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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 히틀러’에 중독된 조선

등록 2004-03-04 15:00 수정 2020-05-02 19:23

[아돌프 히틀러, ]

친제국주의적 지식인들 ‘천재적 영웅’으로 섬겨… 대총통 히틀러가 몰고온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

정선태/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1930년대 후반 전쟁이라는 이름의 광풍이 식민지 조선에도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경제공황을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한 이래 1937년 7월의 중-일 전쟁과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 프로젝트를 실천함으로써 ‘대일본제국’으로 재편된 동아시아 전체를 거센 광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939년 9월 히틀러의 지휘 아래 폴란드를 침공한 군국주의 독일과 만나면서 전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황폐하 만세’와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군대에 짓밟혀 때 아닌 죽음을 맞아야 했으며, ‘대일본제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식민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잡지 앙케트 조사… 지식인들의 우상화 열기

이 시기에 발간된 각종 잡지들을 일별하다 보면 성전(聖戰), 지원병, 창씨개명, 신체제, 생산소설, 전쟁소설, 국민문학, 국민동원 등의 용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거니와 전쟁의 폭풍에 직면하여 ‘천황폐하’의 지령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들을 ‘신성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친제국주의적 지식인들의 선전과 선동이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1940년 ‘대일본제국’ 정부가 발표한 ‘신체제 강령 및 규칙’, 즉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립 △거국적 전체적 공적 대정익찬체제(大政翼贊體制)의 확립 △공익우선 국가봉사제일주의의 국가국민경제문화체제의 확립이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다투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들을 발표한다. 윤치호·이광수·김동환·박영희·정인섭 등 문화계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을 간행하는 한편, 더 많은 충성을 ‘천황폐하’에게 바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쏟아붓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친제국주의적 지식인들은 ‘천황폐하’와 뜻을 함께하는 ‘대총통’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를 기꺼이 시대의 천재이자 영웅으로 ‘영접’한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1940년 9월호 잡지 에는 ‘아관(我觀) 히틀러 총통’이라는, 일종의 앙케트 조사가 실려 있다. 이 조사에 응한 각계의 인사들이 히틀러를 일컬어 “독일 민족이 나은 불세출의 영웅”, “천재적 신인(神人)”, “광신적인 열정과 스피디한 돌진력을 갖춘 천재 중의 천재”, “구주(歐洲) 대지를 석권하고 세계 인심을 일신케 하려는 천재적 영웅”,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영웅” 등의 논조가 지배적인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춘원 이광수는 히틀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나는 쇼와 5년(1930)경에 의 일부를 번역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전체주의야말로 명백히 세계를 풍미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한자(漢字)로 전체주의란 말은 에 내가 처음 쓴 말이다. 그때에는 파쇼라는 말은 있었으나 전체주의란 말은 없었다. ‘민족의 제전’이라는 영화에 히틀러 총통이 올림픽대회를 구경하는 스냅이 수매(枚) 있었다. 독일 선수가 아슬아슬할 때에 두 주먹을 쥐고 조바심하는 것이며, 독일 선수가 이긴 때에 기뻐하는 광경 등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그의 풍모를 보는 듯해서 기뻤다. 그는 가정도 없고 향락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광수는 자신이 히틀러의 을 ‘동광총서’의 하나로 가장 먼저 번역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사용한 전체주의가 세계를 풍미할 것을 ‘예언’했다고 밝혔다. 그는 ‘옛 조선인의 근본도덕: 전체주의와 구실주의 인생관’( 1932년 6월호)에서 개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전체주의의 미덕을 강조하였는데, 그런 그에게 히틀러가 가정도 없고 향락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진정한 영웅’으로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계몽적 열정에 사로잡혀 천재와 영웅의 도래를 갈망하던 그에게 ‘독일 민족의 힘’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영웅 히틀러는 ‘거지와도 같은’ 조선 민족이 당당한 ‘대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숭배해야 할 ‘신인’(神人)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번역을 표나게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번역 뒤 ‘전쟁’에 도취된 이광수

잘 알려졌다시피 히틀러의 은 우생학에 입각한 아리아인종 지상주의로 일관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의회제 민주주의, 배금사상, 국제주의, 마르크스주의, 소비에트 볼셰비즘 등을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타도해야 할 대상 모두가 “항상 타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 유태인의 세계 지배 음모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생충’을 박멸하고 가장 우수한 민족 또는 인종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게 인종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히틀러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그의 생각 안에 개인의 평등이나 자율적 협의에 입각한 의사결정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종적으로 우월한 강자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며, 독일 민족이 그 ‘과업’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 ‘세계사적 사명’이라고 강변한다. ‘단일민족 신화’에 근거한 이와 같은 선전·선동이 전 세계를 ‘피의 향연’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역사가 알려주는 바와 같다.

세계를 이끌 ‘힘’과 이 힘을 지닌 ‘천재적 영웅’의 모습을 히틀러에게서 보았던 것일까. 이광수는 을 번역한 뒤에 쓴 ‘힘의 재인식’( 1931년 12월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는 힘이다. 삼라만상은 에네르기의 천변만화적 율동이다. 힘이 없으면 우주는 없다. 아시아 대륙의 하늘에는 바야흐로 전운이 꿈틀거린다. 진군나팔이 있고 돌격의 호령이 있고 포연포향(砲煙砲響)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히 없는 것이 이 힘이다. 몸의 힘, 골의 힘, 정신의 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가 총출동 대연출하는 금일의 무대에 일역을 맡지 못하고 막 뒤에 쭈그리고 앉은 성명 없는 백성이다. 우리에게 힘이 오르는 날 인류의 무대는 우리에게 정중한 출연청구장을 보낼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전쟁은 민족의 힘의 발현이며, 민족의 힘과 힘이 마주치는 소리이다. 그런데 무기력한 조선 민족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민족주의자 이광수는 외친다. 전쟁의 무대에 당당한 주연으로 발탁되기 위해 힘을 기르라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우주의 힘’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

‘최고의 지식인’ 믿고 전쟁터 향하다

어떻게 하면 조선 민족이 힘을 갖출 수 있는가. 조선 민족의 자력으로? 어림없는 일이다. 뼈와 살뿐만 아니라 골수까지 철두철미하게 ‘천황폐하’의 적자(嫡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대일본민족’의 일원으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신민이 되는 길,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의 지도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40년 7월호에 실린 지원병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보내는 기나긴 편지를 쓴다. “일본의 어머니는 아들을 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임금님께서 맡기심 받은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아드님을 길러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이 어머님의 거룩한 직분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임금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동시에 우리와 우리 자손의 복과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지원병이 됨으로써 신체와 정신을 완전히 개조하여 신인(新人)이 되어야 하며, 이 ‘신인화’(新人化)야말로 2300만 조선 동포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선동하는’ 식민지 조선의 ‘최고의 작가이자 지식인’의 말을 믿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전쟁터로 향했다. 누구의 책임인가. 다시 이 땅 구석구석에서 진달래와 개나리로 피어날 그 원혼들에게 이광수의 후손인 우리는 뭐라 말할 것인가. 식민지 조선의 상처가 생생하게 살아오는 이 3월에….

☞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국내 언론매체로는 처음으로 번역 분야를 시리즈로 연재한 것을 관심있게 지켜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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