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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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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얼굴, 동서양의 지성 8명에게 듣는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순례
등록 2016-05-17 06:12 수정 2020-05-02 19:28
고대 아테네, 부유한 리디아 왕 크로에수스는 여행길에 철학자 솔론에게 묻는다. “그대는 다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왕이 기대한 건 그 행복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추어올리는 대답이었다. 솔론은 모욕감이 들 정도로 신랄하게, 그러나 조용히 대답했다. “인간에게 위장은 한계가 있지만 부에 대한 욕망과 야심엔 한계가 없다. 어떤 인간도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말라.”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행복은 그 앞에 서면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 어쩔 수 없이 모호한 단어이고, 막연한 신기루일까? 의 맨 마지막은 어린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나서는 순례의 장이다.도 행복을 설파한 동서고금의 지성을 찾아 짧은 순례를 떠나본다. 누군가 ‘전쟁을 겪은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라고 했다.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는, 순례를 끝낸 뒤 무엇을 보게 될까?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건 과연 어떤 행복일까?
“행복!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유일한 이야기”

존 스타인벡, 소설가·미국

첫 방문지는 ‘에덴의 동쪽’이다. 1968년에 세상을 떠난, 노벨문학상 작가 존 스타인벡은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미 끝내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어린 아이는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대체 어떤 거예요?’ 어른들도 한 번쯤 의문을 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이야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 유일한 이야기가 우리를 항상 두렵게 하는 동시에 고무시키죠. 행복!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유일한 이야기예요.”(소설 에서 ‘사랑’으로 표현된 몇 대목을 ‘행복’으로 의역 대체해 수정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지 결코 슬퍼지고 싶지 않다. 정말로 원한 건 행복이었음을 “미처 몰랐다”고 뒤늦게 한탄하는 사람들을 향한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가끔씩 인간의 영혼에 불쑥 찾아드는 이런 의문이 있어요. 평생을 살아오며 쌓인 먼지와 찌꺼기를 다 털어버리고 나면 분명하고 확고한 한 가지 의문만이 남지요. ‘내 삶은 행복한 것이었을까. 불행한 것이었을까?’ 만약 죽은 사람이 생전에 부러움의 대상인 부와 영향력, 권력, 명예를 가졌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재산과 명성, 업적을 자세히 평가한 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을 품을 겁니다. ‘그의 인생은 행복했을까?’” 창밖으로 멀리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나지막이 말을 보탰다. “생전의 재능과 영향력이 제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 삶은 실패작이요 그의 죽음은 싸늘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미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죽음을 세상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뭔가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활력이 넘치는 행복이라도 과연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행복인지가 중요해요. 우리는 혹시 자신이 아는 교묘한 방법으로 틀을 만들어 행복을 찍어내려는 건 아닐까요?”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성학자·스웨덴

여전히 의문을 품은 채 우리는 이제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잡은 한 유서 깊은 공동체로 떠난다. 티베트 고원 지대에 있는,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라다크다. “간디가 라다크에 갔더라면 그의 마음이 갈망한 거의 모든 것을 거기에서 발견했을 것”이라는, 1천년 넘게 땅과 함께 자급자족 삶을 꾸려가는 마을이다. 의 저자인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거기에 살고 있다.

“이른바 ‘진보와 발전’으로 인해 사람이 땅에서 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고 있어요. 이것이 라다크가 내게 지난 16년간 가르쳐준 겁니다.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아무리 선전한다 해도 그것은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이해를 꺾어버릴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죠. 라다크는 지역적이고 작고 친밀하고 인간적·자연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세상을 정말 돌아가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더 깊은 가슴속의 힘, 내면적 풍요라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소박하지만, 그가 무슨 ‘은둔의 행복’을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마음의 평화와 깊은 내면적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삶에 행복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라다크가 주는 중요한 교훈은, 내가 더디게 배운 것이지만 ‘행복’입니다. 많은 시간이 걸려 선입견의 여러 층을 벗겨내고 나서야 나는 라다크 사람들의 기쁨과 웃음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삶 자체를 순수하고 구김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었죠. 공동체와 땅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 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단편화되었고 하루 동안 접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슬프게도 혼자라고 느끼고 우리의 이웃조차 모릅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정신적·사회적·경제적으로 상호 의존적인 공동체의 일부예요.”

지나가던 라다크 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라다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삶의 기쁨은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라다크에서 조금이라도 지내보면 전염성이 강한 그들의 웃음에 감염되고 맙니다. 역설적으로,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산업사회의 우리보다 정서적으로 덜 의존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 그것은 격렬하거나 구속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는 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을까요.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고 말합니다.” 그가 엷게 웃었다.

“사랑은 사용할수록 스스로 행복을 자라게 하는 것”

스티븐 마글린, 경제학자·미국

순례는 미국 대륙으로 이어진다.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우리는 백발이 인상적인 경제학자 스티븐 마글린을 만난다. ‘왜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면 공동체가 훼손되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학자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인 뒤 “행복은, ‘사랑’이라는 재화를 만들고 베풀수록 스스로 자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죠. 사랑을 한 조각의 빵처럼, 사용하면 그 양이 줄어드는 일반 상품으로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사랑은 초공공재(hyper public good)예요. 즉 사용할수록 오히려 그 양이 더욱 증가하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재화이죠.” 말을 마친 뒤 그가 느닷없이 시를 노래한다. “사랑은 아주 특별한 재화/ 경제적으로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재화…/ 빵은 먹으면, 선반에 남은 게 줄어들지만/ 사랑은 만들수록 스스로 자라는 것.” 그러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린다. “사랑은 적절히 사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위축되는 것….”

눈빛을 반짝이며 행복론을 펼치던 그가 경제학자답게 선택한 어휘는 ‘관계재’다. 관계재는 다른 사람들과 상호 교류하는 과정에서 획득·생산되며 더불어 함께할 때만 즐기고 소비될 수 있는, 그렇기에 혼자서는 생산과 소비가 불가능한 재화다. “소득이 늘고 물질적 삶이 윤택해져도 인간 행복이 비례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건, 과도한 시장 참여와 상품 생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관계재 생산·소비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팽창된 시장 영역을 축소하고 대체하는 비시장 영역이 우리의 행복에 필요한 거지요.”

이어 또 다른 동료 경제학자의 말을 들려주었다. “경제학자 클라크가 말했어요. 개인은 좀더 많은 돈을 벌고, 큰 집을 사고, 멋진 자동차를 몰면서 더 행복해졌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런 행복은 자신보다 소득이 적고 더 작은 집에 살면서 싸구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겠지만 그런 행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인류의 행복 창고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온 거란 얘기죠.” 떠나는 순례자의 등 뒤에 대고 그가 덧붙인다. “이웃의 소득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행복은 낮아지고 낙폭도 커요. 아무리 더 열심히 일해 소득을 올려도 옆집 역시 마찬가지로 노력하므로 좀처럼 앞서 나가기 어렵죠. 오히려 앞서 얘기했듯이 사랑이란 재화를 더 많이 베풀어 행복을 키워야죠.”

“행복해지고 싶다면 너무 많은 선택에서 해방되어라”

아마르티아 센, 경제학자·인도

다음에 당도한 곳은 불교에 근원을 두고 살아가는 인도 벵골이다. 벵골이 고향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첫말은 “행복해지고 싶다면 너무 많은 선택을 줄여라”는 한마디였다. 지나치게 많은 선택 가능성은 오히려 불행을 줄 뿐이라는 것이다.

제러미 벤담이 설파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말하듯 “공리주의적 행복 기계”로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는 더 많은 생산·소비가 행복을 극대화하는 길이라고 말해왔다. 여기서 경제인은 “즐거움과 고통의 명석한 계산가로서, 행복 추구 욕망이라는 혈구(血球)를 위해 ‘더 나은 대안의 선택’을 놓고 늘 방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년의 센은 웃음을 띠었으나 걱정스런 눈빛을 한 채 근사한 용어를 사용해 말했다. “표준적인 주류 경제학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선택할 자유’를 주창해왔는데, 그건 역설적으로 ‘합리적 바보’(rational fools)가 돼버릴 수 있어요. ‘뷔리당의 당나귀’가 보여주는 역설 말이에요.”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완벽하게 합리적인’ 당나귀는 양쪽에 놓인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 앞에서 하루 종일 어느 것을 먼저 먹을지 선택하지 못하다 끝내 굶어 죽고 말았다.

“선택 가능한 모든 집합(조합) 중에 최선을 골라, 그래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그 선택의 자유는 때로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더 많은 생산·소비를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않는 대신 그 시간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편이 더 행복을 줄지 모릅니다. 좀더 많은 선택할 자유가 좀더 작은 행복을 주거나, 어쩌면 훨씬 작은 충족감을 줄 수 있어요. 선택 대안의 상실이, 즉 끊임없이 사소한 선택을 해야 하는 성가심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 큰 행복을 줄 수도 있죠. 존 롤스도 에서 최대치의 소비를 고집하기보다 가끔은 차라리 최소한의 소비에 사람은 만족하기도 한다고,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게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고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의 끝없는 추구는 미친 짓인가? 그렇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 경제학자·철학자·영국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질문을 품고 우리는 섬나라 영국으로 간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연구의 대가인 아버지와 철학자 아들인 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행복은 신기루”라고 말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 영국 워릭대 명예교수가 자못 날카롭게, 여든 살의 지성과 지혜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건강·존중·우정·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러한 것이 없는데 행복하다는 건 그저 망상일 뿐이죠. 우리의 관심은 행복이라는 주관적 만족감이 아니라 ‘좋은 삶’에 있어요. ‘돈에 대한 사랑’을 줄여야 합니다. 사치품에 대한 경쟁적 소비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확인을 끝없이 유보하게 만들어요. 진정한 행복의 상징은 사랑과 덕성으로 가득 찬 고대의 스파르타이지 현대의 소비도시 파리가 아니에요.”

부자들의 행복은 서열 맨 꼭대기에 있다는 만족감의 표현이며, 빈곤층의 불행은 맨 아래에 있다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사회 전체의 소득이 얼마나 되든지 부자들은 항상 맨 꼭대기에, 빈민들은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평균 행복 수준은 불변이다. 그의 이 말은 마치 앞서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만난 마글린 교수의 행복론을 다시 듣는 듯하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40대 중반의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영국 엑스터대 사회철학 강사는 좀더 급진적인 투로 말한다. “이제 행복은 진지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어요.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겁니다. 행복의 원천이란 무엇인가, 가장 완전하고 인간적인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심리 상태에 이르는 것과는 무관해요. 한때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알려진 좋은 것들, 즉 부·명예·명성은 이제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행복의 이런저런 원인에 불과해요. 어떤 것이 진짜 행복인지 왈가왈부하는 건 바보짓일 수도 있어요. 가장 맛있는 과일이 사과인지 자두인지 포도인지 놓고 다투는 격이죠.” 이내 두 부자가 합창하듯 말한다. “부의 끝없는 추구는 미친 짓인가? 그렇다! 행복 그 자체는 잴 수 없어요. 성장 추구에서 행복 추구로 옮겨가는 건 또 다른 거짓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개인으로서든 시민으로서든 올바른 목표는 단지 행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이유’를 가지려는 데 두어야 하는 겁니다.”

“그곳에는 바람이 일고 강물이 흐를 것이오”

토머스 울프, 소설가·미국

우리는 이제 미국 동부에 있는 리비야 힐이란 작은 마을로 간다. 소설 를 쓴 작가 토머스 울프의 고향이다. 울프는 우울한 어조로 말한다. “사람들이 성공 혹은 성공의 표적이 찍힌 것을 환영하고 동경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곧 행복으로 여겨지기 때문이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영상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그들이 꿈꾸는 행복 영상에 그런 딱지를 붙이고 있어요. 하지만 번영이 사라진 지 오래고, 그것이 와 있어야 할 길모퉁이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길목이 불행을 향해 커브를 꺾고 있음을 안 뒤에도 우리는 안타깝게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죠. 오늘날 사람에게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요. 즉, 그는 우울하죠. 인간, 그는 우주의 역사를 만들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면서도 자신의 역사는 모르며, 단 10분도 위엄이나 지혜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한평생 살면서 기쁘고 행복했던 귀중한 순간을 열 번만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난 이 세상에서 영광된 삶을 누렸다네.’”

그렇다면, 우리가 비록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단지 어리석다는 뜻일까? 그런 의문이 뒤섞인 채 머릿속이 잠깐 혼란스러운 바로 그때, 울프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우리의 ‘적’은 시간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지옥만큼이나 사악하고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이곳에 있었습니다. 적은 우리에게서 대지를 훔쳐갔고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샘물을 오염시키고 빵을 빼앗고 껍데기만 남겨주고 만족하지 못한 듯 마침내 빵 껍데기까지 빼앗아가려 합니다. 적은 순진한 얼굴로 우리한테 와서 속삭입니다.

‘나는 당신의 친구요. 당신들 편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의 아들·형제·친구 중 한 사람이오. 난 당신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오. 당신들은 이것을 파괴하겠단 말이오? 이것은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소. 그것은 바로 당신들 자신이며 개개인의 투영이요, 개개인의 생활의 승리요, 당신들의 핏줄 속에 뿌리박고 있던 것이오. 당신들 모두가 원한다고 여긴 것이었소.’

맞아요. 벌써 깨달았겠지만, 적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는 수천 개의 낯익고 편리한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 본래의 얼굴은 지옥과 같이 늙었소. 바라건대, 더 위대한 삶과 행복을 찾으려거든 당신이 알고 있는 이 땅을,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삶을 버리도록 하시오. 고향보다 더 정겹고 이 지구보다 더 큰 땅을 발견해내도록 하시오. … 그곳에는 바람이 일고 강물이 흐를 것이오.” 울프가 격정적으로 말한 그 행복의 적은 누굴까?

“다행히(!) 생산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경제학자·미국

그 한 가지 답을 찾아 우리는, 생전에 특유의 재치 있는 문체 덕분에 동료들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한몸에 받았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로 간다. 대체 풍요한 사회에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1930년 케인스는 미래 지향적으로 말했다. 경제문제가 그 본래 자리인 뒷전으로 물러날 날이 멀지 않았다고, 100년 뒤(2030년)에는 물질적 풍요가 이뤄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경제적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진정한 걱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케인스가 예측한 풍요의 시대는 시일을 앞당겨 도래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에서 눈을 돌려 좋은 삶과 창조적 행복으로 관심을 이동했는가? 1960년대 풍요한 사회에서 일찌감치 ‘좋은 삶’을 주창해온 갤브레이스는 ‘생산과 성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생산성 덕분에 우리는 불평등과 그에 따른 긴장감을 줄일 수 있었지요. 생산자라는 직함은 확실히 명예를 보장해주고, 그들은 사회의 버팀목이자 기둥이며 부를 이룰 수 있는 원천이란 지위를 누려왔지요. 그러나 경제성장은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지 못해요. 생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강력한 심리적 압박감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한데, 생산과 그에 따른 물질적 풍요는 어쩌면 우리의 적이기도 합니다. 생산과 소비, 그 난공불락의 지위와 기득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생산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어요. 감히 말하건대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는 사람일수록 명성이 더 높아지고 명예롭고 행복한 사회, 그것이 곧 좋은 삶의 조건입니다.”

그가 얼굴을 다소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경제성장과 생산이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정책 담당자들의 입에 발린 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신념을 버리고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삶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어딘지 모르게 그의 표정에, 의 올더스 헉슬리가 반어적으로 비꼬던 말이 언뜻 맴돌고 있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3시간30분의 여가를 늘려준다고 행복해질 것 같소? 과잉여가로 그들을 괴롭힌다는 건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오. 더 많은 생산이 보편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오. 행복은 진리에도 아름다움에도 있지 않고 대량 ‘생산’에 있소. 행복은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니오. 현실의 행복은 언제나 몹시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오.”

“우리에게는 허가 아쉽다. 빈 구석이 그립다”

법정 스님, 한국

우리의 순례는 전남 순천 조계산 기슭에 깊숙이 자리잡은 암자 ‘불일암’에서 끝난다. 거기 깊은 산길을 법정 스님이 여전히 거닐고 있다. “내 이웃과 형제들이 모두 앓고 있는데 나만 어떻게 건강할 수 있습니까. 세상일이 몹시 걱정스러울 때 같이 신음하면서 괴로워할 줄 모른다면 함께 사는 이웃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우리 시대와 사회에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을 느끼는 건 오로지 인간뿐입니다. 이웃과의 이런 ‘관계’의 근원이 뿌리내리고 있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만 새롭게 눈뜨고 자기 존재가 새롭게 확인되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시선을 멀리 산벚꽃에 두고 있던 그가 한참 지나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홀로 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러기에 오히려 홀로 있는 시간이 더러는 필요하지요. 찻간이나 집안에서 별로 듣지도 않으면서 라디오를 켜놓은 것은, 그만큼 우리가 바깥 소리에 깊이 중독되어버린 탓일 겁니다. 우리는 꽉 들어찬 속에 쫓기며 살고 있어요.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일에 쫓기면서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지요. 쫓기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조차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무엇엔가 다시 쫓길 것을 찾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허가 아쉽습니다. 빈 구석이 그립다는 말입니다. 일, 물건, 집, 사람 할 것 없이 너무 가득 차 있는 데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좀 덜 찬 데가, 좀 모자란 듯한 구석이 그립고 아쉬운 것이지요.” 국민총생산(GNP)이 곧 ‘국민총행복량’을 뜻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잘살고 못사는 건 추상적이며 외형적인 숫자 놀음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내용에 달려 있다,고 말한 1976년 젊은 법정의 어느 글이 떠올랐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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