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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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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억류’ 해법, 왜 역사에서 못 배우나

노련한 미국과 김대중 정부, 대화와 압박 병행해 해결…
이명박 정부는 말만 앞세워 사태 악화
등록 2009-05-07 19:11 수정 2020-05-03 04:25

한반도 정세는 어디로 가고 있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엉거주춤, 이명박 정부의 ‘개념’ 없음, 그리고 북한의 ‘무데뽀’가 서로 뒹굴면서 한반도는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3명, 평양의 미국 여기자 2명과 개성의 유아무개씨,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억류는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1999년 민영미씨 억류 사건 당시의 떠들썩한 소동과 비교되는 이 요상한 무관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래도 되는가? 현대아산 사장은 ‘출근투쟁’이라도 하는데, 도대체 정부가 지금까지 유씨 석방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과거의 역사에서 제발 배우기를 바란다.

압록강 헤엄쳐 북으로 간 헌지커

‘출근투쟁, 오늘도 빈손이다.’ 북한에 억류된 직원 유아무개씨 석방을 위해 방북했던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이 4월21일 오후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남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유씨 억류가 한 달째를 맞고 있지만, 정부는 이렇다 할 석방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진 연합 김희태

‘출근투쟁, 오늘도 빈손이다.’ 북한에 억류된 직원 유아무개씨 석방을 위해 방북했던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이 4월21일 오후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남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유씨 억류가 한 달째를 맞고 있지만, 정부는 이렇다 할 석방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진 연합 김희태

1996년 8월24일 에번 헌지커가 압록강을 헤엄쳐 북으로 건너갔다. 헌지커, 그는 누구인가? 26살의 한국계 미국인 청년이다. 주한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혼했으며, 그 자신도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1년 남짓 살다가 헤어졌다. 스무 살을 넘기며 폭행, 마약 소지, 음주운전 등으로 경찰서를 드나들기도 했다. 불우한 혼혈 청년이었다.

헌지커는 북한 선교를 위해 강을 건넜다고 주장했다. 강가에는 낚시를 하는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헌지커는 ‘헬로’ ‘하우 아 유’ 하고 인사를 건넸다.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서투른 영어로 ‘후 아 유? 후 아 유?’ 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청년을 동네로 데려갔다. 며칠 동안 동네에 머물며 맥주도 마시고 북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이후 ‘기관’에서 찾아와 신의주의 압록강 호텔로 그를 데려갔다. 한 차례 어느 이름 모를 건물에 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1996년 12월12일 특파원이 헌지커가 살고 있는 미 워싱턴주 타코마시에 갔을 때, 헌지커 자신이 설명한 것이다. 흔치 않은 본인의 인터뷰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서 일주일 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제 발로 굴러들어온 ‘미국 청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한 달 반이 지난 10월6일 북한은 한국말 서너 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헌지커를 ‘남조선의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그때 북한은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북-미 관계도 교착상태에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헌지커를 미국의 간첩이 아니라, 남한의 간첩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헌지커의 아버지는 와의 회견에서 “걔가 간첩이라고? 웃기고 있네. 북한은 두 살배기 어린애도 미국인이면 간첩이라고 덮어씌우는 모양이지?” 그렇게 코웃음을 쳤다. 헌지커는 말썽꾸러기였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집안 사람들은 그의 돌발 행동에 놀라지 않았다. 그의 친척들은 “헌지커가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북한과 미국은 뉴욕의 유엔 대표부, 즉 ‘뉴욕채널’을 통해 논의를 시작했다. 11월 중순, 북한은 헌지커를 석방하겠다고 통보했다. 누군가 와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워런 크리스토퍼 당시 국무장관은 북한과 관계가 깊은 빌 리처드슨 하원의원(현 뉴멕시코주 주지사)에게 방북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방북을 위해 국무부와 백악관은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군용기를 타고 평양에 들어간 리처드슨 의원은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을 팀장으로 하는 북한 외교부와 협상을 벌였다. 북한은 헌지커를 핑계로 미국과 포괄적 대화의 기회를 잡았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의견을 밝혔고, 한국전 때 숨진 미군 유해 조사를 위해 2차 조사단의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헌지커는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주춤거렸던 북-미 관계가 다시 활성화되는 국면에서 북한이 미국에 주는 ‘선물’이었다.

‘뉴욕채널’ 협상으로 3개월 만에 석방

그해 11월27일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뜻깊은 날에 헌지커는 석방됐다. 3개월 만이었다. 북한은 헌지커가 묵었던 압록강 호텔 체류 비용으로 5천달러를 요구했고, 헌지커의 가족들이 이를 지불했다. 북한은 헌지커를 ‘남한 간첩’으로 잡았다가, ‘미국 사람’으로 풀어줬다. 엉뚱한 청년의 돈키호테식 모험은 결과적으로 북-미 대화의 ‘양념’이 됐다.

리처드슨 의원은 미국의 영웅이 됐다. 그러나 해결사로서의 그의 활약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94년 12월 북한이 미군 헬기를 격추시켰을 때, 리처드슨 의원은 마침 민항기 편으로 평양의 순안공항에 내려서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중국 기자가 헬기 격추 사건에 대해 물었다. 영문을 몰랐던 그는 당황했다. 그 순간 그의 방북 목적이 갑자기 달라졌다. 2명의 조종사 중 바비 홀은 살았고, 다른 조종사 데이비드 하일몬은 사망했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 체결로 북-미 관계가 활성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터진 이 사건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고자 했다. 리처드슨 의원은 사흘 동안 북한 외교부와 접촉하면서, 홀의 귀환과 하일몬의 주검 양도를 촉구했다. 예정에도 없이 협상가가 돼버린 리처드슨 의원은 워싱턴과 상의하기 위해 값비싼 호텔 전화를 이용했다. 나중에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리처드슨 의원의 출장보고서를 보고 웬 전화비가 이렇게 많이 나왔냐고 불평을 했다.

지난 1994년 12월22일 오전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가 격추 당해 목숨을 잃은 미군 헬기 부조종사 데이비드 하일몬 준위의 주검이 담긴 관을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에서 운구하고 있다. 사진 연합

지난 1994년 12월22일 오전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가 격추 당해 목숨을 잃은 미군 헬기 부조종사 데이비드 하일몬 준위의 주검이 담긴 관을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에서 운구하고 있다. 사진 연합

미 국무부 차관보가 직접 방북

북한은 당시 신속한 처리를 원했다. 그렇지만 공짜는 없었다. 일단 리처드슨 의원에게 하일몬의 주검과 함께 판문점을 넘어 돌아가도록 했다. 이후 강석주 부부장은 미국 쪽에 다른 외교사절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톰 허버드 국무부 차관보가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갔다. 북한은 홀의 석방 조건으로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다. 간첩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북-미 군사 대화를 시작하며, 한국이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버드는 단지 유감을 표명할 수 있을 뿐이며, 군사 대화는 적절한 형식으로 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물론 미국 정부는 ‘단호함’도 잊지 않았다. 허버드 차관보가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전화해서 홀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하자, 레이크 보좌관은 불같이 화를 냈다. 북한을 믿을 수 없으며, 제네바 합의도 재고해야 한다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북한이 당연히 도청할 줄 알고 일부러 강한 태도를 표시한 것이다. 북한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홀을 석방했다. 12월30일 홀은 허버드 차관보가 들고 간 크리스마스용 쿠키를 담은 쇼핑백을 들고 휴전선을 넘어왔다. 허버드 차관보와 홀은 과거 대통령 전용기였던 낡은 비행기를 타고 홀의 고향인 플로리다로 돌아갔다. 이른바 ‘허버드 양해각서’는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미국의 사과를 담은 문서와 함께 평양에 진열돼 있다.

남북관계에서도 억류 사건은 적지 않았다. 1996년 여름 소설가 김하기의 ‘취중 월북’은 해프닝이었다. 두만강 푸른 달빛에 취해 그는 강을 건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그가 우기에 불어난 강물을 어떻게 건너갔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를 데려간 북한 군인들이 그에게 물은 첫마디는 “동무는 남조선 수영 선수인가?”였단다. 신분이 확인된 그는 보름 만에 ‘추방’당했다. 훗날 남쪽 문인들이 합법적으로 방북했을 때, 북쪽 문인들은 그 사건을 ‘음주 침략’이라고 놀리면서 낄낄댔다고 한다.

이에 비해 1999년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 사건은 남쪽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무심코 북쪽 안내원에게 남쪽에 살고 있는 탈북자 얘기를 꺼냈다가, ‘남쪽 정부기관의 공작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억류된 것이다. 그 일주일 전에는 서해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민감한 시점이었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처음 발생한 엄중한 사건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가진 보수층의 분노가 폭발하는 뇌관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금강산 관광객의 신변안전을 위해 금강산 관광사업을 즉각 중단시켰다. 서해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도, 동해안에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던 정부였다. 그러나 억류 사태가 발생하자, 관광선을 세웠다. 물론 대화도 병행했다. 사업자인 현대가 적극적으로 석방 교섭에 나섰고, 국정원과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 간의 비공개 접촉도 가동했다. 이런 노력으로 민영미씨는 억류 나흘 만에 석방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부는 관광세칙과 관광객 신변안전조처를 마련할 때까지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선은 45일이 지나서야 다시 출항할 수 있었다.

민영미씨 억류 때 침착하게 대응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폭행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북한 군인을 음주운전으로 사망케 하는 사건도 있었고, 개성의 고려박물관에서 문화재를 훔쳐 들여오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다. 북한은 남북 합의에 따라 대부분 범죄 행위를 한 사람들을 남쪽 수사당국에 넘기는 선에서 처리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였다.

미국 여기자나 개성의 유씨 억류가 길어지고 있는 이유는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많은 미국은 조용한 해결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이명박 정부는 말을 앞세운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유씨 억류 사건과 관련해 유엔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미친놈.’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에게 그런 욕을 하는 사람의 발상답다. 교양이 없으면 실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억류 사건은 대부분 대화를 통해 해결했다. 냉전시대, 비난하고 규탄한 결과는 무엇인가? 억류가 아니라 납북 사건으로 변질돼 영영 해결하지 못했던 몇몇 경우들이 있다.

유명환 장관의 외교부는 유씨 사건이 단순 억류에서 정치적 인질 사태로 전환하는 데 이미 일조했다. 유씨가 석방되는 즉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를 발표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 북한이 풀어주겠는가. 이해하지 못할 행태다. 정치적 인질을 만들어버리더니, 결국 장기 억류의 빌미를 제공하고 싶은가. 지금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다. 정부는 뉴라이트 운동단체와 다르다. 운동단체는 비판하면 되지만, 정부는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의 능력을 보고 싶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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