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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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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잊혀지고 피해자는 사냥감으로

사랑과 폭력을 오가는 대중의 관심,
작은 루머까지 확대재생산되며 2·3차 피해 시달리는 연예인들
등록 2009-07-09 01:43 수정 2020-05-02 19:25
“장자연씨의 죽음, 성역 없이 수사하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3월18일 경기 분당경찰서 앞에서 제대로 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연합 김인유

“장자연씨의 죽음, 성역 없이 수사하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3월18일 경기 분당경찰서 앞에서 제대로 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연합 김인유

2005년 1월 이른바 ‘연예인 X파일’이 폭로된다. 연예계가 발칵 뒤집혔다. 등장 인물들을 놓고 온 사회가 수군댔고, 도덕과 윤리를 재단했다. 연예인 개인을 넘어, 직군 자체가 ‘인권 수몰지대’에 불가항력적으로 내몰려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때만큼 연예인들이 한 몸으로 반발한 사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런데 가해자인 제일기획과 피해자 간 합의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빼곤, 누구도 ‘이후’를 알지 못한다. 이 사건의 기승전결은 연예인 인권 착취의 특수한 구조와 문제 해결의 한계를 상징한다.

취재 결과, 당시 연예인 X파일 소송을 무마하기 위해 제일기획이 연예인 소속사에 제안한 합의금이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창립 종잣돈으로 고스란히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피해 연예인이 소속된 45개 기획사는 비상대책위를 꾸려 연예인 X파일을 만든 제일기획을 상대로 명예훼손,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고소인은 연예인 59명이었다. 처음 10억원을 제안했던 제일기획은 비상대책위와 물밑 협상을 벌여 ‘연예 발전 명목’으로 12억원 출연을 약속하며 합의를 이끌었다. 결국 소송은 제기 20여 일 만에 취하되고, 연예인 최초의 ‘광고 보이콧’도 철회됐다.

‘연예인 X파일’ 사건 합의금의 행방

‘권력자들’ 사이의 손익계산도 빠르게 이뤄졌다. 합의금은 피해자며 고소인인 연예인 대신, 소속사들의 이익 도모, 매니저 처우 개선 등을 사업목표로 삼는 협회 결성에 전용됐다. 국내 최대 광고기획사가 수백 명 연예인들에 대해 주관 평가로 값을 매긴 ‘폭력 상술’, 악성 루머까지 죄다 모아 경력화한 ‘인격 살인’도 빠르게 망각됐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홍종구 부회장은 “합의금은 연예인들에게 물어 협회 결성과 차후 사업기금으로 쓰자는 동의를 받았다”며 “기획사의 서비스나 질을 높이는 게 연예인의 것(처우)도 높이는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당시 비대위에 참여했던 한 소속사 대표는 “사회에 기부하자거나, 아예 합의 자체가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묻혔다”고 말했다.

이렇게 연예인 자신의 인권 문제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대응조차 한 차례 ‘퍼포먼스’로 귀결되고 만다. 초특급 연예인이 아닌 이상, 광고주와 소속 기획사에 복속될 수밖에 없는 전복 불능의 구조 탓이다.

그래서 당초 법이 낄 틈이 좁다. 실제 당시 소송을 대리했던 법무법인 한결은 제일기획은 물론 비상대책위로부터도 사실상 배제됐다. 한결 쪽은 “(제일기획이 합의를 위해) 공식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기획사 대표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당시 기자회견에서 밝히기도 했다. 한결의 윤복남 변호사는 “당시 비상대책위로부터 합의했으니 취하하겠다는 지시가 내려온 게 전부”라고 말한다.

법도 ‘2차 피해’ 막지 못해

법이 그들 편이 되기 어렵다. 연예계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 자체가 권력자가 만든 질서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절정이 성상납이고 장자연씨였으나, 그마저도 반쪽 수사로 마무리됐다. 당시 술자리·잠자리 강요, 폭행,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20명이 수사선에 올랐으나 드라마 PD, 금융인, 기획사 대표 등 5명만 입건돼 논란이 됐다. 경찰은 장씨의 소속사 전 대표 김아무개(40)씨를 지난 7월3일 송환하며 내사중지자 4명 등에 대한 보강수사를 벌일 방침이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인사들에 대한 접대를 강요했는지 캔다고 하지만, 나머지 반쪽이 드러날진 알 수 없다.

연예인 인권침해가 일상화되고 해결이 어려운데다, 그 과정에서 2·3차 피해가 추가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연예인의 직업상 인권을 온전히 보호받기 어렵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대중의 관심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이다. 관심은 ‘사랑’과 ‘폭력’의 경계를 오간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의 폭력이 주도적으로 개입한다. 선정적 보도뿐만 아니라, 작은 루머까지 확대재생산하며 진실로 분식하기 때문이다.

가수 나훈아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지난해 후반부터 수많은 루머에 시달렸다. 언론은 여과 없이 보도했다. 그러면서 나씨가 공인으로서 직접 언론에 나와 해명해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초 기자회견을 열어 연예인 최초로 언론을 직접 질책했다. 무책임하게 소문을 키우는 언론을 상대로 “직접 보여줘야 믿겠습니까”라며 분노를 토했다. 가해자인 언론은 더 이상의 관련 보도를 중단했다. 그러나 모든 피해는 전후 기획공연을 취소하는 등 일체의 대외활동을 중단한 나씨의 몫이 되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는 연예인 인권의 특성을 △보장의 개념보다 침해의 개념이 강하고 △침해 과정에서 특정 사건이 미디어에 의해 과장되게 매개되고 △매개 과정에서 언어에 의한 정서적 폭력이 심하게 드러난다고 정리한 바 있다. 그러면서 “연예인 인권 문제는 개인 사생활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이 미디어에 의해 어떻게 침해당하고 왜곡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법에 의탁하더라도 ‘2차 피해’를 막기 어렵다. 가수 백지영씨로 상징된다. 전 매니저 김아무개(45)씨가 백씨와 성관계를 나누는 비디오를 몰래 유포했다. 인기가 높아가던 2000년 11월이었다. 여러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사건을 확대재생산했다. 비디오 유포 배경과 상관없이, 대중은 이미 선정적이고 표피적인 보도를 통해 백씨를 단죄했다. 피해자 백씨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그리고 모든 연예 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 또한 6년여 동안 대중으로부터 유배되었다. 그사이 두 차례 앨범을 내며 재기를 시도했으나 방송사부터 철저히 외면했다. 당시 변호를 맡은 최정환 변호사는 “방송 정지가 4~5년가량 되었다”며 “항의 서신을 방송사에 보내고 찾아가기도 했지만 이미지가 나쁘다, 부모들이 항의한다는 회신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악플 넘어 사생활을 조종하려고까지”

비디오를 유포했던 김씨는 지난해 9월 미국에서 붙잡혀 국내로 소환됐다. 하지만 ‘백지영 비디오’ 앞에서 피핑톰(Peeping Tom·관음증 환자)이 되길 주저 않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사실을 별로 알지 못한다. 김씨가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현재 복역 중인 사실도 낯설다. 최 변호사는 “백씨가 피해자였던 만큼, 매니저가 잡힌 것도 어느 정도 보도가 돼야 했다”며 “그래야 반성이 되고 학습이 된다”고 말한다. 실제 대부분의 언론은 단신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그 인색한 보도가, 겨우 꿰맨 백씨의 상처를 또 후빌까 우려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백씨는 최근 복역 중인 김씨를 용서해달라는 탄원서를 썼다. 하지만 정작 백씨는 다시 인기를 얻었을지언정, 누구에게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정보 확산·공유가 점점 용이해질수록, 연예인에 대한 인권침해 양상도 파괴성을 더해간다.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최근 송윤아씨와 설경구씨의 결혼을 집단적으로 반대했던 팬들의 움직임은 악성 루머, 악플의 수준을 넘어, 사생활을 조종하려는 양태로까지 발전한 걸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노예계약, 성상납 등으로 대변되는 연예산업의 구조적 문제도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제 더는 사생활 노출 영상이 충격을 주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

인권의 보편성과 연예인의 특수성이 오늘도 어느 녹화 현장, 어느 오디션, 어느 카페, 어느 뉴스 꼭지에서 부닥치고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지난 모든 사건의 기승전결을 보았을 때 대체로 연예인 자신이 속한 기획사도, 자신을 키웠던 미디어도, 심지어 법도 절대 걸목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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