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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미분양 아파트 하청업체 떠넘기기 철퇴


서울고법, 경제적 약자에 ‘울며 겨자 먹기’ 강요하는 불공정 거래에 ‘원칙’ 판결
등록 2008-12-26 06:15 수정 2020-05-02 19:25

‘약자에 대한 우월적 지위의 남용’이라는 주장과 ‘힘들 때 서로 도와주는 게 관행’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법원은 ‘원칙’을 지켰다.
대주건설은 지난 2003년 광주와 부산 등지에 아파트 단지 9곳을 지었다. 하지만 분양률이 2~59%에 그쳤다. 분양이 극도로 저조하자 대주건설은 분양 기간을 2년 연장했다. 그럼에도 분양은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대주건설은 2006~2007년 레미콘·골조·토목·폐기물 등 20개 업체에 하도급 계약을 맺어주는 대가로 미분양 아파트 1~3층 49세대를 분양했다. 미분양 아파트 분양금은 한 채당 1억5천만~2억5천만원가량 됐다. 하도급 업체들은 3~4채씩 떠맡아 수억원의 돈이 물리게 됐다. 업체들은 친척들에게 넘기거나 제3자에게 되파는 등 떠맡은 아파트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건설사가 미분양 아파트를 하도급 업체들에 할당하는 것은 불공정거래 행위라는 판결이 나왔다. 대주건설의 경기 용인 공세지구 모델하우스 현장. 연합 김주성

건설사가 미분양 아파트를 하도급 업체들에 할당하는 것은 불공정거래 행위라는 판결이 나왔다. 대주건설의 경기 용인 공세지구 모델하우스 현장. 연합 김주성

건설사는 “상생협력 방안” 주장

이를 적발한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원청업체의 우월한 지위를 남용한 행위”라며 계약액의 1%에 상당하는 6억원의 과징금을 대주건설에 부과했다. 원청업체가 경제적 이익을 부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도록 한 하도급법 12조 2를 적용한 것이다. 황정곤 공정위 하도급개선과장은 “행위 자체가 좀 심했다. 한두 개 하청업체에 미분양 아파트를 떠넘기는 게 보통인데 20여 업체에 떠넘겼다”고 말했다.

대주건설은 공정위를 상대로 과징금 부과 및 시정조치 취소 청구 소송을 냈다. 대주건설은 “아파트 미분양 사태로 지방 건설업계가 극심한 경영 어려움과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건설사와 하청업체가 함께 살아남기 위한 상생협력 방안으로 추진됐다”고 밝혔다. 또 “유동성에 다소 여유가 있는 하도급 업체가 건설사의 미분양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은 주택 건설업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라고 강조했다.

서울고등법원 6행정부(재판장 조병현, 배석판사 윤강열·조윤희)는 ‘원칙’을 선택했다. 대주건설은 패소했다. 재판부는 11월16일 “배정된 아파트가 실수요자들이 분양을 꺼리는 저층이었고 대주건설이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앞으로 입찰에서 유리하도록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던 점에 비춰보면, 하도급 업체들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분양 아파트를 떠안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하도급 업체가 미분양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 업계 관행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으며, 비록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택한 방법일지라도 이는 공정한 하도급 거래질서를 해치는 행위”라고 밝혔다.

하도급 업체 자금난 가중시켜

조병현 부장판사는 과의 통화에서 “사실관계는 명확했습니다. 건설사는 상생협력과 관행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경제적 약자인 하도급 업체들이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계약이에요. 법원은 원칙을 지켰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주건설은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이번 판결로 하도급법을 위반하며 이뤄졌던 떠넘기기식 계약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일부 건설사들은 하도급 업체에 공사대금 대신 아파트나 상가, 토지를 떠넘기는 등 불법 계약을 맺어왔다. 하도급 업체들은 이를 현금화하지 못해 자재와 장비 비용을 대지 못하거나 직원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황정곤 공정위 과장은 “미분양 아파트 떠넘기기는 건설 경기가 어려울 때 자주 일어난다. 이번 판결로 그같은 불법 관행이 뿌리가 뽑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주건설 홍보실 쪽은 “미분양 물량을 서로 맡아주는 것은 건설업계의 관행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계기로 앞으로 미분양 아파트를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 심사위원 20자평
김남근 경제위기 심화되면 더 우려되는데, 경종을 울리다
김진 대마는 살고 하청업체만 줄도산하는 비극은 막아야
이종수 이제는 세금으로 미분양 아파트 사줘야 한다고?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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