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무개(47)씨와 정아무개(35·여)씨는 17년 전 택시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기사와 손님의 관계였는데 곧 사귀는 관계가 됐다. 각각 30살과 18살, 적지 않은 나이차였지만 곧 동거를 시작했다. 얼마 안 돼 정씨가 임신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유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씨가 술에 취해 흉기를 들고 친구와 싸우는 것을 말리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후로도 한씨의 과음과 폭언, 폭행은 계속됐다.
“아이들 따로 면담하고 판결 내려”
어느덧 8년이 흘러 이 부부는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불임의 원인이 한씨의 무정자증 때문임을 알게 됐다. 부부는 제3자의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을 통해 2001년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한씨의 폭언과 폭행은 여전했고, 경제적으로도 고통을 겪었다. 한씨는 한 달에 50만원 정도의 생활비만을 정씨에게 줬다.
계속되는 남편의 폭언과 폭행에 지친 정씨는 2006년 7월께 집을 나왔다. 두 달 뒤 남편 한씨를 상대로 이혼 및 위자료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한씨 또한 이혼 및 위자료 청구 맞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집을 나온 정씨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게 됐는데, 여기서 알게 된 손님과 모텔에 들어갔다가 한씨의 신고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부부의 이혼 소송을 맡게 된 광주지법 순천지원 정수영 판사는 2007년 3월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고, 아이들의 친권자 및 양육권자로 부인 정씨를 지정했다. 정 판사는 과의 통화에서 “여러 차례 조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해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며 “당시 아이들을 따로 면담하고 그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한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광주지법 가사부(재판장 김진상, 배석판사 이호산·김영기)는 지난 1월24일 1심 판결을 뒤집고 남편 한씨를 아이들의 친권자 및 양육권자로 지정했다.
사건은 대법원에서 또 뒤집혔다. 대법원 2부(주심 김능환)는 5월8일 “아이들이 인공수정으로 출생한 점, 별거 뒤 부인이 아이를 양육해왔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점, 정서적으로 성숙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양육하는 것이 아이들의 건전한 성장과 복지에 도움이 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아버지를 친권자 및 양육권자로 지정한 것은 잘못”이라며 사건을 광주지법으로 파기환송했다. “미성년자의 친권을 행사할 자 및 양육자를 정할 때는 미성년자의 성별과 연령, 그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양육 의사는 물론, 경제적 능력 유무, 친밀도, 미성년자의 의사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서울가정법원 한 판사는 “이혼 귀책사유와 아이들 친권·양육권의 문제는 별개라는 것이 최근 관련 판결의 흐름”이라며 “설령 한 쪽 배우자가 이혼의 책임이 더 커도,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친권자 및 양육권자로 지정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을 대법원 판례로 확정했다는 데 이번 판결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혼 귀책사유와 양육권은 별개결국 광주지법 민사2부(재판장 강신중, 배석판사 정회일·서영기)는 9월12일 어머니 정씨를 아이들의 친권자 및 양육권자로 지정하고, 아버지 한씨에게는 주말 동안 아이들을 만날 면접교섭권을 주는 선에서 강제조정했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장인 윤진수 서울대 교수(민법)는 “아이들의 복리를 우선에 놓고 친권자 및 양육권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법원에서 친권자와 양육권자를 정하는 기준을 처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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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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