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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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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폭설 도로대란 천재만은 아니다


관리의무 소홀한 한국도로공사, 고립 피해자에 배상해야
등록 2008-12-26 06:55 수정 2020-05-02 19:25

2004년 3월5일, 대전에 49cm의 폭설이 내렸다. 이 폭설은 충청권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등을 강타하며 국토 대동맥을 마비시켰다. 이른바 폭설 대란의 시작이었다. 김덕환(34·가명)씨는 이날 오전 10시30분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옥천 근처에서 차를 멈췄다. 눈은 쉴 새 없이 퍼붓더니 순식간에 어른 무릎 높이만큼 쌓였다. 다른 구간들에서도 차들이 멈추기 시작했다. 장지로 가던 운구차와 혈액수송용 응급차도 눈에 갇혔다.
눈은 더 이상 낭만의 대상이 아니었다. 승객들은 한국도로공사, 경찰, 119 구조대, 심지어 청와대에도 전화해 위기를 알렸다. 그러나 당시 건설교통부 상황실, 도로공사 상황실, 경찰 고속도로순찰대 상황실 등은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초기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도로 갇힌 채 악몽의 밤 뜬눈 지새워

여운철 변호사

여운철 변호사

당시 정부와 도로공사 관계자들은 방송 인터뷰에서 “오후 6시가 지나면 정체가 풀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오후 6시를 넘기자 경부고속도로 천안~남이~죽암 구간과 황간~옥천 구간, 호남고속도로 회덕 구간 등 총 90여km가 차량 8천여 대가 뒤엉킨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1만9천여명 운전자들과 승객들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오지도 않는 제설차량을 기다리며 긴 악몽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2004년 4월28일, 12~30여 시간 동안 고속도로에 갇혔던 피해자들 가운데 244명이 “한국도로공사의 고속도로 관리상 잘못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며 대전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원고인단 모집은 각 지역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나섰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도 힘을 보탰다. 서울·대구에서도 같은 소송이 제기됐다.

2006년 4월19일 대전지법 3민사부(재판장 황성주, 배석판사 조원경·이혜진)는 “한국도로공사는 고속도로의 관리 주체로서 그 유지·관리 의무가 있고 폭설 당시 고속도로의 관리상 하자가 있었던 점이 인정되므로 고립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고립 피해자들에 대해 고립 시간별로 1인당 12시간 미만은 35만원, 12~24시간까지는 40만원, 24시간 이상은 50만원으로 하되 여자와 70세 이상 고령자, 미성년자는 10만원을 가산해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한국도로공사는 고립 사태가 발생하기에 앞서 기상청이 예비특보를 발표해 폭설에 따른 교통정체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으므로 미리 정해진 재해 상황별 조치 계획에 의해 즉시 차량의 추가 진입을 통제하는 등 교통제한 및 운행정지 조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도로공사가 적절하게 위와 같은 의무를 이행했다면 각 고립 구간의 정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완전히 사고를 방지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 고립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으나 안일한 태도로 교통제한 및 운행 정지 등 필요한 조처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차량통제·제설작업 지연 책임

이에 앞서 같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2005년 11월에는 대구지법이, 같은 해 9월에는 서울중앙지법이 같은 이유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한국도로공사는 같은해 5월16일 1심 판결에 불복해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며 대전고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대전고법 민사3부(재판장 이종석, 배석판사 최성진·정선오)는 2007년 4월4일 도로공사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도로공사는 2007년 4월23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2008년 3월13일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는 “한국도로공사는 최저 속도 제한이 있는 고속도로의 경우 강설시 신속한 제설작업을 하고, 나아가 필요한 경우 제때에 교통통제 조치를 취하고 고속도로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거나 신속히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관리 의무가 있다”며 한국도로공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강설에 대처하기 위하여 완벽한 방법으로 도로 자체에 융설 설비를 갖추는 것이 현대의 과학기술 수준이나 재정사정에 비추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최저 속도의 제한이 있는 고속도로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로관리자가 도로의 구조, 기상예보 등을 고려하여 사전에 충분한 인적·물적 설비를 갖추어 강설시 신속한 제설작업을 할 관리 의무가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로써 폭설 대란이 일어난지 4년여 만에 소송이 일단락됐다. 소송을 낸 고속도로 이용객들은 각각 35만~60만원씩의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폭설 손배소송 승소 이끈 여운철 변호사
“반성없는 재난관리 태안 사고로 이어져”


[%%IMAGE2%%] 폭설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쪽 법률 대리인인 여운철 변호사는 12월18일 “이 판결은 폭설 대란의 원인이 천재지변뿐 아니라 국가 재난관리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된 인재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 변호사는 특히 “손해배상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따지기보다 분산된 다수의 피해자들이 뭉쳐 통일된 대응을 하고 승소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정부 혹은 공공기관의 안일하고 무책임한 방재 행정에 책임을 물었다는 점도 판결이 갖는 중요한 의의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여 변호사는 폭설 대란 직후 정부가 소방방재청을 꾸리는 등 위기 대처 노력에 나선다고 했으나, 이후로도 정부의 소홀한 대처로 여러 재해를 미리 막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가 대표적이다. 1995년 시프린스호 사고로 바다 위 기름을 수거하는 방재 능력은 키웠지만,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법률 제정이나 개펄 등 바다 생태 특성을 고려한 방제 방식 체계화 등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프린스호 사고 조사에서 단일선체 유조선이 외부 충격에 약하다는 점이 알려졌으므로 정부가 연근해를 항해할 수 있는 유조선을 이중선체 구조로 제한하는 법적 규제를 강화만 했더라도 태안 사고는 그 피해 규모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 변호사는 “스페인은 방재 시스템뿐 아니라 국민이 천재지변이나 전쟁, 테러 등으로 대규모 피해를 입었을 때 국가가 보상하는 체계까지 갖추고 있다”며 “모쪼록 정부는 폭설 대란과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 등을 거울 삼아 획기적으로 발전된 방재 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더 이상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대처가 없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 심사위원 20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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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걸 기자 한겨레 지역팀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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