질문에, 우선 75명은 ‘캐스팅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까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34명은 ‘신상 정보가 공개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11명은 가해자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동료들의 지탄과 비난, 대중의 악성 댓글도 인권침해에 맞설 용기를 잃게 만든다.

문제갑 의장은 “현재 성상납, 접대 등 소속사 쪽 요구를 다 거절하고 스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예능 PD는 “하루에도 잘 봐달라며 인사 오는 신인이 셀 수 없이 많다”며 “돈도 연줄도 없는 신인이 스폰서를 해주겠다는 기업인, 방송 출연을 시켜주겠다는 방송사·소속사 관계자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연예인들은 아팠다. 응답자 가운데 33.3%(61명)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일반인의 15%가 우울장애를 겪는 것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23.5%(43명)가 불면증, 12%(22명)는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고 응답했다. 지속적인 불안감을 호소한 이들도 32.3%(59명)였다. 13명은 알코올중독으로까지 발전한 상태였다. ‘자살’로만 표출되던 연예인들의 우울증 실태다. 지난 3년간 자살했던 배우 이은주·정다빈·최진실씨 등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연기자 인권침해 실태 설문조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연기자 인권침해 실태 설문조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33%가 우울증, 12%가 대인기피증

그래서 이미 연예인들은 인권침해에 무기력해져 있다. 실태조사에서 ‘인권침해나 부당한 요구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35.5%(65명)는 ‘인권침해나 부당한 요구는 어쩔 수 없는 대중문화 예술계의 오랜 관행’이라고 말했다. 열에 셋 이상이 인권침해를 관행으로 받아들였다. 한 여배우는 “오랜 관행이란 인식이 있다 보니 주변 동료가 성상납 등의 피해를 당하는 것 같아도 섣불리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분위기라는 얘기다. 가해자 처벌 자체가 약하다는 비판도 있다. 응답자 중 62명은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가 미흡했기 때문’에 잘못된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고 답했다. 지난 4월24일 장자연씨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서도 언론사 대표 등 유력 인사의 이름은 빠져 ‘용두사미’란 지적이 나왔다. 55명은 ‘집단적으로 해결하려는 연기자들의 노력이 미흡했다’고 자성했다. ‘캐스팅을 노린 연기자 개인의 이기주의’를 탓한 이도 57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연예인을 꿈꾼다. 지난 5월 87회 어린이날을 맞아 가 초등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여학생들이 꼽은 장래희망 1위가 가수, 탤런트 등 연예인이었다. 같은 시기, 우리는 연예인 183명이 증언한 인권침해의 현실을 봤다. 이 극명한 모순을 그대로 둔다면 장자연씨 사건과 같은 불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김응석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조 위원장 인터뷰
“문제를 알리는 것도 죽는 것만큼 힘들다”


김응석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조 위원장.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김응석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조 위원장.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2008년 5월, 그는 삭발을 했다. 연예인의 기본 출연료 인상, 복리후생비 지급 등을 방송사에 요구했다. 그렇게 김응석(42)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한예조) 위원장은 11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신고식’을 치렀다. 취임 1년 즈음엔 ‘장자연씨 사건’이 터졌다. 그는 국내 최초로 연예인 대상의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했다. 7월3일 서울 여의도 한예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가해자 리스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실태조사 결과 자신이나 동료가 성상납 요구를 받았다는 응답이 연예인 5명 중 1명꼴이다. 결과를 어떻게 보나.
=솔직히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나 역시 방송일을 한 지 24년이 됐는데 신인 때부터 들어오던 일이다. 한데 모두 쉬쉬하니 실체를 밝혀낼 수가 없었다. 이번 실태조사로 조금이나마 그 수치가 확인됐다고 본다.
-설문을 실시한 까닭은.
=장자연씨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런 일에 피해자 개인이 나선다는 건 어렵다. 양심선언을 하고 싶어도 이건 배우 인생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인생까지 걸어야 하는 문제다. 이 때문에 연예인 개인이 아닌 노조 차원에서 나서 실태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예인들이 말하길 꺼리는 문제라 조사가 어렵지 않았나.
=반송용 봉투까지 넣어 설문지를 우편발송했다. 아무래도 응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그렇게 낮은 회수율은 아니라고 본다. 동료 중 한 명은 설문지에 “익명으로 설문을 작성하지만 특정일에 있던 사건을 쓰면 내가 누군지 알려질까 두렵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심층 설문을 통해 가해자 리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안다.
=(리스트가) 있다. 다만 배우들이 가해자 이름을 쓰면서도 정황을 쓰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봐 무척 불안해했다.
-리스트를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가.
=간부들과 논의 중이다. 우리가 무슨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와도 논의 중이지만 아직 리스트를 넘기진 않았다. 고민 중이다. 만약 가해자로 거론된 사람 중 억울하게 음해된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장자연씨 사건 관련 수사 상황을 어떻게 보나.
=어린 여배우가 자살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죽지 않고 살아서 이런 문제를 알리는 것도 죽는 일만큼 어렵다. 사건 수사에 큰 기대를 했는데 그런 수준으로 수사가 안 돼서 안타깝다. 소속사 사장도 소환됐으니 수사를 재개해서 확실히 밝혀내길 바란다.
-성상납 등 가해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일이 더는 있어선 안 된다. 가해자들도 가족이 있을 텐데 내 딸, 내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 이제 그런 부당한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장자연 사건 수사를 통해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줬으면 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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