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너무나도 불편하고 이질적이었던 노르웨이 대학의 ‘무질서의 질서’
‘교수님’을 구분할 수 없어라
첫째, 여기서는 교수도 학생도 똑같이 양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히려 강의라는 노동을 해야 하는 교수일수록 행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양복을 피한다. 여름에는 반바지와 반팔 와이셔츠, 겨울에는 스웨터를 입고 강의하는 것이 다반사다. 즉 ‘의관’을 가지고 ‘상하’를 구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나이도 좋은 잣대가 못된다. 교수들 중에서 상당수가 30대 초·중반이고, 학생들 중에서 30∼40대, 심지어 50대의 어른도 많다. 노르웨이 대학은 입시 경쟁도 학비도 나이 제한도 전혀 없고, 배움을 찾는 이들이 언제든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열린 배움터’일 뿐이다. 그리고 20대 후반의 박사 과정생들은 교수와 똑같은 연구실과 교수 월급과 맞먹는 장학금을 받는 등 교수와 실제적으로 비슷한 신분을 갖는다. 즉 나이를 가지고 ‘윗사람’을 찾아낼 수 없는 판이다.
셋째, 얼굴표정이나 행동거지, 남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교수님’을 당장 구분해낼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노르웨이 교수는 학생과의 신분 차이를 절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학생을 만나면, 서로 악수하고 인사하고 서로 웃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은 보통 일이다. 반말·존대말 차이는 현재 노르웨이어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문제는 아예 생기지도 않는 것이고, 서로 호칭할 때도 똑같이 이름만 부른다. 서로 인사하는 장면을 옆에서 보면, 동료 사이인지 사제지간인지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 노르웨이다.
결국, 노르웨이에 들어온 지 몇 주일 뒤 필자는 “이 사람들 중에서 누가 학생이며 교수일까”라는 궁금증을 아예 버렸다. 여기에서 비록 명분상 사제 관계지만 일단 동료 관계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을 드디어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사회는 어디에서나 형식상의 상하 구분보다는 실제적인 ‘만인 평등’이 앞선다. 바로 이것은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주의의 튼튼한 심성적 바탕이다. 그리고 이 심성적 평등 지향성을 받쳐주는 현실적·법적 장치는, 학생들의 만만치 않은 권력이다.
사실 스칸디나비아 학생은 한국 학생과 같은 ‘백성’이나 단순한 ‘교육 소비자’가 아니라는 것을, 필자가 여기로 교수로 오기 이전에도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취직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 오슬로로 갔을 때였다. 필자를 면접하여 심사한 해당 학과의 인사위원회 위원 세명 중에서 교수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두명은 학과의 학생회장과, 박사 과정생들을 대표하는 박사 과정생이었다. 학생회장과 박사 과정생 대표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교수와 똑같은 발언권을 가진다는 점을 인식했을 때, “정말 다른 세상이구나”라는 경악감과 동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놀란 것은, 선임 여부가 취직 희망자의 시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반응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학생들이 교수를 뽑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교수에게 거침없이 불만 사항이나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것은 노르웨이식 제도다.
‘출석의 필수화’를 시도하다 낭패를 보다
필자에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사건은, 강의계획서에서 담당 과목의 세미나 출석을 학생들에게 필수로 만들었을 때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노르웨이 대학교에서 강의는 원칙적으로 ‘출석’ 개념이 없다. 다니고 안 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 본인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전혀 다니지 않아도 독습하여 시험을 봐서 점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다만 세미나 형태 수업의 경우에는 가끔 다닌다는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교수들도 있다. 이 사정을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하였던 필자는, 기존의 강의계획서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과목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세미나 출석의 필수화를 시도하였다. 결과는 물론 낭패였다. 필자의 강의계획안은 학부 학생회에 의해서 각하되어 수정되어야 되었다. 결국 필자가 마음속으로도 “학생의 출석을 유도하려면 행정적 장치를 동원하는 것보다 세미나를 흥미있게 진행해야 한다”는 학생회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르웨이에서의 교수는 학생에 의해서 선임되고, 법으로 보장된 ‘무료로 공부할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는 학생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심성으로나 학생들의 ‘참정’을 완벽하게 보장해주는 교육법으로나, 노르웨이 학생은 교수와 동등한 ‘동료’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학교의 ‘정치’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회·정치, 그리고 여러 국제운동에 대해서도 학생들의 비판적인 관심과 참여도가 높다. 오슬로대학교의 공식적 총람을 처음 보고 놀랐던 것은, 학교의 보조비와 사무실을 배정받는 학생 동아리 중에서 ‘국제사회주의자동맹’(IS)과 마르크스주의학습협회 등이 음악·연극 등의 단체와 똑같이 나열된 것이었다. 한국 같으면 분명히 탄압받아야 할 ‘위험 단체’들이 여기에서 버젓이 학교(즉, 국가)의 돈을 받고 있다니…. 역시, 다른 세상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학생들의 이러한 사회과학 학습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당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주도·지지한다는 사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축제는 바로 버마나 티베트 민주·민족운동 지지 축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필자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진정한 자유인에게는 남의 자유나 원칙으로서의 자유와 직결되는 세계 전체의 사회문제들은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 ‘머슴’이 떠올랐을까
한때 자유의 완전 박탈과 가난으로 인해 운동에 눈을 떴다가 이제는 형식뿐인 민주와 상대적인 부(?)에 안주한, 그리고 노르웨이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상적인 권위주의’를 그대로 참아가면서 명령·반말투의 ‘어르신네’들을 나이 들수록 조금씩 닮아가는 한국 학생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진정한 자유인인가? 왠지 필자의 머리 속에, 때리고 굶주리는 마름을 싫어하되 밥을 잘 주고 다독거려주는 ‘상전님’을 받들어 모시고 잘 따라주는 전형적인 머슴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이 나는 순간에도, 필자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학생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찾기 위해서 고심하며 고생하는 학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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