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불교와 파시즘의 기묘한 만남

등록 2002-06-06 00:00 수정 2020-05-03 04:22

선불교의 미국화에 앞장선 두 종교학자 스즈키와 엘리아데의 일그러진 초상

요즘 서양에서는 선불교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도 ‘선’(보통 일본식 발음으로 Zen)이라는 말을 모르면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렵다. 선을 ‘동양의 정신’과 동일시하여 선에 대해 상식적으로 조금이라도 아는 것을 ‘세계성’, ‘국제성’을 띠는 일로 생각한다. 골수 추종자는 많지 않아도, 선에 대한 막연하고 긍정적인 인식의 보편성은 티베트나 동남아의 불교, 정토불교 등 나머지 불교 종파의 인지도를 훨씬 앞지른다.

엘리아데가 선택한 ‘부드러운 파시즘’

선이 이만큼 보편화된 배경에는 여러 이유들이 많다. 상좌부(동남아 소승) 불교보다 계율 등의 종교적 요소를 덜 강조하고, 서양화된(사실은 왜곡된) 선이 자본주의 소비·향락 지향의 ‘주류’사회와 더 쉽게 부합하는 것과, 참선 위주의 수행법의 개인주의적 측면이 서양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선의 서양화(실제로는 서양인의 입맛에 알맞게 뜯어고치는 일)와 보편화의 배경에는 ‘주류 학계’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선에 대한 학술적·대중적 저서는 중산층의 미국·서구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식상해 ‘대안적 사상’ 찾기에 나선 1960년대부터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어 ‘선 붐’ 만들기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미르차 엘리아데(1907∼86)와,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1870∼1966)를 빼놓을 수 없다. 저명한 비교종교학의 대가이던 엘리아데는 여러 종교 사이 선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설명했고, 승려가 된 적이 있는 스즈키는 선과 일본 문화의 관계, 선의 수행법 등을 설파했다.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두명의 이민자 출신 미국 교수들은 일종의 상호 보완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의 미국화’ 작업 이외에,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대선배’인 스즈키가 19세기 말부터 곧잘 일본 국수주의와 일군의 대륙침략을 합리화·미화했는가 하면, ‘후배’ 엘리아데는 1930년대의 루마니아 파시즘 운동의 한 이론가였다. 그렇다면 과거의 군국주의자·파시스트들이 어떤 인연으로 선불교의 ‘미국화’와 ‘선포’의 선봉에 나섰을까. 그들의 손을 거쳐 대중화한 선불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미국 젊은이들에게 다가갔을까.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저서를 띄워준 미국의 보수적 주류 학계와 출판·언론자본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부유한 보수적 가정에서 태어나 26살에 박사학위를 따고 인도에서 범어(梵語·Sanskrit)와 요가를 배운 뒤 인도학 교수가 된 천재 엘리아데는 일찍부터 독특한 종교철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에게 종교는 우주의 중심인 신비스러운 성(聖·das heilige)으로 인간을 인도해주는 나침반이고, 종교가 있는 한 사회가 하나의 ‘몸’처럼 잘 움직이지만, 종교가 제거되면 사회가 ‘성’으로부터의 소외와 분열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계급 개념 자체를 부정한 극단적 관념주의자 엘리아데에게는 현대사회의 교회가 ‘속(俗)적인’ 부르주아·국가의 지배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 리 만무했다. 공산주의뿐 아니라 모든 진보적 사상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 사회’인 엘리아데의 이상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 같은 위협들을 퇴치하는 방법으로, 엘리아데는 독재자 살라자르(Salazar) 치하의 당대 포르투갈이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드러운 파시즘’을 택했다. 그러다 자신의 이론적인 지도를 받은 루마니아 파시스트 운동의 일시적인 패배(1938)로 결국 미국에 정착한다.

무시무시한 무사도의 무아경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는 엘리아데에게는 원시종교의 무당의 굿이나, 선승의 참선·무아체험이나 똑같은 ‘성(聖)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 발전의 부정에 따른 종교의 사회적 변혁 기능의 전면적 무시였다. 무속이든 선불교든 엘리아데에게 종교란 한 개인이나 집단의 불변적·초월적 ‘망아’(忘我·ecstasy) 지경의 도달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의 민간신앙이나 힌두교와 확연히 다른 초기 불교의 혁명적인 무소유·비폭력의 정신도, 16세기 이후 민중 기독교의 국가·폭력의 부정도 엘리아데의 관심 밖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1949), (1951), (1952), (1967), (1976∼78) 등의 저서는, 선불교를 샤머니즘 같은 일종의 ‘신비의 기술’로 ‘파는’ 셈이었다. 그의 선불교에서는 부처의 자비나 ‘하화중생’(下化衆生·보살에 의한 중생의 교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불교 활동가로서 매우 드물게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한문과 범어·팔리(Pali)어 등에 능통한 천재 스즈키는, 1892∼97년에 일본에서 승려로 생활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무자(無字) 화두를 들어 열심히 정진했지만, 당시 일본 제도권 불교계의 최대 화두는 점차 가열돼 가는 국가주의·군국주의 분위기에 어떻게 편승하여 ‘애국 황도(皇道) 종교’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젊은 승려 스즈키는 청·일전쟁(1894) 때 마침 불교와 국가·종교 관계에 대한 글을 발표해 ‘애국불교’ 이론가로서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스즈키에 따르면 선불교의 깨달음 체험이 생사를 초월하는 이상 견성(見性)했거나 선수련의 경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과 남의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버리고 남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시끄러운 야만인인 중국인을 평정하기 위해 무아경에 도달해 자신과 남을 쉽게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보살도라는 게 스즈키의 결론이었다.

결국 그는 당시의 어용적 이데올로기들이 만들어놓은 ‘황도’, ‘무사도’(武士道)의 ‘순수 일본적인’ 이념에 갖가지 궤변을 동원해 불교까지 뜯어맞추었다. 그 뒤 미국에 진출하여 활동한 스즈키는 ‘일본 문화의 정수’, ‘선불교’와 ‘무사도’를 아예 같은 범주에 넣어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에서 성공을 거둔 (1936)라는 영문으로 된 저서에서, 그는 검도(劍道) 선수를 예로 들어 ‘무사도의 고귀한 무아경 도달’을 논한다. 검사(劍士)의 ‘몸과 검의 통일’, ‘이성을 배제한, 본능에 의한 행동’이야말로 불교적 깨달음과 보리(菩提)에 가깝다는 그의 불교 소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스즈키는 (영문판, 1972)이라는 책에서 ‘무사도, 다도,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최고의 표현’으로 평가하고, ‘생사 초월, 직감, 본능, 영성’ 위주의 동양 문화는, 이성적인 판단 위주의 사회 비판이나 물질주의적인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불교의 폭력화·어용화는 드디어 복고적 수구주의로 이어진 것이었다.

불교는 어떻게 미국 자본에 이용됐나

물론 무속 연구에 공로를 세운 엘리아데나 (大乘起信論) 등의 경전의 영문 번역으로 불교의 학술적 연구·대중화에 기여한 스즈키를 무조건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언론·출판자본이 대중화한 두명의 극우적 학자의 선불교의 해석은 불교의 사회 참여적 측면을 완전히 제거하고 불교의 반(反)자본주의적·반전(反戰)적 정신을 말살해버렸다. 그렇다면 미국의 자본이 도모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엘리아데나 스즈키에게서 “역사는 속(俗)일 뿐 성(聖)이 아니다” “종교의 목적은 종교의 성(聖) 그 자체다” “전쟁도 무아경의 일종이다”와 같은 것을 배운 젊은이들은, 비판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바로 그걸 노린 것이었다! 1960∼70년대는 신좌파의 창조적·해방적인 이론이 미국·서구를 풍미한 시절이었다. 자본과 자본주의에 위험한 그 주제들로부터 청년층의 관심을 돌리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상업적인 포르노의 대대적 허용과 마약유통의 장려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다. 결국 극우학자들이 왜곡한 ‘미국적인’ 선불교의 유포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불교를 제대로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교가 미국 자본에 의해 이렇게 이용됐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다.

엘리아데와 스즈키의 사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계급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학술과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사회 참여를 부정하여 ‘순수’를 내세우는 학술·종교란, 많은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체제 옹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착취와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 옹호는 결국 학술·종교를 크게 왜곡시키지 않을 수 없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교수·한국학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