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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봉이 김선달’식 기업인수에 제동


대법원, 피인수 업체 자산 담보로 돈 빌려 인수하는 건 배임죄
등록 2008-12-26 06:31 수정 2020-05-02 19:25

도급 순위 51위 건설사인 (주)신한을 인수한 김춘환 회장의 수완은 ‘봉이 김선달’에 빗댈 수 있다. (주)신한의 부동산과 예금 등을 금융권에 담보로 맡기고 700억원의 인수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그가 활용한 차입매수(LBO·Leveraged Buy-Out) 방식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자주 쓰이는 금융기법으로 칭송받으며, 최근 몇 년 새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도 자주 활용돼왔다. 제 돈을 들이지 않고도 우량기업을 매수할 수 있으니, 이쯤 되면 대기업 인수도 ‘손 안 대고 코 풀기’라고 부를 만했다.
그러나 지난 6월, 대법원은 김 회장에게 ‘업무상 배임’이라는 철퇴를 내렸다. 재판 기간만 2003년 5월부터 올해 6월까지 무려 5년여에 걸쳤고, 변호를 맡은 대형 로펌만 6곳에 이른 희대의 사건이었다. 대법원이 고등법원의 무죄판결 원심을 두 차례나 파기환송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 회장의 유죄가 확정됐다.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꾸어 기업인수 자금으로 쓰는 LBO 방식의 M&A에 대해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최초이자 대표적인 사례가 탄생한 것이다.

(주)신한은 김춘환 회장이 인수한 뒤 2007~2008년 국외 수주 2조2천억원의 실적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인수·합병(M&A) 방식은 불법적이었지만 기업 회생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인 M&A 사례가 된 셈이다. (주)신한의 중동 지역 건설현장 모습. 한겨레 자료

(주)신한은 김춘환 회장이 인수한 뒤 2007~2008년 국외 수주 2조2천억원의 실적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인수·합병(M&A) 방식은 불법적이었지만 기업 회생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인 M&A 사례가 된 셈이다. (주)신한의 중동 지역 건설현장 모습. 한겨레 자료

두 차례 파기환송 끝 LBO 첫 판례 세워

미국 부동산 업계에서 이력을 쌓아온 김춘환 회장이 건설회사 (주)신한의 인수에 나선 시점은 2001년 3월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회장은 2년 전 부도를 맞은 뒤 법원에서 회생 절차를 밟고 있던 (주)신한을 인수하기 위해, (주)신한과 신주 발행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2001년 6월 자신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인 S&K월드코리아가 (주)신한의 지분 66.2%를 인수하면서 (주)신한의 대표이사가 됐다. 이 무렵 김 회장은 인수자금 조달을 위해 동양현대종금에서 320억원을 대출받으며 (주)신한 소유의 550억원대 부동산에 근저당권을 설정해주기로 약정했다. 또 한미은행에서 320억원을 대출받으면서 (주)신한 소유의 예금 320억원을 담보로 제공하기로 약정했다. 마치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것처럼, 자신이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지렛대’로 삼아 기업인수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김 회장의 배임이 확정되기까지 1~3심의 재판 과정에서는 잘 짜인 법정 드리마 같은 다양한 법리·법해석의 충돌과 반전을 엿볼 수 있다. 2003년 11월 1심 판결을 내린 서울지법 남부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민중기, 배석판사 최현종·임선지)는 “LBO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 피인수회사가 부도가 나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등 도산 위기에 처한 한계기업이라 하더라도 그 회사의 주주나 채권자들의 잠재적 이익은 여전히 보호돼야 할 것”이라며 “인수자로서는 피인수회사에 대해 그 부담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담보를 제공했다가 탈이 나면 (주)신한과 그 주주 및 채권자들이 손실을 보는 만큼, 김 회장 쪽에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최소한 대출금을 다 갚을 때까지 S&K월드코리아가 인수한 주식과 채권 등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주)신한이나 금융기관에 담보로 제공하는 조처를 취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2심에서는 1심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당시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제6형사부(재판장 김용균, 배석판사 오준근·김하늘)는 판결문에서 “((주)신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담보 제공에 이른 것으로 볼 여지가 크며, (담보 제공) 사실을 들어 곧바로 피고인에게 신한에 손해를 가하려는 의사가 있었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당시 변호인 쪽은 LBO로 주인이 바뀌면서 실적이 개선돼 부실기업이 살아났으며, LBO를 하더라도 인수기업이 신용이 높아야 한다는 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2심에서 대부분의 혐의에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2006년 11월 내려진 대법원의 첫 번째 판결은 (주)신한의 자산을 담보로 인수대금을 차입한 김 회장 쪽이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했어야 한다는 1심 논리의 손을 들어줬다. “서류상 회사인 S&K가 신한의 주식 내지는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대출로 인한 직접적인 이득은 신한에 귀속된다고 할 수 없고… 피고인 또는 S&K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한 행위”라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고, 이후 서울고법에서는 (주)신한 부동산의 담보 제공에 대해서는 유죄를 확정하고 예금을 담보로 제공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는 또다시 이를 뒤집어 두 사안 모두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판결 뒤 M&A 시장에 파문
동양메이저의 한일합섬 인수 과정도 배임죄 해당 여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울 을지로 동양그룹 사옥.

동양메이저의 한일합섬 인수 과정도 배임죄 해당 여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울 을지로 동양그룹 사옥.

대법원은 1심 판결의 논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수자가 자신이 인수한 주식·채권 등이 임의로 처분되지 못하도록 피인수회사 또는 금융기관에 담보로 제공했다 하더라도 배임을 피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대법원의 판단은 M&A 시장에 큰 파문을 던졌다. 특히 재계에서는 LBO가 미국, 영국 등에서는 일상적인 기법임에도 불법행위로 보는 것은 문제라는 반발 기류가 강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주요 사모투자펀드(PEF)들이 LBO를 활용해 대형 M&A들을 성사시켜왔다. LBO가 미국 전체 M&A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6년을 기준으로 27%에 이르렀다. 송창현 변호사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LBO 방식의 M&A는 일상적이고 정형화된 기법”이라며 “그러나 국내에서는 최근 나온 대법원 판례에 따라 M&A를 추진하는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LBO 방식의 M&A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은 동양메이저 사건도 한몫했다. 부산지검 특수부는 최근 동양메이저가 한일합섬을 인수하면서 금융권에서 돈을 빌린 뒤 갚은 과정 등을 문제삼아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을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동양메이저는 1998년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한일합섬의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2006년 말 선정됐다. 이듬해 초 일종의 페이퍼컴퍼니인 특수목적회사(SPC)로 설립한 동양메이저산업 등 4개사를 내세워 한일합섬의 주식 1760만 주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그리고 동양메이저가 동양메이저산업을 먼저 합병한 뒤 다시 한일합섬을 합병했다. 3개 회사를 1개 회사로 만든 것이다.

동양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한일합섬 주식 인수 당시 동양메이저는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담보로 인수자금을 조달했고, 나중에 합병된 회사에서 차입금을 갚은 것이기 때문에 (주)신한의 LBO 사건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동양이 책임져야 할) 채무를 합병회사에 떠넘겼다는 점에서 분명해 배임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동양메이저 건은 (주)신한의 M&A에 활용된 것과 다른 유형의 LBO이며, 이 사건에 대한 배임죄 적용 여부가 LBO 방식의 존폐를 가르는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M&A 전문가는 “이랜드의 까르푸 인수, 금호아시아나의 대한통운 인수, 유진의 하이마트 인수 등 1~2년 새 굵직한 M&A들이 사실상 LBO 방식으로 이뤄졌다”면서 “최근 법조계의 잣대로 보면 대부분 불법성을 띨 수 있다”고 말했다.

대주주 전횡 막아낼 중요 장치 평가

LBO 방식의 불법성 자체에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서울고법의 설민수 판사는 “(신한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사실상 LBO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라며 “우리나라처럼 배임죄를 확대 적용하면 경제활동이 위축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M&A 전문가인 김상곤 변호사는 “국내 대형로펌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변호사들이 LBO가 배임이 아니라는 논문들을 쏟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조계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대법원의 ‘신한 M&A’ 관련 판결이 대주주 등의 전횡을 막아낼 중요한 장치를 제공한다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개혁연대 운영위원인 김석연 변호사는 “미국 등에서는 이해관계자들이 회사 자산을 이용해 사익을 취했다고 판단되면 민사소송을 쉽게 걸 수 있지만 국내에선 쉽지 않다”면서 “배임죄를 통해 소액주주·채권자·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인 김남근 변호사는 “첨단 금융기법으로 차입을 일으키는 방식이 결국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불러온 것 아니냐”면서 “남의 돈을 끌어다 기업을 인수하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해당 기업의 부실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심서 배임 판결 내린 민중기 부장판사
“넓게 보면 에버랜드 CB도 같은 맥락”


민중기 부장판사

민중기 부장판사

‘신한 M&A 재판’의 1심 판결을 맡았던 민중기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단순히 차입매수(LBO)라는 기업인수 방법을 규제했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주주 또는 경영자가 자신의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행동이라도 그 결과 회사와 소액주주 등을 위험에 빠뜨리면 배임과 횡령이라는 법리로 규제받는다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것이다.
1심 판결 당시 LBO 방식의 기업 인수·합병은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었다. 판례가 정립되지 않았고 관련 논문도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민 부장판사는 “당시 피고인 쪽에서 미국 법원에서 합법성이 인정된 사안이라고 주장하고, 검찰에서는 그것은 미국 쪽 사정이고 현행법 체계에선 허용되지 않는다고 맞섰다”면서 “피고와 검찰 양쪽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례와 논문을 찾아서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주심판사도 관련 자료를 열심히 추적·검토했다”고 돌아봤다.
그렇다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리는 데 작용한 결정적 논리는 무엇일까? 민 부장판사는 대표이사가 자기 빚을 갚기 위해 회사 재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를 배임으로 보는 기존 판례들이 영향을 끼쳤으며, 미국 법원도 LBO가 적법하려면 담보 제공에 대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판시해왔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됐다”고 밝혔다.
“넓게 보면 기업집단 내부 계열사들의 보증 문제나 (삼성 경영 승계 과정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문제의 밑바탕에도 이번 판결과 같은 법리적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 회사 체제가 계속되는 한 판례는 다소 수정되더라도 이번 LBO 판결의 기본 법리가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 심사위원 20자평
김남근 현대판 ‘봉이 김선달’을 혼내주는 판결
김진 사려는 회사를 담보로 돈을 빌려 그 회사 사는 게 첨단기법?

박영주 첨단 금융기법과 범죄행위의 갈림길
오창익 새로운 기법이면 아무렇게나 해도 되나
최강욱 첨단기법이 범죄로, 전문 변호사들의 영원한 숙제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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