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때 언론 등에 ‘친한파(親韓派) 의원’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주요 정치인을 소개할 때 순전히 제논 물대기식으로 분류한 꼬리표였습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일본 정치인이란 누구든지 일본의 국익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한국과 친하다고(또는 친한 척한다고) 한국의 이익을 위해 뛰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친한파라는 용어 대신 지한파(知韓派)라는 말이 온당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곤 했습니다.
‘청와대 친북세력’ 발언을 놓고 논란이 분분합니다. 이 발언이 물의를 빚자 한나라당쪽은 “말이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라면서 “친북이란 용어는 이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애쓰는 것을 가리키며 북한과 가깝다는 뜻인데 왜 문제를 삼는지 모르겠다”고 동곳을 뺐습니다. 하지만 그런 변명은 어쩐지 구차해 보입니다. 오히려 “집권세력의 색깔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게 솔직하지 않을까요. 친일파(親日派)라는 말을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갖다붙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친북세력이라는 용어 대신 ‘지북세력’(知北勢力)이라는 신조어를 한번 만들어보면 모를까 말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남남갈등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론분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됩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국론분열이나 남남갈등은,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성격이 짙습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격이지요. 물론 정부당국자의 ‘오버’와 잦은 말실수, 남북문제에 대한 관계부처간의 긴밀한 대처 부족 등은 지적받아 마땅합니다. 또 ‘놈’자까지 들먹이는 북한의 태도 역시 칭찬받지 못할 경망스러운 모습인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의 죄과가 탕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북’이라는 말에도 역사성이 있듯이 모든 행동과 말에는 뿌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무조건 반통일이고 수구보수냐”는 탄식은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영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묘하게도 남북의 화해기류에 딴죽을 걸고 나오는 쪽은 과거 ‘친북용공의 청룡도’를 휘두르던 사람들입니다. 타력으로 묶인 사슬을 끊으려는 민간의 시도에 대해서는 눈을 부라리며 단호한 척결을 외쳤고, 기분 나쁘면 언제라도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습니다. 요즘 와서 북한의 속셈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들은 바로 북한에 대한 지식을 과독점한 채 민간의 북한 바로알기 움직임에 빗장을 걸기 바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아직도 낡은 폐쇄회로에 갇힌 이들의 ‘옛 시절’에 대한 향수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북한이 보낸 이산가족 명단을 통해 가족의 생존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집안에 ‘월북자’가 있음이 밝혀진 것을 내심 찜찜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연좌제의 악몽은 그만큼 깊고 처참한 것입니다. ‘친북’이라는 말을 결코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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