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예술가·런던시 맞잡은 손의 보람

[런던올림픽과 도시 재생] 시에서 지역활성화 위해 땅과 건물 매입해 보수… 예술가 등과 논의해 개발 방향, 활용 방안 결정
등록 2016-05-22 11:27 수정 2020-05-03 04:28
1980년대 영국 런던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과 창고 건물을 보수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템스강의 지류인 리강을 따라 갤러리와 스튜디오, 극장 등이 줄지어 있다. 김정원

1980년대 영국 런던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과 창고 건물을 보수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템스강의 지류인 리강을 따라 갤러리와 스튜디오, 극장 등이 줄지어 있다. 김정원

대영제국의 화려한 과거를 불러내는 역사 속 랜드마크들이 가득한 런던 도심에서 지상 전철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30여 분을 가자 창밖으로 날렵한 곡선의 올림픽 수영장, 초대형 쇼핑몰과 잘 정돈된 현대식 아파트 건물들이 보인다. 2012년 8월 런던올림픽이 열린 스트라트포드 지역이다. 웅장한 런던올림픽 주경기장을 뒤로하고, 해크니위크역에서 내렸다.

해크니위크는 A12 도로를 사이에 두고 피시아일랜드와 마주하고 있는데, 두 곳을 아울러 ‘HWFI’(Hackney Wick and Fish Island)라 부른다. 약 135헥타르 대지의 동쪽 반은 올림픽 공원이 차지하고, 나머지 서쪽 지역엔 630여 개의 예술가 스튜디오, 갤러리, 녹음실, 건축가 작업장 등이 밀집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런던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저렴한 작업장을 찾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면서 형성된 지역이다. 이들은 버려진 공장과 창고 건물을 스스로 보수해 자신만의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이내 입소문이 퍼졌고 다양한 분야의 창의적 작업을 하는 예술가, 건축가, 음악가, 배우 등이 몰려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해크니위크역에서 나와 창고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자 일명 ‘화이트빌딩’이라 불리는 하얀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화이트빌딩 1층, 맥주 양조장을 함께 운영하는 피자 레스토랑에서 사회적 기업 ‘크리에이티브 위크’(Creative Wick) 대표 윌리엄 챔버레인을 만났다. 그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 스폰서십 전문 변호사로서 런던올림픽 준비 과정에 참여하면서 해크니위크의 예술가들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됐다. 그는 올림픽 관련 개발붐으로 기존에 살던 예술가들이 내몰리지 않도록 하고, 자본을 가진 외부인들에게만 개발 이득이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HWFI CIG’(Cultural Interest Group)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올림픽 맞춰 낙후지역 재생사업 추진

HWFI CIG는 2011년부터 매월 모임을 갖고 있다. 예술가와 공간 운영자들뿐 아니라 런던자산개발회사(LLDC·London Legacy Development Corporation), 런던시, 관할 구인 해크니구와 타워햄릿구의 관계자 30~40명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HWFI의 다양한 커뮤니티가 무엇을 원하는지, 올림픽 이후 삶의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상의하며 실질적인 지역 재생 계획을 논의하는 민관 협력의 거버넌스다.

런던올림픽 유치위원회는 막대한 공공자금이 쓰인 런던올림픽이 3주의 개최 기간에만 반짝 효과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효과가 꾸준히 지속되길 바랐다. 유치위원회는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올림픽 정신을 살려 이어가자는 취지의 유산사업들을 포함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올림픽이 개최된 런던 동부 낙후 지역의 대대적인 재생사업이다. 이를 위해 런던시 산하기관인 런던자산개발회사는 올림픽 경기장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재생을 위해 HWFI를 포함해 광범한 지역의 부지를 사들였다. 재생사업 계획에는 약 3500 세대의 주택과 학교, 주민센터, 보건소, 미디어센터, 대학 캠퍼스, 정보기술(IT)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창조산업 클러스터 건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소 1만 명이 넘는 신규 입주민과 직장인들이 이 지역을 이용하도록 할 계획이지만, 기존 1천여 명의 예술가가 이곳에 계속 남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HWFI CIG에서 논의된 것이 차근차근 실현되었다. 챔버레인을 만난 화이트빌딩이 대표 사례다. 런던자산개발회사는 우선 HWFI의 재생사업을 위해 이 지역을 구역별로 나누어 땅과 건물을 매입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시대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과 구역을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는데, 화이트빌딩이 그중 하나다. 구조와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내부를 새롭게 설계하고 건물 전체를 보수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그 결과 1층엔 피자 레스토랑·맥주 양조장·전시공간이, 2층엔 6개의 예술가 스튜디오와 교육 공간이 마련됐다. 1층의 레스토랑과 양조장은 2008년부터 카페를 운영해오던 지역사업가 톰과 제스가 10년의 임대차 계약을 맺고 운영 중이다. 예술가의 전시·작업 공간은 가난한 신진 예술가를 위해 저렴하게 공간을 제공하는 전문 단체 ‘스페이스’가 운영한다. ‘스페이스’는 다양한 전시 주제를 정하고, 입주 작가를 공모해 3개월간 무료로 작업장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작품을 전시한다. ‘스페이스’의 스튜디오와 전시 공간 운영비 등은 런던자산개발회사와 몇몇 재단이 지원한다.

화이트빌딩 인근에 ‘야드 시어터’가 있다. 이곳의 대표 루시 올리버 해리슨은 2011년 이사를 왔다. 루시와 친구들은 주변 올림픽파크 공사장의 폐기물과 폐자동차의 좌석을 재활용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던 창고를 110개 객석을 갖춘 소극장으로 바꾸어냈다. 1년 매출은 약 60만파운드(약 10억원)로 이 중 25%는 영국 예술위원회와 다양한 자선재단에서 받는 지원금이고, 75%는 자체 사업으로 벌어들인다. 야드 시어터는 예술가들의 새롭고 실험적인 공연을 주로 올리며 모판 역할을 한다.

야드 시어터를 나와 리(Lea) 강가로 5분여를 걸어올라가니 스투어 스페이스(Stour Space)가 보였다. 이곳은 또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장이자 전시장이며 지역 주민들의 문화 공간이다. 1층엔 전시 공간과 카페, 상점이 있다. 2층과 3층엔 12개의 예술가 스튜디오가 있고, 이곳에선 48명의 예술가가 시세보다 저렴한 임대료로 입주한다. 이곳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은 1층 전시 공간에서 전시되고, 전시 기간이 끝난 뒤에는 1층 상점에서 판매된다. 또 입주한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도록 멘토링을 제공한다.

예술가 네트워크와 연대의 힘

이 공간들을 운영하기 위해 HWFI의 다양한 지역 자원을 활용한다. 창업자들은 2009년 야드 시어터처럼 버려진 창고 두 개를 저렴한 가격에 임대했고, 주변에 있던 고물상에서 주워온 것과 올림픽 건물 폐자재를 이용해 지금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2012년 스투어 스페이스는 ‘로컬리즘 액트’(Localism Act)를 근거로 해크니구 최초의 지역자산으로 등재되었다. 영국은 2011년 ‘로컬리즘 액트’라는 법률을 시행했는데 소유자가 토지나 건물 등의 자산을 매각할 때 지역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산일 경우 지역공동체가 우선 구매할 수 있도록 6개월 동안 유예기간을 갖도록 했다. 이처럼 런던자산개발회사가 산업유산 건물을 헐지 않고 개발 계획을 수립한 것, 화이트빌딩의 개·보수에 지원금을 제공한 것, 야드 시어터의 각종 지원 기관 확보, 스투어 스페이스의 지역자산 등록 모두 HWFI CIG의 논의 결과다. 지역의 예술가, 구청 관계자, 런던자산개발회사 관계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지역 예술가들은 입을 모아 HWFI CIG가 엮어낸 예술가들 네트워크와 연대의 힘을 강조한다.

멋드러진 올림픽 주경기장과 올림픽 공원 조성은 이미 2012년 런던올림픽 개최에 맞추어 완료되었다. 하지만 올림픽 유산 계획에 포함된 HWFI 지역의 재개발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술가들이 자생적으로 창조해낸 공간을 최대한 밀어내지 않는 범위에서 재생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예술가들과 전체 지역 개발 담당 모든 이해관계자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예술가들이 자생해온 그들만의 소규모 비즈니스 노하우를 지역의 주요 비즈니스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우선 건물, 스튜디오, 카페 하나하나의 특색을 이해하고 그들만의 예술적 재능이 팔릴 수 있는 시장과 후원자를 매칭시켜주면서 성장할 수 있는 개별 방법을 찾고 있다.

개발이 끝나면 유입될 1만여 명의 주민과 직장인은 1천여 명에 불과한 이곳이 예술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판매할 수 있는 무대가 되어줄까? 예술가들의 시장가치는 치솟는 이곳 부동산 가치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따라잡을 수 없다면 그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건물주들이 예술가들을 위해 부동산 가치를 공공화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까?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은 가난했던 원주민과 돈 많은 이주자들 사이의 벽을 허무는 매개가 될 수 있을까? HWFI의 미래를 고민하는 HWFI CIG 참여자들의 질문은 이어진다.

대규모 재생사업이 진행되는 곳에서 대자본과 원주민의 충돌은 빈번하다. 이들은 갈등과 반목을 풀어내기 위한 소통의 장을 만들었고, 소통은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존중해나가면서 공간과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여정은 6개월 내에, 1년내에 완성될 수 있는 단기간 사업이 아니다. 2025년을 목표로 오늘도 대화하고 연구하는 이들을 응원한다.

김정원 스프레드아이 공동대표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