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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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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도 비둘기도 아닌 무영혼파들


부시 행정부의 ‘맹목적 강경’ 답습하는 현 정부 대북정책을 보며
‘강경파’ 이동복의 훈령 조작을 떠올리다
등록 2009-05-26 09:29 수정 2020-05-02 19:25

강경파를 ‘매파’, 온건파를 ‘비둘기파’라고 부른다. 물론 강경파와 온건파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맹수 사이에 있는 들개는 온순해 보이고, 토끼장에 들어온 양 한 마리도 사나워 보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들개조차도 구경하기 힘들다. 강경파만큼이나 ‘무영혼파’가 많다. 영혼은 잠시 꼬불쳐두고, 눈치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무영혼파 말이다. 위의 모르는 자들은 오락가락하고, 밑의 아는 자들은 눈치만 살피니, 한반도가 어디로 가겠는가? 파도가 출렁이는 대로 끌려가는 무동력선 신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북정책의 역사는 협상파와 강경파 사이 갈등의 역사다. 남북회담 현장에서도 그 싸움은 멈출 줄 모른다. 지난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발생한 ‘훈령 조작’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 사진 한겨레 자료

대북정책의 역사는 협상파와 강경파 사이 갈등의 역사다. 남북회담 현장에서도 그 싸움은 멈출 줄 모른다. 지난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발생한 ‘훈령 조작’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 사진 한겨레 자료

“내 스키가 조금 앞서 나갔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멋쩍게 그렇게 말했다. 그 전날만 하더라도 파월 장관은 빌 클린턴 전임 행정부가 남겨준 대북협상의 유산을 이어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첫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 차이를 확인하는 불편한 만남이었다. 한반도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파월 장관은 그때까지 부시팀의 ‘맹목적 강경’을 눈치채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아시아국장으로 일했고, 부시 행정부 초기에도 백악관과 국무부에서 일했던 잭 프리처드는 자신의 경험을 그의 책 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가 첫 번째로 겪은 황당함은 평화회담 특사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미국 대표를 겸직하는 대사에 지명됐을 때다. 그때 부시의 백악관은 정치적 성향을 적어 내라고 했다. 클린턴 행정부 5년 동안 백악관에서 일했지만, 아무도 민주당원인지 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투표했는지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부시의 백악관은 직업 공무원인 그에게 정치적 성향을 물었다. 프리처드는 ‘무당파’(independent)라고 적었다. 클린턴의 백악관은 능력을 중시했고, 부시는 정치적 성향을 우선했다. 클린턴 팀은 국가를 생각했고, 부시 팀은 정파를 생각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우리가 보고 있는 직업 공무원에 대한 정치적 보복처럼 말이다.

켈리 “평화회담은 민주당 시절 용어야”

프리처드가 당한 황당함은 또 있었다. 국무부로 와서 상원 인준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명함을 만들었다.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제임스 켈리가 명함을 보고서 말했다. “평화회담 특사라, 평화회담은 민주당 용어야. 지금은 공화당 행정부라고. 다른 용어를 써야 해.” 프리처드는 500장 이상이 든 명함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대북협상 특사라는 새로운 직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명박 정부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도 지난 10년 좌파 정권의 용어라고 생각해서일까. 어딘지 비슷하다.

부시 행정부에선 군 출신이던 파월 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 혹은 프리처드조차도 온건하게 보였다.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고 대북정책에 강경으로 일관했던 네오콘 중에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인들은 전쟁에 신중하다. 일단 칼을 빼면, 피가 묻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무책임한 칼춤을 추는 건 대부분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다.

부시 행정부가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북정책을 바꿀 때, 네오콘도 퇴장했다. 국무부 중심의 부처 간 협의 결과를 중간에서 멋대로 변경했던 딕 체니 부통령실의 영향력도 그때부터 줄어들었다. 외교를 ‘정책’이 아닌 ‘도덕’이라고 생각했던 어설픈 아마추어들이 무대에서 사라졌을 때, 협상의 문이 열렸다.

대한민국에서 대북정책 역사는 협상파와 강경파의 ‘갈등의 역사’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1992년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이다. 1992년 9월16일 밤 11시30분께 평양 상황실은 서울로 훈령을 청하는 ‘청훈 전문’을 보냈다. 그때는 8차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장 회의가 있었고, 그때 북쪽은 남쪽의 임동원 통일원 차관에게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이인모 송환만 보장해주면 북쪽이 판문점 면회소 설치와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즉각 개시하는 데 합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애초 회담 대책이던 이인모 송환의 3대 조건, 즉 고향방문단 정례화, 판문점 면회소 설치, 동진호 선원 송환 중에서 비록 동진호 선원 송환은 어렵지만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지침을 관철할 수 있는 ‘검토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무책임한 칼춤은 전쟁 모르는 자들이

훈령 조작의 드라마는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서울로 청훈을 보낸 사실을 안 이동복 당시 회담 대변인은 안기부 통신망을 이용해 “이인모 건에 대해 3대 조건이 충족돼야 협의할 수 있다는 지침을 재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수신자도 적혀 있지 않은 동정 보고 수준이었다(이상연 당시 안기부장 증언). 그리고 대표단 사이에 아무런 협의도 없는 ‘단독 조치’였다(김종휘 외교안보수석 보고서).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타결’ 직전까지 갔던 북-미 미사일 회담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지난 2001년 3월15일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이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타결’ 직전까지 갔던 북-미 미사일 회담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지난 2001년 3월15일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이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훈령 조작은 이때부터 두 번 일어났다. 아침이 돼서도 서울에서 답신이 없자, 이동복 대변인은 엉뚱한 훈령을 정원식 대표에게 보고했다. 그 훈령은 평양 상황실에서 ‘기존 지침 고수’ 회신에 대비해 만든 예비훈령이었다. 서울에서 온 것이 아니라, 평양 상황실에서 예비적으로 만든 문서였다. 그것을 서울에서 왔다고 속였다.

정식 청훈은 어떻게 됐을까? 이날 오후 3시가 돼서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 전날 보낸 청훈이 왜 오후가 돼서야 보고됐을까? 당시 관계자들은 안기부가 고의적으로 지연 보고를 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나마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도 회담 대표단으로 참여했던 민병석 통일비서관이 서울로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아침이 돼서도 서울에서 훈령이 오지 않자, 민 비서관은 서울의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에게 전화를 해서, 왜 훈령을 보내주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때야 평양에서 청훈이 왔다는 사실을 안 김종휘 수석이 후속 조치를 취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지침을 내렸다. 그 내용은 “세가지 전제 조건이 다 수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불가피할 경우 고향방문 정례화와 다른 두 가지 중 하나가 관철될 경우 이 노인의 송환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후 4시께 서울에서 이같은 내용의 훈령이 평양에 타전됐다. 그러나 당시 이동복 대변인은 이를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미 가짜 훈령을 서울에서 온 것이라고 조작해서 보고했기 때문이다. 정원식 총리를 비롯해서 누구도 대통령의 훈령이 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회담은 결렬됐다. 대표단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훈령 조작하고도 레임덕 틈타 ‘어물쩍’

김종휘 수석이나 최영철 통일부총리는 황당했다. 대통령이 반드시 이산가족 문제를 합의해서 돌아오라고 했는데, 왜 회담이 결렬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들 놀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겠는가? 대표단이 평양에서 돌아온 지 닷새 뒤인 9월23일 정원식 총리 주재로 고위전략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의 모든 거짓말과 기망, 의도적인 속임수들이 폭로됐다. 정원식 총리는 그동안의 과정을 알고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는 말로 회의를 끝냈다. ‘레임덕’이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국면으로 넘어갔다.

이 문제가 국회에서 다시 제기된 것은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3년 11월이었다. 그때까지도 안기부장 특보로 있었던 이동복씨가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로 발탁된 즈음이었다. 그때 이부영 의원은 1992년 9월25일 작성된 임동원 차관의 경과보고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의 보고서, 통일부총리의 입장 등 문건 3개를 공개했다. ‘레임덕’으로 흐지부지됐던 진실이 폭로됐다. 감사원 감사가 시작됐다. 조사가 시작될 즈음, 이동복씨는 안기부에서 해임됐다. 감사원은 그해 12월21일 ‘8차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의 훈령 조작 의혹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동복씨의 지시로 정식 청훈이 차단됐고, 가짜 훈령이 조작됐으며, 정식 훈령을 묵살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했다. 바로 3급 비밀 전문의 유출이다. 1993년 7월 이동복씨는 3급 비밀로 분류된 일곱 차례의 비밀 전문이 인용된 해명서를 외무통일위 소속 의원들에게 전달한 바 있다. 감사원은 이동복씨의 비밀 문건 불법 유출이 사회적 물의를 야기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임기 말의 노태우 정부, 그리고 김영삼 정부에서 수치스러운 범죄는 어물쩍 넘어갔다. 그것이 이동복씨가 아직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자주파’ 논쟁은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당시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의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이 과정을 지켜보았다. 대통령의 지시로 꾸려진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에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단지 안타까움을 적어본다. 문제는 외교부나 국방부에 있었다. 이들은 2002년 말과 2003년 정권 출범 초기 청와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용산기지 이전 협상이나 전략적 유연성 등에 대해 문제의 소지를 포함한 합의를 했다. 그러나 싸움은 NSC와 국정상황실 사이에 벌어졌다. 그때 정부 차원에서 공론의 문화를 정착시키고, 대통령까지 기망한 관련 부처 개혁의 전환점으로 삼았어야 했다. 2007년 정상회담 때도 북방한계선(NLL), 서해에서의 공동 어로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통일부와 국방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어젠다

물론 외교안보 사안에서 부처 간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청와대의 정책 조율 능력이다. 그 중심에는 대통령이 있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대통령 어젠다’다. 모든 외교가 정상회담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전략적 방향은 대통령이 결정한다. 청와대 외교안보팀의 정책 조정 권한 역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책 방향도, 적절한 인사도 결국은 대통령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 외교정책과 대북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진단과 처방이 다양한 시각에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 그리고 능력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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